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허취득 10년 미만 세미나 보강해야치과시장·정책·여가정보 강화 원해본지 선호 이유 “명칭 인지도 높아서” <7면에 이어 계속> 50대 이하와 60대 이상으로 나눠서 분석한 결과, 치의신보의 가장 부족한 점으로 60대 이상에서는 다양한 심층취재 및 기획기사가 제일 많았고(31%), 50대 이하에서는 치협 정책에 대한 비판적 기사라는 응답(49%)이 제일 많았다 65% 월요판과 목요판 차이 못느껴 치의신보 목요일판의 특징에 대해 묻는 질문과 관련, 월요일판과의 차이점을 잘 모르겠다고 응답한 회원들이 65%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 많은 회원들이 월요일판과 목요일판에 대한 차별성이 없다고 인식했다. 그러나 학술관련 정보에 있어서 특징을 보인다고 응답한 회원은 18%, 치과계 사람들 기사에 특징이 있다고 응답한 회원이 12%, 업계 및 신제품에 특징이 있다고 응답한 회원은 5%인 것으로 집계됐다. 50대 이하와 60대 이상으로 나눠서 분석한 결과, 목요일판과 월요일판과 차이점을 잘 모르겠다는 응답은 50대 이하(68%)가 60대 이상(39%)보다 훨씬 많았다.  
2000에 얽힌 ‘인연들’이 말하는 치의신보 황광세 (황치과의원 원장) 면허번호 2000번 “인연이 깊다” 정책 ‘방향키’ 역할 기대 1972년 서울치대를 졸업하고 1978년 조선치대 치주과 교수로 재직할 때부터 치의신보와 인연을 맺어 오랫동안 꾸준히 보고 있다. 그 당시는 한달에 한번 발간됐고 면수도 얼마되지 않았다. 인쇄 질도 좋지 않았다. 지금은 치의신보가 주2회로 발간돼 볼륨도 커지고 내용이 전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다른 신문은 다 보지 않더라도 치의신보만큼은 천천히 처음부터 끝까지 관심있는 부분은 거의 다 읽어 보고 있다. 학술부분 뿐만 아니라 광고에 나오는 새로운 재료 등도 신경써서 보고 있다.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대학에 10년이상 근무했었고 청아치과병원에서 10년을 근무하다 개원했기 때문에 개원가 쪽보다 학계나 세미나에 관심이 훨씬 많았다. 치협의 정책적인 방향제시와 함께 치과의사들이 관심이 많은 문제, 전문의 문제, 학제 개편 등 타 전문지에서 다루지 못하는 부분을 더 심층적으로 잘 다루고 있다. 2000호 발간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앞으로도 여타 치과계 전문지와 차별화해 정책적인 부분과 학제개편 등에도 신경을 써주기 바란다. 앞으로 치
모집단을 통해 본 치의신보 독자는 평균 46세개원의 93%50대 이하 89%면허취득 10년 이상 86% 이번 설문조사는 치의신보의 인식도 조사를 위해 치의신보를 구독하고 있는 치과의사 1만7972명을 대상으로 500명의 표본을 추출했다. 500명의 표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170명이 설문조사에 응해 34%의 응답률을 보였다. 최종표본 170명에 대해 성별분포와 평균나이를 비교해 본 결과, 성별분포는 95% 신뢰구간에 포함됐으며, 평균나이도 95% 신뢰구간에 포함돼 최종표본은 모집단을 대표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치의신보 독자에 대해 분석한 결과, 평균 나이는 46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의 평균 나이는 47세, 여성의 평균 나이는 43세인 것으로 분석됐으며, 연령대별로는 40대가 39%로 가장 많았으며, 30대가 26%, 50대가 21%로 그 뒤를 이었다. 60세를 기준으로 분석해보면 60대 이상이 11%, 50대 이하가 89%로 나타났다. 개원 형태별로 분석한 결과, 개원의가 93%로 가장 많았다. 면허취득 연도를 기준으로 분석한 결과, 면허취득 후 10년 이상된 독자가 86%, 면허취득 후 10년 미만인 독자가 14%인 것으로
2000에 얽힌 ‘인연들’이 말하는 치의신보 홍관석 (미소담치과의원 원장) 2000년 개원 “열심히 본다”개원가 시각 객관화 바람 “개원 후 치의신보는 빼놓지 않고 가장 열심히 보는 신문입니다.” 홍관석 원장(미소담치과)은 지난 2000년 4월, 당시 한창 붐이 일던 공동개원으로 첫 개원을 시작한 후 5년 뒤 단독개원으로 전환한 케이스다. 개원 후 치과계 돌아가는 상황이나 기타 정보를 얻기위해 가장 정보가 풍부하다고 판단되는 치의신보를 열독해 왔다는 그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보는 면은 ‘국제 뉴스’면이다. 홍 원장은 “국제 뉴스면의 경우 스크랩을 해 둘 정도로 상당히 즐겨 보는 편인데 환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줄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치의신보에 다소 아쉬운 점도 있다. 치의신보가 기관지이다 보니 집행부에 친화적인 기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잘 알지만 개원가의 시각을 보다 열린 시각으로 객관화해 담아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는 한편 “지난해 뜨거운 감자였던 유디치과 등 피라미드치과 문제와 관련해서 치과계 오랜 관행들의 종합선물세트로 만든 괴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자칫 치
