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일번지 ‘강진’ 강진!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가 일컬었던 한국 최남단의 땅. 20여년의 세월 속에 내 삶의 희노애락이 한데 어우러져 섞여 있는 곳이다. 내겐 어머니의 품속 같은 제2의 고향이 되어 버린 셈이다. 말로 표현하기 부족할 정도로 세상은 급변하고 있지만 이 곳은 아직도 느린 거북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남도의 여유로움과 포근함이 남아 있어 좋다. 치료가 끝나면 홍시나 바지락 같은 해산물을 갖다 주는 친정 엄마와 같은 환자들을 대할 수 있어 마음이 훈훈해진다. 매일 진료실에서 반복적인 진료에 임하는 회원님들께 잠시 쉬어가도 후회하지 않을 이 곳 강진을 소개하고 싶다. 전국 어디를 다녀봐도 군단위에서 산과 강과 바다가 하나로 조화를 이룬 곳은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보은산 우두봉에 올라가 보자. 월출산과 유치계곡으로부터 흘러오는 탐진 강물 자락이 굽이굽이 한눈에 펼쳐진다. 뿐만 아니라 태풍이 와도 미동도 않을 것 같은 기다란 강진만과 저 멀리 완도의 섬 남해 바다까지 확 트인 전경은 속까지 후련해진다. 밟으면 깨져버릴 듯한 날카로운 암성 봉우리로
월요 시론 신순희 <본지 집필위원> ‘평화’는 비둘기가 아니다 2011년 새해에도 한반도는 여전히, 전통적 국제법상으로 전시상태이다.정전이 아닌 휴전상태로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조금씩 잊혀져갔던 이 사실은 지난해 11월 연평도 포격을 계기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각성되었다. 불타오르는 연평도의 민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해방 후 5년이 지난 어느 초여름에 이 땅의 민초들에게 닥쳤던 그 불행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했고 충격과 분노를 느꼈다. 1차 분노의 대상은 당연히 사건을 일으킨 북한의 정신 나간 군부와 지도자들이겠으나 2차적인 분노는 사태를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들고도 이후 아무런 대안을 갖지 못한 정부였다. 연평도 사태 이후 정부는 엄중한 경고와 강력한 대응을 천명했으나 실제 우리 국민들이 본 것은 북한과 그 어떤 외교라인도 갖고 있지 못해 중국과 미국에만 사태해결을 매달리는 무능한 외교력, 중국과 러시아에게 연평도 한미 군사훈련을 중지하라는 내정간섭용 발언까지 들어야하는 굴욕적인 외교상황뿐이었다. 적어도 한 나라를 책임진 정부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능력과 자존심 그 어느
|명|사|시|선|양영태 칼럼 <자유언론인협회장·전 치협 공보이사> 나를 일깨워준 책 한권 몇 달전 나에게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책(冊)과 그래서 아들 딸 들에게 읽히고 싶은 책(冊)을 한권 선정해달라는 월간조선의 유쾌한 청탁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대한 서평과 감상을 적어 보낸적이 있다. 그동안 월간조선에 글을 써왔던 필자들을 대상으로 95권의 책을 압축 해놓은 단행본이 선보인 내용에는 그야말로 실용적이고 읽기에 매우 편안하고 유익한 작품의 내용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있어 매우 행복한 독서의 시간을 또 한번 가질수가 있었다. 헤밍웨이 작품인 ‘노인과 바다’를 읽어 보라는 어렸을 적 중학교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밤새 책을 읽으며 안타까운 몽상에 사로잡힌 적이 새삼스럽게 기억이 났으니….‘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자연을 향한 끝없는 도전과 의지를 표출한 인간이 지닌 저력의 극한을 나타낸 위대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노벨상 수상 작품인‘노인과 바다’는 그야말로 실존철학이 작품 속에 녹아있는 도덕적 개인주의의 임계점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노인과 바다’는 쿠바의 한 노인어부가 자기가 타고 있던
신묘년 새해를 여는 기대 신묘년 새해가 밝았다. 또 한 해가 시작하면서 지나 온 시간에 대한 반성과 통찰을 통해 새로운 한 해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져본다. 매년 의료계 사정이 나아지기보다 열악해 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 최선을 다해 희망을 가지고 올 한 해 환경개선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치과계로서는 올 해 상반기에 중요한 이슈들이 기다리고 있다. 우선 4월에 있는 협회장 선거다. 매번 선거 때마다 과열 양상을 띠어 선거 후유증이 오래 지속되곤 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만큼은 상대에 대한 비방이나 마타도어가 없는 깨끗한 선거가 되길 기대해 본다. 그러나 치과계는 협회장 선거 이전에 먼저 해결해야 하는 난제가 기다리고 있다. 전문의제도 관련 법안 국회 통과다. 시시각각 변하는 국회 분위기 때문에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오는 2월 임시국회에서만큼은 이 법안이 통과돼야 한다. 의료전달체계만 바로 잡아도 사실 전문의에 대한 모든 고민이 해소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치과계가 지속성을 유지해야 하는 사업이 있다. 통합치과전문임상의(AGD)제도와 FDI 총회 준비가 그것이다. 현 집행부 들어와 완성한 AGD제도는
