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위생학과를 졸업하고 막연하게 대학병원 입사를 꿈꿨다. 그곳에서 멋진 선생님들과 다양한 진료를 경험하며 나의 커리어를 쌓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바람을 하늘도 알아준 걸까. 운 좋게 졸업을 하자마자 대학병원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고 계약직 치과위생사로서 총 3군데의 대학병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20대는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다닌 대학병원의 계약이 끝났을 때는 어느덧 31살이었다. 솔직히 나는 대학병원 ‘정규직’ 치과위생사를 꿈꿔왔다. 안정된 직장, 정년을 보장받는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모 대학병원 면접에서 떨어진 뒤 정규직 자리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더 이상 나질 않았다. 그때 난 ‘이제 어떡하지? 로컬로 가면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 “선생님이 걱정할 게 뭐가 있어?”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항상 내 삶이 불안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큰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올해 6월부터 강남의 치과로 출근을 시작했다. 병원을 다니면서 크게 느낀 점은 ‘내가 아직 공부할 게 많구나.’, ‘더 열심히 본업에
처음 신문 기고를 부탁받았을 때, 나의 어떤 이야기가 치의신보를 구독하시는 분들께 읽을거리가 되고 귀감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영화, 여행 등 다양한 주제를 생각해보았지만 한 치과대학의 총대표로서 학생을 마무리하는 과정에 있는 만큼 이러한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 것이 치과의사 선배님들께도, 아직 학생신분인 후배님들께도 읽을만한 글이 될 것 같아 ‘치과대학생을 마무리하며’ 라는 주제로 글을 쓰게 되었다. 나의 입학생 시절부터 졸업을 앞둔 지금까지의 평범하고, 평범하지 못했던 치과대학 학생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나는 예과출신으로 2016년도 전북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의료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적은 없지만, 그 당시에 많은 심정의 변화가 있어 치과대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 해에는 위 학년 선배들을 제외하고 치의학전문대학원(이하 치전원) 세대였기 때문에 선배들과 10살, 많게는 15살 이상 차이가 난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동아리에 가입하고 술자리를 가지며 연애, 과외도 하고 여행도 자주 갔다. 또, 지금 교수님들께서 보시면 분개하실 이야기이지만 F학점도 받으며 학사경고에 가까운 성적으로 예과를 마무리하였다. 본과에
1. 중국집에서 짬뽕 하나와 짜장 한 그릇을 시켰는데 짬뽕 두 그릇이 나왔다. 동석자가 짬뽕을 싫어하는지라 짜장 한 그릇을 추가로 시켰다. 종업원이 안절부절 미안해하면서 음료수를 서비스로 준다 하는데 개의치 말라 하였다. 짬뽕 면을 절반 정도만 먹고 해물 등 내용물을 건져 먹었다. 계산을 하는데 종업원이 고맙다고 복 받으시라 하였다. 주인은 한 그릇 더 팔아 이윤을 남겼고(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고) 나는 복 받으라는 소리 들었으니 서로 득본 셈이다. 배부르다. 2. 성당에서 600명 들어가는 규모이니 방역수칙에 의해 60명이 참여할 수 있는데 30명이 채 안 되는 신자들이 미사 드리러 오셨다. 복잡거리는 것보단 고요함과 적막감이 마음을 충만케 하는 뭔가가 있어 좀 더 미사에 집중할 수 있어 마음은 편안했지만, 이 코로나19가 언제나 잠잠해 지련지. 성가를 부를 수 없어 미사의 장엄함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영성체 후 묵상 시간에 홀연 피아노 반주가 울리고 젊은 남성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예상치 못한 소리에 긴장하여 귀 기울이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도 아름답고 청아해 난 감동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미사가 끝났어도 난 그 여운을 좀 더 간직하고자 한참을
