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ay Essay제1808번째 시간의 가치 어느새 고개 들어보니 연말이 되어 버렸다. 무언가 부산하고 들뜨는 마음이 드는 건 나만의 기분은 아닐 것이다. 같은 계절 안에 있으면서도 12월은 보내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게 하고 1월과 2월은 시작과 출발선의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을 보면 지금의 계절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다. 한 해의 마지막으로 보내는 이 겨울이 따뜻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딘지 허전하고 쓸쓸함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의 12월은 여전히 정신없고 바쁜 일상의 연속이다. 올해는 마치 대학 입시를 치르듯 아이의 유치원 입학에 정신을 쏟고 난 뒤 보니 벌써 연말이 되어 있었다. 수능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린 고3 학생같이 난 이 일을 위해 앞만 보며 열심을 냈던 것 같다. 우습지만 치열하게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여기저기서 한 해를 보낸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그러면서 올해에 나에게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생각해보니 언제나처럼 아쉬움과 기대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소홀하게 한 것은 없는지, 주변 사람들과 나의 가족들에게 서운하게 하거나 혹은 즐거움을 준 것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여러모로 생각해보
책과 노닐다기자들의 BOOK리뷰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의 ‘변증법’ 1991년 여름. 우리 집 서재에 두서없이 꽂혀 있던 장서(藏書)들 중에 이 책이 유일하게 나의 선택을 받은 이유는 단지 작가가 독일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 근·현대 소설에 심취해 있던 나로서는 조금은 어이없게 ‘토마스 만’이라는 거장을 만난 셈이다. 거창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래서 내 삶의 궤적이 조금 달라졌다면, 그게 바로 인생이고 운명인 것이다. ‘마의 산’은 열일곱, 질풍노도의 시기에 지적 허영심과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탁월한 ‘텍스트’였고 무려 1200페이지의 대작을 단번에 독파하는 동력까지 줬다. 그 후로 수십 번을 다시 읽었지만 그 때 마다 이 책의 울림은 내안에서 점점 커져갔다. 하지만 1990년 대 초반 ‘마의 산’을 읽는다는 건, (하루키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비록 ‘반동’은 아니지만 결코 권장할 만한 독서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이브’한 일본식 청춘소설이나 운동권 후일담(혹은 소설), 그리고 한국 근·현대 교양서가 마치 전염병처럼 유행했던 당시, 내 주위에서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유
Spectrum 굳세어라 금순아 김 진 구연세오슬로치과의원 원장 최근 헐리우드에서 6·25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두 편, ‘아 흥남(Exodus for Freedom)’과 한미합작영화 ‘1950’이 제작되고 있는데, 두 영화 모두 ‘흥남철수작전’이라는 전쟁 중의 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50년 겨울, 압록강까지 진군한 국군은 북진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나, 인해전술로 대표되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이듬해 1월 4일에는 국군이 서울을 다시 내주고 남쪽으로 밀려가게 된다. 이때 동북부 산악지대인 장진호까지 진군했던 미 해병 1사단은 적진에 고립되어 혹한과 싸우면서 부대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퇴를 하게 되었고, 동북부로 진격했던 국군1군단과 미육군10군단은 퇴로가 차단되어 동해의 흥남항을 통한 해상 철수작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수송선단은 미군과 국군 병력과 전략물자, 장비를 수송하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뒤에서는 중국군이 포위섬멸을 시도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공산치하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약 10만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국군을 따라서 흥남항에 모여
