어느 일요일, 여느날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산에 가려고 준비하면서 핸드폰을 들어 간밤에 온 메시지를 무심코 확인하는데 통상적인 문자들과는 다른 특별한 카카오톡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니라 진료를 받던 16세 여자아이 어머니께서 저 멀리 콜롬비아에서 연락을 주신 것이었다. 이 가족은 아버지께서 회사 주재원으로 남미 나라들을 2년에 한 번꼴로 이동하면서 외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이고 한국에 가끔 나올 때 진료를 받았기 때문에 혹시라도 현지에서 치과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현지 치과방문이 힘들거나 자문을 구할 일이 있을 때 이용하시라고 메시지 친구로 등록을 해드렸었던 가족이었다. 메시지의 내용은, 아이가 평소에 이갈이가 있었지만 일상생활에 크게 불편감은 없어서 그냥 지내왔는데 어느 날부터 턱관절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입이 잘 안벌어지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현지 치과에 방문해서 물리치료 등 여러 가지 처치를 받았는데 개선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해저서 이제는 입이 1cm정도 밖에 안벌어지고 통증도 심해서 일주일째 미음을 흘려 넣어 겨우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고, 결국 현지 대학병원 치과까지 가보았는데 상태가 너무 심하니 전신마취하에 턱관절
미국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백악관, 국회의사당, 워싱턴 기념비, 링컨 기념관 등이 모여 있는 광활한 공원 지역을 ‘내셔널 몰(National Mall)’이라 부른다. 이곳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포토맥강 건너편의 알링턴 국립묘지다. 이곳에는 약 43만 명이 매장되어 있으며, 남북 전쟁에서부터 9·11 테러,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목숨을 잃은 수많은 군인이 잠들어 있다. 알링턴 국립묘지가 매우 넓은데도 불구하고 어떠한 음식물도 반입이 금지되어 있다. 알링턴 국립묘지는 완만한 언덕을 따라 조성되어 있는데,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는 ‘알링턴 하우스(Arlington House)’라는 베이지색 건물이 케네디 대통령 묘지 바로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알링턴 하우스는 외관이 웅장하지만 내부는 비교적 소박하다. 원래 이 집은 남북 전쟁 당시 남군 총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Robert E. Lee) 장군이 살던 곳이다. 리 장군의 아내 메리 애나 커스티스는 조지 워싱턴의 자손이었고, 워싱턴이 남긴 막대한 토지 중 일부가 리 장군의 아내 메리에게 상속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알링턴 국립묘지 부지 전체에 해당하였다. 리 장군 부부는 대가족이 모여 정원도 만들
방문치과진료는 병원 진료실을 벗어나 환자의 삶의 자리로 들어가는 의료이다. 환자의 집, 요양시설의 작은 방, 침대 옆의 좁은 공간이 진료실이다. 치과용 체어 대신 침상 가장자리에 앉고, 천장등 대신 형광등 아래에서 구강을 들여다본다. 의료는 더 이상 ‘내 공간으로 환자를 불러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환자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방문치과진료는 단순한 “찾아가는 의료서비스”가 아니다. 의학적·기능적 이유 즉 거동이 어렵고, 전신질환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으며, 이동 자체가 위험이 되는 사람을 위한 특별한 진료 형태이다. 치과 진료실에는 익숙한 장비와 인력, 응급 대응 체계, 감염관리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방문 현장에서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공간은 협소하고, 장비는 제한적이며, 응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즉각적인 대응 여건도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진료 환경을 정교하게 구축하지 않으면 더 위험해질 수 있다. “어떻게 준비하느냐”가 그 성패를 좌우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에 방문치과진료의 성공의 핵심은 다음의 세 가지 질문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핵심 I. 누구를 방문할 것인가? 안전한 대상자 선별의 문제 방문치과진료는
절실하게 느끼기 전에는 평소 누리던 것들에 대해 고맙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흔히들 말한다. 호흡하는데 필요한 공기를 고맙게 여기기는커녕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대기오염이나 황사로 인해 호흡에 불편을 느끼고서야 맑고 신선한 공기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살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하나라도 있으면 불만불평을 늘어놓기가 일쑤다. 나중에 결혼해서 애 낳고 살면서 어려운 현실에 직면해서야 부모님의 사랑과 고마움을 느낄 때가 많다. 고마움을 느끼기는커녕 그때가 되어서도 부모님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경우도 많다. 