종|교|칼|럼|삶 노석순 데레사 수녀<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첫 마음 얼마 전, 산에 난 오솔길을 걷고 있을 때 예쁜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나왔노라며 한 할아버지가 제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왜 수도자로 살아가느냐고, 부모님들이 마음 아파하시겠다며 뭐가 그리 좋아 편리한 세상을 등지고 힘든 길을 택해 살아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제 발걸음마다에 바스락 소리를 내며 함께 걷고 있던 낙엽도 할아버지와 같은 질문을 하는 듯 들립니다. 바스락 바스락…. 한해의 끝이 다가오고 다른 한해를 맞이할 때면 왠지 모를 숙연함에 저 자신을 삶의 애착에서 내려놓게 합니다. 그리고는 이 길을 걷기 시작할 때의 첫 마음을 되돌아봅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선택한 수도자의 길, 13년 전 내 삶의 전부를 던지듯 고향을 떠나 수녀원으로 입회를 하던 그 날이 떠오릅니다. 작은 시골마을에 가톨릭 신자는 제가 처음인지라 수도원이 어떤 곳인지 몰랐던 마을 이장님은 방송으로 기도학교에 입학하러 아침에 떠나니 인사를 나눌 분은 마을회관으로 나오라는 방송에 저는 웃었습니다.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 등을 돌리고 계시던 아버지는 읍내까지 택시타고 가라며 오천
나의 역사문화 활동 (하) <1898호에 이어 계속> 1994년 맏딸의 미국 플로리다대학교 박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했다가 경상대학교 정경대학학장과 진주문화원장을 역임한 정치학박사인 맏형의 부고를 받고 급히 귀국했던 일이 있었다.지난날 진주는 소년운동의 발상지라는 역사적인 논제를 형님이 제시하였으나 당시 역사의식이 비천했던 나로서 큰 감흥이 없었다. 시대가 흘러서 진주의 문화지킴이로 탈바꿈한 나는 1995년 진주정신으로 진주문화를 부흥하는데 이바지 하자는 뜻을 세워 진주문화사랑모임을 결성, 망진산 봉수 복원, 진주걸인기생독립만세운동 재현, 진주팔경제정, 형평사운동의 주역 신현수송공비이전, 일본에 빼앗겼던 진주대첩의 김시민장군 공신교서 환수운동을 성공리에 마무리하는 등 쉴 사이도 없이 활동하고 있었다. 2007년 5월 문화동지이며 후배인 강동욱 박사가 소년운동의 발상지 표지석을 역사복원사업으로 나에게 권유하고 난 후 경남일보에 진주에 어린이운동 발상지 표지석을 세우자는 논지와 어린이 날 제정의 주역 ‘진주사람 강영호’ 선생에 관한기사를 연달아 발표했다. 이어 오마아뉴스 윤성효 기자의 ‘소년운동 선구자 강영호를 아십니까’라는 기사를
경인년을 보내며… 경인년 한해가 저문다. 해마다 이맘때면 아쉬움 반 시원함 반이다. 다사다난이란 용어는 이미 식상하다. 매년 다사다난하기 때문에 이젠 별 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올해 역시 의료계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조용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정부의 어설픈 정책에 대한 폐해가 고스란히 의료계로 돌아온 한 해였다. 올 한해 뜨겁게 달군 정책 중 하나는 리베이트 쌍벌제다. 이 제도만 해도 정부가 원칙만 정하고 세부적인 준비사항이 없어 부처마다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법부터 만들고 보니 시행착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치전원 문제도 그렇다. 수년전 시작한 전문대학원 체제 운영은 정부의 강력한 드라이브에도 불구하고 올해 대다수 치전원이 치대복귀를 선언했다. 대표적인 정부의 정책 실패다. 연말에 나온 세무검증제 역시 마찬가지다. 담당 세무사가 책임지고 검증하라는 취지의 이 제도는 나오자마자 세무사들은 물론 의료계 모두가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이자 핫이슈는 아마도 치과의사전문의제도 관련 법 개정일 것이다. 전문의제도를 체계적으로 추진하려는 치과계 의지를 정부 당국이 적극 막고 나서고 있어 내년 2월 국회에서도 다