인터뷰본지 인식도 설문조사 주관 최용근원장(고려대 임치원 통계학 겸임교수) " 설문조사 신뢰도 95% 객관성·대표성 확보" “이번 통계는 첨단 통계 프로그램을 활용해 객관성과 대표성을 확보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종표본도 모집단에 대한 대표성을 갖고 있고, 설문조사에 대한 결과는 신뢰도가 95%로 믿을 수 있는 결과입니다.” 본지는 이번 설문조사에 대해 보다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 ‘통계 전문가’인 최용근 원장(EB치과의원)에게 설문조사 및 결과분석을 의뢰했다. 최 원장은 현재 고려대 임상치의학전문대학원에서 생물통계학 강의를 하고 있으며, 데이터 솔루션(www.datasolution. me)이라는 통계분석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통계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최 원장은 “이번 설문조사는 통계 프로그램을 접목해 설문조사의 모집단(1만7972명)을 바탕으로 무작위 표본추출 방식으로 표본 500명을 설정했다. 답변을 해온 최종 표본 170명에 대한 성별분포와 평균나이를 비교해본 결과 신뢰도가 95%로서 최종표본은 모집단을 대표할 수 있으므로 최종표본이 모집단에 대한 대표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표본 응답률이 34%로 나왔는데 이는 높게 나온 것이다. 표본
2000에 얽힌 ‘인연들’이 말하는 치의신보 오석민 (평창다인치과의원 원장) 2000년 치대입학 “믿음이 간다”치과계 흐름파악 큰 도움 지난 2000년에 치과대학에 입학해 2000학번인 오석민 원장(평창다인치과의원)이 지령 2000호를 맞은 치의신보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했다. 서울 종로구에서 개원해 현재까지 4년 정도 치과를 운영해오고 있는 오 원장은 개원한 지역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마친 지역 토박이다. 그래서 환자들 중에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꽤 된다고. 오 원장은 “하다 보니 뒤늦게 치과대학을 들어가고 치과 개원도 어릴 때부터 살던 동네에서 하게 됐다”며 “말 그대로 동네 주치의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75년생인 오 원장은 대학 동기들에 비해 대여섯 살이 많은 늦깎이 치과의사다. 원래 오 원장은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한 공학도였다. 그러다 대학재학 중간에 군에 입대하고 제대하면서 진로를 바꿔 다시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끝으로 오 원장은 치의신보 지령 2000호 발간에 대해서도 축하와 함께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오 원장은 “최근에 치과계 전문지가 많이 늘어 일일이 보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제일 믿음이 가는
치의신보 시대별 ‘얼굴’“1면 이렇게 진화했어요” 이 지면의 주인공은 치의신보가 만들어냈던 1면 그 자체다. 본지가 선보였던 2000번의 1면은 지난 45년 1개월여 동안 회원독자들과 동고동락해 왔다. 지령 2000호 특집호를 맞아 치의신보가 써 왔던 1면의 ‘미학’을 연대별로 살펴봤다.<편집자 주> 치의신보 지령 제1호의 1면은 새 출발의 설렘과 다짐을 동시에 담고 있다. 1966년 12월 15일에 창간된 ‘칫과월보’는 제1호 1면 ‘알림’란을 통해 ‘대한치과의사협회의 기관지로서 치과의학의 향상발전과 전국회원의 친목을 도모함에 그 목적이 있다’고 정체성을 규정했다. 1호의 1면 톱기사는 당시 최대의 관심사였던 ‘치무과 부활, 추진위원회 구성’ 기사였으며, 이어 ▲이유경 당시 협회장의 창간사 ▲치과전문의제도 적극 추진 ▲경희대 치의학과 신설 및 학생모집 등의 뉴스가 함께 실려 있다<사진 1>. #보건의료계 기관지 중 최초 ‘가로쓰기’ 1967년 1월 15일자로 발행된 제2호에서는 1면 제호를 ‘齒科月報’로 변경했다. 이어 1967년 4월 치과계 최초의 대규모 국제행사였던 제5회 아