예전에는 나이가 들어 애 둘은 낳아야 철이 든다고 했는데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결혼연령도 늦어지고 여러 가지 이유로 비혼주의자도 많고 철이 들기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철이 안 든다는 우스갯소리를 많이 듣는다. 같은 공간에서 수십 년 근무하면서 보람을 느낄 때도 있지만 몸이 불편해서 쉬고 싶을 때도 있다.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최근에 한 번 심하게 아파서 고생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평범한 일상이 정말 소중한 순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심하게 다치거나 아픈 후에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우리는 타인의 시선 속에 살고 있습니다. 타인의 기대와 평가가 때로는 우리를 성장시키지만, 어떤 순간에는 한 사람의 삶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러시아 후기 낭만주의의 거장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yevich Rachmaninoff, 1873-1943)의 삶은 그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림 1). 그는 러시아 노브고로드 지역에서 태어나, 말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생을 마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지휘자였습니다. 그의 음악은 흔히 ‘낭만주의의 언어’로 기억되지만, 그 인생을 관통하는 더 뚜렷한 줄기는 타인의 시선이 한 사람을 무너뜨릴 수도, 다시 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라흐마니노프의 경험을 ‘타인의 시선’ 이라는 렌즈로, 다섯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기대와 검증’의 시선입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어린 시절부터 재능 있는 소년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 시선은 곧 기대로 바뀌었고, 기대는 젊은 예술가에게 ‘증명해야 하는 과제’가 됩니다. 그는 17-18세 무렵, 이미 피아노 협주곡 1번(Op. 1)을 썼고, 자신이 단지 연주자가 아니라 작곡가임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이 작품은 지금 들어도 번뜩이는 패기가 느껴지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이후, 전세계는 상식을 뛰어 넘는 그의 언행에 연일 술렁이고 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주권 국가인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라 부르는가 하면, 덴마크령의 그린란드를 상의도 없이 미국에 편입시키겠다고도 하고,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는 심지어 생방송 중임에도 ‘당신네 나라는 거지 신세’라고 모욕하며 백악관에서 쫓아내기도 했다. 오랜 동맹인 한국과 일본에 대해서도 ‘수십 년간 미국을 착취해온 대표적 나라들’이라고 하는 등, 천박(?)하게 자기 힘자랑에 열심인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협상을 위한 계산된 언행이라고 하더라도, 전 세계인들에게는 충격이고, 지난 미국 대통령들은 그 누구 보다 점잖은 성자이고 신사였다는 느낌이다. 그간의 글로벌 정치, 외교가 비록 위선일 수는 있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체면과 예의를 갖추었다면, 이제는 아예 가면을 벗어 던지고 원래 그대로 ‘날’ 것의 원초적 욕망을 드러내는 게 자연스러워진 느낌이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지만, 돌고 도는 역사의 필연일까? 세계는 약육강식의 동물적 제국주의시대를 겪은 지 채 100년도 안되어 다시 그 시대로 회귀하고 있는 듯하다. 누구보다 아픈 제국
필자가 어린 시절(초등학교~고등학교)에는 아파트가 아닌 주택가에 살았었습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동네 분위기와 똑같았습니다. 촘촘히 사방팔방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골목길, 그 골목길 안에 다양한 색깔의 철대문들, 그리고 각 집 담벼락 앞에 있는 쓰레기통 옆에 다 타서 내버려진 연탄들... 지금 떠올려보면 정감 어린 추억의 장면입니다. 학교를 갈 때에, 그리고 방과 후에 집에 올 때에도 항상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지냈습니다. 그러면 골목길에서 어른들을 마주치기 일쑤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다른 친구들 보다 먼저 한걸음에 달려가서 그분들에게 “안녕하세요”하고 크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어른들께서는 “아이구 그 녀석 인사성도 밝네” 하시면서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칭찬을 해주시곤 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기분이 더 좋아져서 정말 더욱 열심히 인사를 했습니다. 물론 어른들을 공경하는 마음은 기본이었구요. 그 습관이 지금 환갑이 된 나이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치과병원에 방문한 환자 아이들이나 보호자분들께는 물론이고, 건물의 청소 주임님, 경비 주임님들에게도 출퇴근하면서 마주칠 때마다 밝게 웃으며 큰 소리로 인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그분들도 힘든