냉정과 자제 요구될 때 앞으로 치협 임시대의원 총회가 (22일 현재)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99년도에 임시대의원 총회가 치러진 후 14년만에 임시대의원 총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특히 이번 임시대의원 총회에서는 난제 중의 난제로 불리는 치과의사전문의제도(이하 전문의제)에 대한 개선안이 다뤄져 뜨거운 토론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특히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단체들이 임시대의원 총회가 열리는 현장에서 집회를 열기로 해 첨예한 대립이 예상되고 있다. 치협 임시대의원 총회를 앞두고 시도지부에서는 전문의제에 대해 심도 깊게 논의하기 위해 지부가 주최하는 임시대의원 총회 또는 설명회 및 공청회, 확대 임원회의 등을 열거나 설문조사를 실시하면서 적극적으로 회원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또 치과계 일부에서는 전문의제 개선안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뜻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활발한 의견개진을 하고 있어 그야말로 뜨거운 논쟁 중에 찬반이 맞서는 형국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공청회나 설명회 등 공적인 자리에서 검증되지 않은 의혹과 주장을 담은 선동적인 언행으로 민심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주장들로 인해 전문의제의 대안과
Relay Essay제1807번째 마침내 꿈을 이루다(하)-2012년 전국 치대·치전원 학생학술경연대회 대상을 수상하며 <2100호에 이어 계속> 가을에 열리는 학술 대회에 괄목한 연구 성과를 가지고 나가고 싶은 마음에 개강한 후에도 평일 주말할 것 없이 내내 세포실험을 진행하였다. 우리가 밥을 못 먹을지언정, 세포 밥은 꾸준히 챙겨주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행스럽게도 학술대회 전에 세포 실험이 잘 마무리 되었고 우리는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바쁜 학교생활 때문에 학술대회 일정에 맞춰서 발표 자료를 만들기도 벅찼다. 우리는 컴퓨터에 능숙한 유청준 학우에게 팀에 합류하자고 제안했다. 청준이도 평소 학술대회에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우리의 제안을 수락해주었다. 피피티의 대가인 청준이는 우리가 원하는 컨셉에 맞추어 척척 피피티를 제작해주었다. 자, 이제 남은 것은 내가 그동안의 실험과정과 결과를 바탕으로 영문으로 프리젠테이션을 구상하는 일이었다. 유년 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덕분에 영어회화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학술대회의 컨셉에 맞추어 아카데믹한 표현을 구사
real 노무 김기선 나라노무법인 공인노무사(010-2881-7177) 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해당 근로자 재직기간에 비례해 지급하는정기·일률적 금액은 통상임금에 포함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상여금이라 함은 외국의 사례와는 다르게 임금을 보충하기 위한 생계비 보조적, 임금후불적 의미에서 지급되는 금품을 말한다. 이러한 상여금은 일반적으로 명절이나 휴가 등 특별한 경우에 지급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고 이에 따라 통상임금의 요소인 정기성과 일률성을 충족하지 못하여 통상임금에서 제외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논의였다. 하지만 최근 대법원에서 재직기간에 비례하여 지급하는 상여금 또한 근로자의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하였다. 먼저 통상임금이 무엇인지 어떤 경우에 적용되는지에 대해 대법원의 판결요지를 통해 설명 드린다. 통상임금은 근로자에게 소정근로 또는 총근로의 대상으로서 정기적·일률적으로 지급하기로 정해진 고정적 임금을 말하므로, 근로자의 실제 근무성적에 따라 지급 여부 및 지급액이 달라지는 항목의 임금은 고정적인 임금이라 할 수 없어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아니하나, 근로자에 대한 임금이 1개월을 초과하는 기간마다 지급되는 것이라도 그것이 정기적·일률적으로 지급되는 것
월요시론박용호 <본지 집필위원> 대통령 당선자 임플란트 보험공약과연 사실이고 합당한 것인가? 박근혜 당선인은 임플란트 시술을 2014년부터 65세 이상 어금니 부위부터 시작해 단계적으로 건강보험을 적용해 나간다고 한다. 인수위 관계자는 “임플란트 건보 지원 비율을 어떻게 할지 등의 구체적 계획은 연내에 수립 하겠다”고 했다. 박 당선인은 작년 10월 광주의 ‘빛고을 노인건강타운’을 방문한 자리에서 처음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대한노인회를 방문한 자리에서도 재차 언급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신의를 중시하는 박 당선인의 성격으로 보아 이것은 득표를 위한 괜한 공약(空約)만으로 보이지 않는 실제 상황이다. 지난 연말 내내 오가는 거리에서 임플란트 공약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그걸 대하는 치과의사들의 마음에는 스산한 바람이 일었다. 드디어 치의에겐 올 것이 온 것이고 포퓰리즘이 갈 데까지 갔다는 막막함 때문이었다. 일간지는 물론 재야의 ‘오마이뉴스’ 조차도 재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비현실적인 공약이라고 폄하했다. 로마의 ‘시저’가 마지막 순간에 음모자들의 칼끝을 펜대 하나로 막다가 “오~ 브루투스여,