글 싣는 순서 (상) 논란의 ‘전주곡’, 한·미 FTA와 의료서비스 (중) 영리병원 ‘우회상장’인가, 한· FTA 그리고 치과계 (하) 한·미 FTA ‘개막’, 치과계 전망과 시사점 ■ 신년기획괴담과 진실사이, FTA 그리고 치과계 중 바야흐로 국가의 운명이 바뀌는 시대가 눈앞에 왔다. 한국과 미국이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은 그 공과를 떠나 자국 경제와 국민 생활 전반에 혁신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본지는 의료계 및 치과계와 직결되는 FTA 관련 논란의 실체를 분석하고 예측 가능한 미래 전망을 풀어보는 신년 특집 기획 시리즈를 지난 1998호부터 총 3회에 걸쳐 게재하고 있다.<편집자 주> 한·미 FTA를 바라보는 치과계의 시선에는 앞서 일부 피라미드형 치과 사태를 통해 학습된 우려와 공포가 깔려있다. FTA의 경우 재화뿐 아니라 서비스무역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시장개방이 이뤄지는데, 여기에서 보건의료서비스 시장이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중심에 ‘미국식’ 의료영리화의 문제가 대두될 것이라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 중 최근 치협이 사활을 걸고 있는 영리병원 문제
1989년 4월 26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제14차 APDC를 맞아서는 특집 영문판 신문인 ‘14th APDC SEOUL’을 발간했다. 특히 1997년 7월 19일자(제915호)부터는 제호를 한글 ‘치의신보’로 변경하는 한편 보건의료계 기관지 중 최초로 전면 가로쓰기를 단행, ‘1면의 대변혁’을 주도했다<사진 3>. #주2회 발간, 목요일판 특화 ‘주목’ 1997년 9월 5일부터 9일까지 열린 제85차 세계치과의사연맹(FDI) 서울총회 당시 치의신보는 영문 뉴스레터인 ‘Dental Olympics’를 2회에 걸쳐 발간, 대회 운영과 관련된 속보를 전달했다<사진 4>. 반환점이었던 지령 1000호에도 특집호가 실렸다. 1999년 5월 29일자로 발행된 1000호 특집호 1면은 ‘정론직필’의 정신을 상징하는 ‘백두대간’의 사진과 이기택 당시 협회장의 기념사가 장식했다. 특히 2003년 7월 7일자부터는 치과계 언론 최초로 주2회 발간을 시작, 1면 기획기사 강화 등을 통해 명실상부한 의료계 정책·속보지로서의 발전 전기를 마련했다<사진 5>. 2005년 10월 24일자(제1400호)부터는 표지 1면을 업체 광고면에서
“치과계 불안 해소 역량 집중” 일부 피라미드형 치과 선례그대로 확대 재생산 지적도의료계 부익부빈익빈 현상 가속화일반 개원의·환자 피해 불 보듯 # 치협, ‘영리병원’ 개방 감시 강화 이에 치협은 정부가 한·미 FTA 협상 및 비준과정에서 국내보건의료서비스 및 국민건강권 보호를 위한 충분한 보호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입장을 취하며 정부 측에 대비책 마련을 지속적으로 촉구한다는 입장이다. 대외적으로는 국내 경제자유구역 내에서의 영리병원 설립 움직임을 주시하고, 내부적으로는 영리병원 허용에 반대하는 치과계 구성원 및 타 의료단체와의 의견통합과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특히 한·미 FTA 비준안 강행처리에 따른 여야 대립으로 처리가 늦어지고 있던 ‘의료인 1인1개소 개설 강화 의료법 개정안’이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를 일사천리로 통과함에 따라 치협은 이번 호기를 놓치지 않고 영리병원 허용 저지에 더욱 총력을 기울인다는 각오다. 김철신 치협 정책이사는 “이번 의료법 개정안 통과에 따라 일단 거대자본의 ‘문어발식’ 의료기관 확장을 막을 수 있는 법적인 ‘방패’는 마련됐지만 한·미 FTA와
역대 치의신보 편집인 한마디“그땐 그랬지” 본지는 지령 2000호를 맞아 제6대 선우양국 편집인부터 제 27대 안민호 편집인까지 최근 근황과 재임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그리고 치의신보 발전을 위한 고언 한마디를 들었다. 선우양국(6대)1962.10.11~1963.10.11요양 중 김황중(7대) 1963.10.4~1964.10.5별세 이한수(8대)1964.10.5~1966.10.21대한치과의사학회 종신회원으로 활동해 왔다.서울 당산동에 살고 있다. 최진환(9대)1966.10.21~1968.10.18해외 체류 강준설(10대) 1968.10.18~1970.10.222년전까지 개원했다. 최근 심장수술을 했다. 김의배(11대)1970.10.22~1972.4.21당시 회장이 서영규 회장이었고 월 1회 발행이었다. 한번 발행도 상당히 어려웠다. 당시 광고라는 것도 없었다. 당시 회원이 3천여명이었고 기자도 1명 있었다. 서영규 회장이 노력해 일본회사의 광고를 유치했다. 신문을 제작하는 사람들이 몇 명 안돼 빈약했지만 지금 발전된 모습을 보니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