작년 연말에 반가운 e-mail을 받았다. 메일을 보고, 예전 미국 미시간 앤아버에서 지낸 2년간의 추억이 다시 떠올랐다. 미시간에서 연구년을 시작한 2007년, 지역 센터(community center)의 소개로 자원봉사로 영어 대화 파트너(conversation partner)를 해 줄 수 있다는 학생과 연결이 되었다. 이후 미시간 공대 2학년 학생 John과 만나 영어회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John과 나는 기말고사 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빠짐없이 매주 한 번씩 캠퍼스에서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분에 미국 사회의 경제, 정치, 종교 현황, 미국 대학생의 일상, 가치관 등에 대하여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폭설로 우리 아이들의 학교도 휴교하던 어느 날, John이 약속 시간보다 한참 늦었다. 눈 때문에 버스가 잘 오지 않아서 아침에 한 시간을 걸어서 도착한 north campus의 공대에서 실험하고,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또 한 시간을 걸어서 치대가 위치한 central campus에 도착한 것이었다. 3학년이 되자 John은 의대에 가고 싶다면서 본격적인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John은 주말에 미시간대학 어린이병원(Children’
방문치과진료는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와 장애인을 주 대상으로 하며, 단순히 진료 장소를 외래에서 가정이나 시설로 이동시키는 개념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대상자 선별 기준, 진료의 개념과 범위, 운영 방식, 그리고 법·보험 구조 전반에 있어 기존의 내원 중심 치과진료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별도의 의료체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방문치과진료가 안전하고 지속 가능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의료·요양·복지의 통합적 연계, 표준화된 진료 범위의 설정, 명확한 보험 수가 체계,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진료기록 및 질 관리·감사 시스템의 구축이 필수적이다. 본 시론에서는 독일과 일본의 방문치과진료 모델의 개관을 통해 향후 한국형 방문치과진료 제도 구축을 위한 방향성을 제안하고자 한다. 독일 방문치과진료: 건강보험 확대·강화와 연계한 자율형·독립형 확산 모델 독일의 방문치과진료는 1990년대 후반부터 제도적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2012년 이후 법·보험 체계를 갖춘 치과의료 모델로 정착되었다. 독일은 전체 인구의 약 90%가 법정 건강보험에 가입되어 있고, 요양시설 입소 노인 역시 동일한 보장 체계에 포함되어 있다. 이로 인해 방문치과진료는 예외적 제도가 아니라, 건강보험의 확
허리가 아프다. 수석취미를 한지 꽤 되었다. 작은 돌부터 큰 돌에 이르기까지 집안 구석구석이 돌이다. 과유불급이라 했는데 알면서도 그 선을 지키지 못해 후회막급이다. 이젠 젊은 나이도 아니고 무거운 돌 들다가 허리 다치니 수석하지 말라며 아내부터 주위 사람들까지 말리곤 했다. 하지만 이상한 매력에 빠져 시간만 나면 바람도 쐬고 시름도 잊을 겸 가까운 하천으로 탐석하러 다녔다. 준설공사현장이라 하천바닥에 있던 돌들이 많이 노출되어 마음에 드는 돌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수석을 처음 시작할 땐 작은 돌이 예뻐서 가볍게 들 수 있는 표준석(15~45cm) 이하로만 취급했다. 탐석현장에 오니 자꾸 큰 돌에 눈길이 가서 대형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갖고 오면 집에 놓을 곳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쌓여만 가는 돌로 인해 아내의 잔소리는 날로 갈수록 심해지고 온 거실 온 마당이 돌로 가득 차게 되었다. 예전 글에서 돌 돌 하다가 돌탑 쌓고 돌무덤 되겠다는 우스갯소리가 점차 현실화되는 것 같았다. 필자가 소설의 주인공 같아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로는 돌에 꽂혀 돌 외엔 보이는 게 없다며 깊이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정작 본인은 그 경계를 자제 못 하고 사고를
바나나는 한국인에게 거의 예외 없이 사랑받는 과일입니다. 칼륨과 비타민 B6, 식이섬유, 마그네슘 등 일상에서 부족해지기 쉬운 영양소를 고르게 품고 있어 ‘가성비 영양 과일’이라는 별칭도 자연스럽게 따라붙습니다. 가격 접근성이 높고 사계절 내내 큰 변동 없이 안정적인 덕분에, 어느 가정에서든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누구나 부담 없이 선택할 수 있는 과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흔한 바나나가 단순한 식품을 넘어, 한국 경제가 걸어온 궤적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생활 경제의 지표라는 사실은 의외일지도 모릅니다. 1970년대 한국에 바나나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지금의 바나나와 전혀 다른 존재였습니다. 수입 규제가 엄격해 일반인에게는 ‘보기만 해도 신기한 과일’이었고, 한 송이 가격이 짜장면 열 그릇에 달할 만큼 비쌌습니다. 귀한 외화를 써야만 맛볼 수 있는 고급 수입 과일이었고, 국내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한 탓에 ‘외국의 풍요’와 ‘한국의 부족함’을 상징적으로 대비시키는 물건이기도 했습니다. 말 그대로 바나나는 한국인에게 부유함이 느껴지는 과일, 현실과 꿈 사이 어디쯤에 놓인 사치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바나나는 사과·배와 어깨를 나란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