제가 페이할 때 치의신보에 글을 한번 적은 적이 있다. 한 12년 전의 일인데,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때 기고한 글의 제목도 아마 “선배님 어떻게 하면 성공한 삶을 살 수 있나요?” 였을거다. 인생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는데 선배들은 한결같이 소위 말하는 대박 치과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으셨다. 어떤 선배는 환자들한테 카리스마 있게 대해야 하고 말수를 줄여야 성공할 수 있다는 선배도 있었고, 어떤 선배는 친절하게 환자에게 사근사근 말을 많이 해야한다는 선배도 있었다. 또 직원들한테 잘해줄 필요는 없다는 선배와 직원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어야 그 병원도 잘된다는 선배도 있었고 되게 다양했었다.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선배들이 인생의 성공 기준을 병원 매출로 생각하는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얼마나 버는 게 성공의 척도가 될수 있겠구나’, ‘선배들 입장선 내가 이렇게 하다보니 병원이 잘되니 너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구나’ 즉 심리학적으로 내가 이렇게 해서 성공했으니 나와 같은 방식으로 해야지만 너도 성공할수 있어! 아니면 실패할거야! 이런 기본 전제가 깔린 마인드라고 분석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기도 하다. 그 말인
요즘, 시국이 시국이라 실내운동보다는 실외운동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실외운동족 중 하나인데, 2년 전에 달리기를 통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얻기 시작해 요즘에는 등산을 즐기기 시작한 요즘 말로 ‘등린이’입니다. 평일에는 일하느라 등산을 못 하지만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는 주말을 이용해 산에 올라갑니다. 달리기도 그렇지만 등산 또한 고강도 운동이라는 건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등산을 한다고 하면 이런 말을 참 많이 듣습니다. “어차피 내려올거 고생을 왜 사서 하나요?” 땀을 뻘뻘 흘려 오른 정상에서 보이는 풍경의 짜릿함은 올라가 본 사람만 아는 즐거움입니다. 등산의 짜릿함을 알고 나면 계속 오르고 싶어지는 묘한 매력이 있어 올라갈 때 힘들다가도 또 올라가고 싶은 것이 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산이라고 모두 똑같지는 않습니다. 음식의 종류가 다양하듯, 음식이 입안에서 저작과 함께 어우러지는 대향연이 쫙 퍼지듯 산이 품는 매력도 다양합니다. 어떤 산은 여성스러우면서도 당찬 느낌을 주기도하고, 어떤 산은 잔잔하면서도 기품 있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너무도 다양한 느낌을 주는 산의 매력, 산의 맛은 구강의 미각(맛)과도 비슷합니다. 미각
동네 어르신들 보면 가끔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도 난다. 국민학교 6학년 내일이 개학날, 8월 24일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우리 가족과 함께 살던. 엄마가 불과 몇 달 전까지 병 수발을 하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6월 15일로 기억하고 있는데, 우리 가족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다가 쫓겨난 날이. 나는 4년 전 큰엄마, 큰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하루아침에 버리고 나갔던 날을 기억한다. 12월 24일 큰엄마, 큰아빠가 이사 나간 날이다. 그 시절 구경도 한번 못해 본 아파트란다. 이삿짐 나르는데 엄마를 졸래졸래 따라가서 아직 온기가 돌지 않은 추운 방에 빨간 이불 짐을 내리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엄마가 혼잣말로 ‘뭐가 급하다고 이 추운 겨울에’라고 한숨 쉬던 모습도. 근방에 살고 있었던 나와 오빠를 매일 밤마다 데리러 오던 할아버지를, 매일 데리고 자던 사촌오빠들의 따뜻한 온기를 그리워했겠지. 엄마는 가기 싫은 나와 오빠의 손을 잡으며, 오늘만 자고 오라고. 그건 매일이었다. 그러기를 한 3, 4개월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기로 했다고,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기로 했다고. 어린 마음에 큰 집으로 이사 가
오늘도 출근하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내가 탄 버스는 항상 앞으로만 간다. 후진, 즉 뒤로가지 않는다. 그렇듯 나도 내 인생에서 앞으로 가기만 했다. 다시 말해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부끄럽고 창피한 세월일지 몰라도 비로소 한번 치과의사로서의 지난날을 돌아다 보았다. 치과의사가 된지 얼마나 되었을까. 벌써 39년. 까마득한 옛날이었구나 생각이 든다. 경사가 심하지는 않으나 끝없이 이어지는 산등성이의 제일 높은 곳에 올라 돌아다보면 지나온 길이 끝없이 보이는 것처럼 치과의사로서 지내온 길이 벌써 한참이었구나 생각이 들자 마자 얼마나 남았을까 하는 잡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간다. 치과의사가 될 재주도 없는 내가 지인의 지나가는 한마디에 현혹되어 치과대학에 진학했고 손재주가 유난히도 없어 예과, 본과를 거치면서 실습시간마다 가장 늦게까지 남아서 검사 받는게 일상사였던 내가, 실습시간의 잔혹함을 못이기고 그만둔 여러 명의 동기들처럼 결단력도 없고 용기도 없어 끝까지 어찌어찌하여 치과의사가 되었고 지금껏 지내온건 무슨 조화이고 과연 누구의 도움이었을까 하며 돌아다 본다. 구강외과 수련기간 무모하기도 하고, 어설펐던 젊은 치과의사 시절의 치