전문의, 현실적 대안 필요한 때 반세기를 끌고 왔음에도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공전을 거듭하고 있는 치과의사전문의제도 로 새해 벽두부터 치과계가 매우 혼란스럽다. 전문의의 근본적인 역할론에서 접근한다면 소수정예로 가는 것이 매우 타당하고 반드시 그렇게 가야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를 위해 치과계에서는 그동안 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동원해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해 왔다. 그러나 지금 치과계가 처해있는 여러 현실적 여건에 비춰봤을 때 소수정예는 ‘이상’일 수밖에 없었다는 믿고 싶지 않는 결론에 도달해 있다. 반세기동안 전문의제도로 인해 치과계는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또다시 ‘개선안은 졸속처리다’, ‘정부를 못 믿겠다’, ‘여론 수렴과정이 부족했다’ 등 근거 없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난무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고 유감스럽다. 이번에 치협이 내놓은 개선안은 치과계 구성원의 반목을 최소화하고, 실패를 봉합하는데 급급한 땜질식 방안이 아닌 근본적인 해결을 이끌어야 한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 이미 무너진 소수정예 원칙을 지켜내기 위해 기득권을 포기해야만 했던 임의수련의들, 전문의가 아니면서 전공의를 교육하고 있는 전속지도전
Relay Essay제1806번째 마침내 꿈을 이루다(상)-2012년 전국 치대·치전원 학생학술경연대회 대상을 수상하며 “경희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면, 반드시 모교의 명예를 빛내는 자랑스러운 학생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10년 무더위가 막 시작된 초여름날, 경희대학교 청운관에서 면접을 보던 순간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멘트를 한 후 면접장을 나오며, 과연 내가 치의학 전문 대학원생이 될 수 있을까 라며 내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 치의학 전문대학원에 입학하게 된 후, 초반의 설레임과 당찬 포부로 부풀었던 나는, 나날이 힘들어져만 가는 학교생활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구강병리학과 각종 임상과목의 실습이 시작된 1학년 2학기 무렵, 같은 학년 동기인 박세웅 오빠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애나야, 내년에 미국 한번 가볼래?” 무슨 말인가 했더니, 바로 매년 열리는 학생 학술대회에서 대상을 받으면 미국 ADA 학회에 참가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박세웅 오빠는 우리학년에서 유일하게 DMD-Ph.D 복합과정을 밟는 학생으로, 연구 경력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였다고, 평소 가깝게 지내는 지인들이 새해 인사를 나누려 문자도 보내 주시고, 전화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수고스럽게도, 엽서와 편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정중한 편지를 받았을 때에는 감사한 만큼이나 편지로 답장을 드려야하는데, 부끄럽게도 몇 년 전부터 편지를 안 쓰다 보니, 메일이나 간편한 문자로 의무를 다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새해 인사를 나누려 보내 온 편지 중에 꼭 답장을 편지로 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가슴 뭉클한 사연이 있습니다. 『신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리고 늘 영육 간에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저는 올 한 해 마음의 목표를 나의 약점 돌아보기로 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몇 일 전 연말이라 부모님 댁에 아내와 인사드리러 간 적이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몇 달을 가지 않다 보니, 오랜 만에 찾아 뵌 부모님 댁에서 인사드린 후, 효도 한답시고, 이리 저리 둘러보면서, 혹시나 내 손길이 필요한 것이 없나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
Spectrum 환자로서의 나 & 의사로서의 나 김 민 수부산대치과병원 소아치과 전공의 벌써 27여년 전의 일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떤 아저씨가 뛰지 말라며 내 발을 걸었다. 나는 그 발에 넘어졌고 그 아저씨는 유유히 사라지고 나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서부터 치과와 나와의 인연은 시작된다. 치관 파절로 치과병원을 내원하였고, X-ray사진으로 정중치가 발견되어 발거하였다. 그 당시 impression을 채득하였는데, 당시 비위가 약하고 겁이 많았던 나는 징징거리며 울다 심지어 구토까지 하였었다. 중학교 때에는 외상 받은 치아가 더 많이 손상되어 결국 신경치료 후에 PFM으로 수복까지 하게 되었고 성인이 되어 그 치아는 결국 운명을 다해 임플란트까지 이르렀다. 이 외에도 우식 등으로 인한 근관치료와 수복치료를 다수 시행하여, 현재 내 파노라마 사진을 보면 수복되지 않은 치아를 찾아 보기가 힘들 정도다. 대학의 전공을 바꾸면서 내가 치과의사가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치과에서 오는 물질적, 심리적인 공포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늘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