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중학교 2학년때. 학기초 수학시간에 옆 자리에 앉은 서로 데면데면한 짝꿍이 갑자기 저 선생님 이름이 뭐냐고 묻기에 정확히 기억 나지는 않지만 ‘뭐라뭐라’ 선생님의 존함을 불경스럽지 않게 알려주던 그 찰나에 왼쪽 정수리를 때리던 묵직한 타격감과 눈앞에 흩뿌리던 분필가루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앞에서 2번째 자리에 앉아 칠판에서 내 자리까지의 거리는 비교적 짧아 분필지우개를 던지는 선생님의 제구력은 완벽했고, 그 분필지우개를 포구하는 내 정수리의 위치도 완벽했던거 같다. 그 순간 칼날 같은 제구력을 뽐내시던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잡담금지’. 엄밀히 말하면 선생님의 존함을 친구에게 알려주는 정보의 전달이 잡담은 아니었으나, 그 날 이후 잡담은 내 머리 속에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며, 자칫 잡담을 하면 폭력적인 응징으로 나의 육체를 힘들게 할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한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어린 시절을 보내왔다. 어른들에게 잡담은 그리 생산적이지 않은 일이며 성공의 반대편에나 있는 무리들이나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낙오의 방정식이었던 것이었다. 잡담은 시간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일이고, 자칫 인생에서 낙오자로 자리잡게 하는 낙인이었
2023년 세계 행복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57위로 OECD 국가 중 꼴찌를 기록했다. 그나마 2022년도 59위보다는 2단계 올랐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최근 신림역 칼부림 사건에서도 피의자는 경찰조사에서 나는 불행하게 사는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언급했다. 요즘 주위에서 ‘나는 참 행복하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직장에서의 일 때문에 혹은 직장 상사 등 사람 때문에 행복하지 않고, 취업이 안 돼서 행복하지 않고, 사업을 하는데 잘 되지 않아서 행복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 최근에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되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하루하루가 경영한다고 힘들고, 환자 보느라고 힘들다. 환자가 많으면 많아서 힘들고, 적으면 적어서 힘들다. 또한 누구는 어디에 집을 샀다더라, 주식을 해서 큰돈을 벌었다더라 등 누군가와 비교를 하다 보면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불행으로 표현하기에는 많이 부정적인 단어인 것 같다.) 누군가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한다
<The New York Times>에 오랫동안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 “The Ethicist”가 있습니다. 현재 뉴욕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윤리학자 콰매 앤터니 애피아가 맡은 이 칼럼은 독자가 보내는 윤리 관련 질문에 윤리학자가 답하는 방식으로 꾸려지고 있습니다. 치의신보에서 매월 1회 의료윤리 주제로 같은 형식 코너를 운영해 치과계 현안에서부터 치과 의료인이 겪는 고민까지 다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약력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졸, 동병원 소아치과 수련.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 및 건강정책 교실 생명윤리 석사. 연세치대 치의학교육학교실 교수 저서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2018), 역서 <의료인문학과 의학 교육>(2018) 등. “여기 교수님 약력에 보니까 처음 보는 단어가 있어서요. 의철학? 오타 아니죠? 이런 것도 있어요?” 예, 선생님.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단어이실 것 같아요. 의철학(醫哲學)은 philosophy of medicine, 외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의학의 철학을 부르는 우리 표현입니다. 국내에서도 “한국의철학회”라는 이름으로 학회가 출범한