사람은 선천적, 도덕적으로 자신이 가지는 본성이 있다. 미움은 인간의 본성이 외부 사물과 접해서 형성되는 일종의 성질이다. 형성된 성질에는 일곱 가지 정(情)인 칠정(七情)이 있단다. 즉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즐거움(樂), 사랑(愛), 미움(惡), 욕심(慾)이 있단다. 불교에서는 기쁨(喜), 성냄(怒), 근심(憂), 두려움(懼), 사랑(愛), 미움(憎), 욕심(慾)이 있단다. 미움은 남이 나보다 잘 되거나 낫게 되는 것을 공연히 시기하고 샘내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거다. 나쁜 성질이다. 나쁜 성질이라 해도 이런 성질은 있게 마련이다. 살아가는 동안의 미움이 어떠한지 알아보자. “아홉 살 일곱 살 먹을 때까진 아홉 동이네에서 미움을 받는다”라는 말이 있다. 즉 아이들이 아홉 살까지는 장난이 심하고 말을 잘 안 들어 이웃으로부터 말을 듣고 미움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런 미움은 그냥 생기는 거다. 사물이나 모상을 만나 생기는 게 아니다. 이쁜 미움이다. 아홉 살이 미움을 받자고 스스로 말을 안 듣고 장난을 심하게 하는 게 아니다. 단지 천성으로 내려오는 거다. 아홉 살짜리는 어른들로부터 야단을 맞고 미움을 사나 자기네끼리는 미움이 없다. 다만 소소
어린 시절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작으나마 정원, 폼 나게 말하자면 가든이 있었다. 철이네는 봉숭아물 들이고 종이네는 채송화, 길 건너 큰 기와집 가든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 집 딸내미가 이뻐서인지 꽤나 이뻤다. 미루나무를 기둥삼아 나무대문이 달린 동네에서 유일하게 초가집이었던 우리 집은 찾아오시는 분들이 꽃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는 게 빨랐을 만큼 수많은 꽃과 나무가 어우러져 있었다. 5학년 여름방학 촌놈은 서울로 전학가고 방학이 되면 예닐곱 시간 걸리는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데 몇 시간 연착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 어느 여름 여전히 연착된 기차를 내려 달님 따라 다다른 집대문을 여니 툇마루까지 길 양옆 글라디올러스 꽃과 잎사귀 위 수많은 이슬방울에 스며든 백열등 빛은 그야말로 보석이었다. 순간 걸음을 내닫지 못하고 멍히 서 있던 나에게 한걸음에 달려오신 어머니. 누구나 그 때는 나름 정원을 갖고 있었다. 낚시대 드리운 석촌호수 옆으로 덤프가 흙먼지 날리더니 여기저기 솟아오르던 높은 주거지, 그 때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차츰차츰 저 멀리 땅 끝까지 아파트로 덮여가면서 정원은 남의 나라 일처럼 되어버렸다. 우리들 마음 한구석에는 정원에 대한 그
“치과의사”라는 업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는 요즘입니다. 한 종편 방송에서 수술실 cctv 설치 관련해서 대리수술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그 과정 중에 마치 구강악안면외과 의사가 악교정수술을 한 것이 잘못이라는 것처럼 얘기하며, 진행자가 “치과의사가 성형수술을요?”라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방영되었습니다. 악교정수술, 윤곽수술의 전문가라는 의사 패널은 “무면허 진료”라 하더군요. 많은 구강악안면외과 의사들이 분노했고,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악교정수술을 업으로 삼고 있는 구강악안면외과 의사의 감정이 앞서 있었지만, 결국 제 마음을 뾰족하게 만든 한 마디는 “치과의사 가요?” 라는 진행자의 격양된 목소리였습니다. 언젠가부터 치과의사는 여러 미디어에서 얕은 캐릭터를 도맡았습니다. 주말 드라마에서는 바람둥이로, 영화에서는 돈만 밝히는 사기꾼으로 등장합니다. 제가 좋아했던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에서는 외과 의사를 꿈꾸는 수련의 크리스티나(샌드라 오 役)가 자신의 아버지가 치과의사임을 밝히는 것을 창피해 합니다. 치과의사를 보는 시선은 동서양이 크게 차이 나지는 않는가 봅니다. 현재의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미디어에서 의도하고 창조한 걸까요, 아니면 우리
치과의원장이라는 직위는 참으로 어려운 자리라고 생각한다. 기업에서 말하는 경영자와 근로자가 모두 원장이다. 즉 치과의원에서 경영의 고용주와 생산의 중요한 근로자가 원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 원장들에게 강의를 할 때, 의원을 창업하는 일은 “종합예술”이라고 설명을 한다. 투자자, 감독, 작가, 섭외 그리고 주인공이 모두 원장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폼나게 출근을 하고 커피를 한 잔 마시고는 YTN 뉴스를 보며 최저임금 42% 인상과 주 52시간제의 시행을 잠깐 생각해 본다. 오전 10시에 맞추어 환자를 본다. 그러다 점심시간에 시간을 내어 협력업체의 밀린 잔금을 이체하고 오후 2시에 맞추어 다시 환자를 본다. 오후 6시 30분, 막내 직원 한 명이 원장실을 두드린다. 우리 치과와 맞지 않아 퇴사를 한다고 통보를 받는다. 고맙게도 카톡으로 퇴사를 전하지는 않았다. 피곤하지만 퇴직연금과 실업급여 등이 머리를 스쳐간다. 드디어 집이다. 피곤함은 샤워로 달래고 저녁을 먹고는 알게 모르게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한다. 다음 날 아침, 구인광고를 알아보고 정부가 말한 최저임금이 막내 직원의 급여를 가볍게 넘어간 사실을 알고는 놀라고 걱정하기를 반복한다. 직원이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