나의 역사문화 활동 (상) 이상근국제음악제 “진주의 정서를 바탕으로 세계로 뻗어가는 음악을 만드신 이상근 선생님을 기리고 알리는 건 지역 후배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죠.”3일부터 7일까지 진주에서 열리는 ‘이상근국제음악제’를 마련한 (사)이상근기념사업회 리영달 이사장은 이상근 선생과 깊은 인연을 자랑한다. 다름 아닌 일제 강점기 말 길야(吉野)국민학교(현 중안초등학교) 재학시절 이상근 선생에게 음악을 배운 제자이다.<경남일보 2010. 11.3.> “치과의사가 무슨 음악축제 이사장이냐”고 하겠지만 원래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1961년 초 개업하기가 바쁘게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음악 감상을 위해 사천공군기지의 PX에서 미군을 통해 부속품을 비공식적으로 구입하여 진주에서는 드문 Audio/stereo 시설을 하여 매월 진주의 초·중·고등학교의 음악교사를 초청하여 클래식 음악기행시리즈로 감상회를 2년간 계속하였다.진주의 원로 음악가 최재호 선생의 해박한 해설과 음률에 맞춘 신나는 몸짓은 음악감상회의 인기를 드높여 참여를 희망하는 분이 너무 많아 비좁은 치과대합실로서는 더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시
신 재 의 <대한치과의사협회 협회사편찬위원장> 조선치과의사회에 한국인 치과의사의 참여 여부와 정체성 지난 9일 치협 협회사편찬위원회(위원장 신재의)와 대한치과의사학회(회장 배광식)가 합동회의를 열어 치협 창립기념일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관련기사 2010년 12월 23일자 26면 참조>. 특히 이날 합동회의에서는 지난 1921년 설립된 조선치과의사회에 한국인 치과의사가 참여했는지 여부와 함께 회의 정체성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같은 논의와 관련 신재의 치협 협회사편찬위원회 위원장과 변영남 대한치과의사학회 명예회장이 각자의 주장을 담은 기고문을 본지에 보내와 게재한다. 조선치과의사회(朝鮮齒科醫師會)에 한국인 치과의사 참석 여부는 조선치과의사회가 한국인 치과의사회가 될 수 있느냐라는 문제로 뜨거운 감자 중의 하나이다.어려운 일이다. 선학(先學)의 글에 반론을 제기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선학의 글이 사회적 파장이 크고 잘못된 방향으로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때는 반론을 제기하여 보다 개선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후학(後學)은 이 일을 아니 할 수 없다. 기창덕(奇昌德) 선생님은 좋은
협동조합 내 치과 개설 막아야 의료계 환경이 갈수록 악산이다. 가면 갈수록 험한 바위만 나오고 있다. 치과의 경우만 해도 최근 들어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가며 고용 치과의사를 앞세워 개설하는 형태의 불법네트워크가 기승을 펼치는가 하면 무조건 저가정책으로 주변 동료, 선후배 치과의사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는 등 이미 공동체 의식은 사라지고 오로지 경쟁만이 남은 상태다. 이런 극한 상황이 계속 터져 나오고 있는 이때에 미처 치과계가 살펴보지 못한 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있어 주의를 끌고 있다. 이른바 협동조합이라는 특수 비영리법인체에서 비영리를 내세워 치과의원을 개설하고 있는 문제다. 지난 10월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 시행규칙이 공포되면서 생협이 보건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범위가 기존보다 많이 확대됨에 따라 앞으로 생협이 우후죽순 치과의원을 개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미 전국에 생협을 비롯한 특수 법인체 내에 개설된 치과의원 수는 13개소. 이번에 발효된 관련법 시행규칙에 따라 앞으로 더 빠른 속도로 치과의원을 개설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최근 기독교소비자생협만해도 그렇다. 이 생협은 이제 올 4월에 설립된 단체다. 그런 생협에서 얼
변영남 <대한치과의사학회 명예회장> 한국인 치과의사의 조선치과의사회 참여 개연성과 그 역사적 의미 역사의 아픔은 있지만 조선치과의사회는 한반도에 최초로 생긴 치과의사회임이 확실하다. 일본 치과의사들이 주축이 되긴 했지만 한국인 치과의사도 참여했으리라는 기록과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이에 근거해 창립기념일을 그대로 두어도 무방하다는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첫째 ‘조선치과의사회에 한국인이 배제되었고 참여자는 한명도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창립 당시 조선치과의사회는 법정단체도 아니고 단순히 친목단체였으며 회원 가입도 임의대로였다. 그 전신이 경성치과의사회이고 경성치과의사회가 중심이 돼 전국 단위의 필요성이 있어 창립된 임의 단체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경성치과의사회에 한국인 치과의사 함석태(咸錫泰)도 이 회에 가입하여 동참한 것으로 되어있고 당시 일본인 치과의사는 대량 내도(來到)하고 한국인 치과의사는 불과 수명에 지나지 않지만 1925년 한성치과의사회가 창립 될 때까지는 한국인 치과의사들도 이 회에 입회하여 동참했다고 알고 있다”(기창덕 「증보한국치과의학사」 1995 366쪽)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