‘올해’라는 시간이 이제 한 달 남짓 남았습니다. 이 시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의 때가 되면, 지난 시간 못했던 것들과 부족하게 해주었던 것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사태를 미연에 막아낼 수 있었는데 하는 회한이 깊습니다. 마무리는 끝이 아닙니다. 단지 미안하고 부족하고 아쉬운 것들을 다시 보듬고 마음을 다잡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에 무게를 싣고 감사함에는 감사함을 불러주어야 합니다. 스스로에 감사하고, 감사해준 것에 기꺼이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으로써의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자극이 됩니다. 생색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무책임한 감사도 있습니다. 옳지 못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감사하는 자리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진실함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별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요즘처럼 정보가 쉽게 오고 가며 확산 속도가 빠른 환경에서는 진심을 숨기고 내지른 한마디 감사의 말이 존중받아야 하는 다른 여러 사람까지 부정적으로 만들어 손해를 입히기도 하고, 종국에는 비웃음의 비수로 되돌아오게도 합니다. 우리의 가치를 높이는 감사가 필요합니다. 감사함이 넘치는 감사를 하는 것이 우리의 자존감을 더 높여줌을 살아오는 내내
결혼식 풍속도가 변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가족과 가까운 친지만의 잔치에 주례는 거의 사라졌다. 이런 변화에는 장점도 있겠지만 결국 결혼의 무게감 또한 가벼워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과거에는 갑자기 주례가 빠지면 예식장의 대리 주례자가 등장하였다. 말끔한 정장에 유창한 주례사가 일품인데, “신록이 짙어가는 화창한 봄날에...”로 시작하는 천편일률의 ‘미사여구’였다. 그래서 미사여구 하면 성의 없고 내용이 빈약한 허사(虛辭)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지난 7월 15일 대전에서 전직 의장단 회의가 열렸다. 협회장 직선제 실시 후 관례처럼 뒤따르는 ‘선거결과 불복행위’가 도를 넘었으니, 원로들이 중재에 나서달라는 여론에 따른 것이었다. 세 시간이 넘는 열띤 토론 끝에 결론은, 의장단과 필자에게 당사자를 만나 조정을 시도하라는 위임이었다. 만남은 무산되고 박 의장의 ‘소송중단촉구’가 보도되었으나, 부척연은 이 또한 “내부 협의, 화해는 미사여구” 라는 거절로 응답하였다. 대전 태화장에서는 기자들을 내보낸 뒤 매우 격앙된 대화가 오고 갔으나, 박 의장은 외부에 공개되는 촉구문에 지극히 절제된 완곡한 표현을 한 것인데, 대화의 자리마저 거부한 부척연의 ‘미사여구’
자귀나무는 나에게 특별하다. 내가 숲공부를 할 때 우리 기수(숲연구소 30기) 이름이 바로 ‘자귀나무’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낯선 이름이었지만 즐겁게 나무공부 하였던 기억이 있다. 자귀나무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니지만, 가끔 아파트공원 또는 내가 출근하는 동부간선도로 옆에 수줍게 숨어있는 자귀나무를 발견할 때면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자귀나무의 정수는 꽃이다. 6~7월 장마 때 피기 시작하고 50개에서 80개 되는 연분홍빛 실타래뭉치 같은 꽃이 군데군데 열리는데 이 모습은 천상의 꽃처럼 신비하고 아름답다. 그 향기 또한 진하고 한번 맡으면 취하게 만든다. 실제로 중국 당나라의 두양의 부인은 남편의 베게밑에 자귀꽃을 두고 술에 타서 피곤한 남편을 기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서로 갈라져서 마주보던 잎들이 신기하게도 밤에 겹쳐지는 모양을 보고 남녀가 자는 모습 같다 하여 야합수(野合樹)라 불리기도 한다. 자귀의 어원은 우스개로 잠자는 귀신같다고 하여 ‘자귀’이고 나무 깍는 연장인 ‘자귀대’를 만드는 나무라 하여 ‘자귀나무’라 불리기도 하였다. 다른 이름으로는 합환목(合歡木), 껍질을 말려서 약초로 쓰는 합환피(合歡皮) 합혼수(合昏樹), 합혼
구강노쇠는 ‘저작능력감소’와 ‘삼킴기능악화’라는 구강기능장애로 귀결된다. 앞선 시론에서는 ‘저작능력감소’와 관련하여 치아 상실과 기능중인 치아 수의 감소에 따른 교합력 감소, 노쇠와 뇌병변에 따른 혀-입술 근력 약화와 설압 감소를 언급하였다. ‘저작능력감소’란 저작기능과 관련된 인자들이 조화롭게 기능하지 못해 음식을 잘 씹을 수 없는 상태이다. 70세 이상 노인의 1/2 이상에서 틀니 사용에 따른 ‘저작능력감소’ 즉 ‘저작(咀嚼)불편’을 호소한다. 이러한 ‘저작불편’은 음식을 잘 씹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입 밖으로 침이 자꾸 흐르거나 음식이 튀어나오는 등의 삶의 질에도 관여되어 있다. 또 ‘저작불편’은 식사에 대한 부담으로 제때 끼니를 하지 못해 영양부족과 근감소증 및 면역기능저하에 따른 상처회복 지연 등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으로 내몰기도 한다. 따라서 ‘저작능력감소’가 노쇠의 방아쇠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번 시론에서는 전신과 관련된 ‘저작능력감소’에 대해 아래의 세가지 측면에서 간략히 언급해 보고자 한다. # 생활 양식과 관련된 ‘저작능력감소’ ‘저작능력감소(저작불편)’는 그들의 신체활동, 정신건강 및 구강건강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아내와 아이들의 성화를 못 이겨 집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강아지, 애완견을 좋아합니다. 다만 사람 사는 제 집에, 사람 말고 다른 동물이 ‘함께’ 산다는 것이 영 꺼림직하게 느껴져 반대했을 뿐입니다. 평소 청결, 위생, 소독 개념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 저희 치과의사, 구강악안면외과의사로서는 선뜻 반길 수만은 없는 조건인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녀석은 집안 곳곳을 여기저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는데 깨끗한 곳, (다소) 더러운 곳을 구별하지 않고 제멋대로 다닙니다. 유감스럽게도 사실상 이 녀석이 우리집에 있는 이상 ‘청결’은 늘 의심스러운 상황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일과 삶을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태도는 한결같아야 할 것입니다. 의료인인 저로서는 적어도 녀석이 침대 위로 올라가는 것만은 ‘금지’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녀석은 ‘응가’를 하고 ‘쉬’를 싼 다음 사람처럼 스스로 적절하게 뒤처리를 할 수 없습니다. 교육을 통해 지정된 자리에서 일을 보긴 하지만, 녀석이 사전에 알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후에 비로소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즉 녀석은 일을 마친 직후 그 상태로 이미 쇼파에도 올라갔고 아내의
대한치과의사협회 자재·표준위원회에서는 국제표준화기구 치과기술위원회(ISO/TC 106)에서 심의가 끝나 최근 발행된 치과 표준을 소개하는 기획연재를 2014년 2월부터 매달 게재하고 있습니다. 환자 진료와 치과산업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3년 제59차 ISO/TC 106 총회가 9월 16일부터 20일까지 호주 시드니 International Convention Center(ICC)에서 개최되었다. ISO/TC 106 Dentistry는 1962년에 설립된 치과관련 재료, 기구, 장비 및 구강관리용품에 대한 국제표준을 만드는 기술위원회이다. 한국은 연세대학교의 김경남 교수님께서 2002년 비엔나에서 개최된 ISO/TC 106 총회에 참석하신 것을 계기로 매년 참석하게 되었다. 필자는 2004년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ISO/TC 106 총회부터 현재까지 매년 참석하고 있다. 초기에는 김경남 교수님의 주도하에 한국의 치과재료학 및 예방치과 교수님들이 자비로 참석하여 국제표준화 활동을 해오셨는데, 현재는 국내 일부 치과재료 및 기구, 장비 회사에서도 참여하고 있고, 더 다양한 분야의 교수님들과 대학원생들 및 연구원들이 참여하여 매년 참여 규모가
씨간장은 말 그대로 씨가 되는 간장입니다. 간장은 발효식품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맛이 변하게 되는데, 좋은 환경에서는 오래 묵힐수록 깊은 발효의 맛이 강해지고 염도는 상대적으로 낮아지게 됩니다. 겹장(혹은 덧장)이라고 하여, 씨간장에 그해 새로 만든 장을 더하여 그 양이 유지되도록 합니다. 사용되거나 수분이 날아간 만큼 햇간장을 조금씩 첨가하기도 하고, 혹시라도 자기 집 간장 맛이 떨어지면 옆집에서 빌려 섞음으로써 그 맛을 지키며 대물림하는 방법입니다. 수백 년 동안 겹장된 항아리에는 첫 간장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양으로 따지면 거의 남아 있지 않겠지만, 그 맛과 향은 이후 첨가되는 간장의 풍미를 더 깊게 해줌으로써 감칠맛으로 영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씨간장은 단순히 처음 만들어 오래 묵힌 간장이 아닙니다. 깊고 진하며 맛있는 감칠맛을 지니기 위해, 수십에서 수백 년을 조금씩 새로운 장과 섞이면서 이어온 것입니다. 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확대보기 가능합니다. “당신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말의 의미는, 처음 만든이들의 실체는 흩어지겠지만, “당신의 정신을 계속 이어가렵니다.”라는 맹세도 담긴 것입니다. 기존 것을 다 허물어버리고 ‘그야말
날씨가 사뭇 춥다. 그예 겨울이 오고야 만 것 같아 씁쓸하다. 필자는 1년여 전 치의신보에 ‘우리의 가을’이라는 글을 기고한 적 있다. 우리에게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니 우리 회원들의 안위와 생존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글이었다. ‘회원의 당면한 필요를 충족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근거없이 협회를 비방하고 업무력을 낭비’하지 말고 내분을 지양하며 협력을 도모하자고도 썼다. 일을 맡은 사람이 잘못을 했다면 응당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지면 될 일이나, 도를 넘어선 시시비비 제기를 응대하느라 업무시간과 인력이 저당 잡히면, 그 낭비된 자원만큼 고스란히 회원의 피해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는 협회 홍보이사로 일하고 있었다. 협회 사정이 여의치 않아 통상 두 명인 홍보이사 자리를 부족한 본인 혼자 맡게 되어서 심정적으로도 참 힘들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치의신보 글을 쓴 뒤에 협회 정기감사에서는 그간 했던 홍보업무에 대한 평가나 질책 또는 대안에 대한 제시는 전혀 없이, ‘왜 치의신보에 글을 썼느냐’고 삼십 분 가까이 혼나야 했다. 또 누군가의 이름을 언급한 적도 없건만, 필자의 이름을 공공연히 들먹이며 필자 글엔 있지도 않았던 ‘선동’이니 ‘날조’니 하는 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