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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허번호 38 나와 치의병과<6>C.D.C.와 C.D.L. 창설 및 제5육군병원

한국치의학발전(韓國齒醫學發展)과 육군치무병과(陸軍齒務兵科)

1927 경기도 용인 출생
1949 서울치대 3회 졸업
1969 예비역 치의 대령
        대한치과의사협회 감사
1974 대한치과의사협회 총무
1980 대한치과의사협회 부회장
1967 대한구강보건협회 부회장 감사 고문
1967 대한치과기재학회 3-5대 회장 고문
1978 인공치아이식임플란트학회 초대 2대회장
1979 국제치의학사회 I.C.D. 평생회원
1982 서울대학교치과대학동창회 부회장
1982 전주류씨 전양부원군 종중 회장

                                                                                    현) 종로구치과의사회 지도위원장
                                                                                         유 양 석 치과의원장 

                                                                                    상훈 : 보국훈장 협회대상 서울치대동문상 수상

 

 

C.D.C.란 중앙치과진료소를 말하고 C.D.L.은 중앙치과기공소를 말한다. 미군에는 지원 병력에 비례하여 DC#1은 25명, DC#2는 15명, DC#3은 8명의 치과 군의관으로 구성된 치과병원 규모의 단위부대가 주로 신병훈련소나 보충대에 배치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C.D.L.은 Ticonium 부분 의치를 비롯하여 모든 보철을 지원하는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도 하루속히 이 부대를 창설코자 참모연구(參謀硏究)를 하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였다.

 


참모연구에는 여러 가지 연구 실적이 있어야 하고 이해할만한 타당성이 인정되어야 하며 연구 실적이 있어도, 관계 참모부의 협조를 얻어내야 하므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 군(軍) 자체의 승인이 결정되어도 미국 군사고문단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함으로 산 넘어 산으로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해냈다.


부분 의치보철을 위한 합금개발을 위해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든 연구비(그 당시 약 40만 원으로 기억)를 타내어 김영해(金英海) 중령(서울치대 2회 교수)이 연구토록 하였으며, 그 연구결과를 발표토록 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으며, 마침 나의 미국 군의학교 동기생이 KMAG 군사고문관으로 오게 된 행운으로, 다행히 그와의 친분으로 협조를 얻어 승인을 받아 부대창설이 가능하였다.

 


그래서 우리도 논산 훈련소와 대구 의무사령부에 바라고 바라던 독립부대로 C.D.C.와 C.D.L.이 생기고 부대장(部隊長)이 생겼다. 규모의 차이는 있어도 치의병과도 군의병과와 대등한 부대가 되었다는 것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1958년 3년 동안의 사령부 근무를 마치고 본연의 진료업무에 종사할 기회를 얻어 부산 제5 육군병원에 전속되었다. 남의 일에 간섭은 물론 관여할 필요도 없고 내 일에만 충실하면 되기에, 열심히 일하며 교육하고 연구하는 치과부(齒科部)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인턴 레지던트 교육을 해야 하며 다른 부처와의 협조는 물론 지역치과의사회와의 협력과 학술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군인 신분으로 부산시치과의사회 김상찬(金相讚) 회장(자제가 김학대 선생)을 도와 부회장으로 일하였다.


개원의들은 진료에 여념이 없으므로 학술적인 요구를 채워줄 사람은 오로지 우리 치과 군의관들이고 교육의 일부라고 생각하여, 치과의사회에 회관이 없으니 광복동 입구에 신신 예식장을 저녁 시간에 빌려 매월 학술집담회를 개최하여 개원의들에게 학술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부산시치과의사회 유사 이래 초유의 일이었으며 그 결과 좋은 반응을 받았다.


하루는 군수기지사령관(軍需基地司令官)이 치과 치료를 받으러 온다는 통고가 와 긴장한 상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막상 병원에 도착한 사령관은 어디서 보던 분인데 확실치 않았으나, 치료 의자에 앉은 사령관은 틀림없이 4년 전 미국 갈 때 한 비행기에 모시고 가던 분이다. 그래서 인사드리니 반가워하며 진료를 받은 분이 박정희 사령관 준장(准將)이었다. 인연이 따로 있는가 보다.
   
#연구사업
1962년 악안면구강외과에서 얻은 지식으로 치아의 이식 내지는 재식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한편 인공치아 이식에 관한 연구에 착안하여 우선 Plastic Resin으로 시도하였다. 아무도 이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 상의할 사람도 없었다.

 


전상환자(戰傷患者) 중에는 포탄의 파편이 몸 안에 10여 년 박혀있어도 큰 지장 없이 지내고 있는 것을 보았고, Resin으로 된 의치(義齒)가 20여 년을 구강 내에 장착하고 있음에도 별 조직반응이 없으며, 악골손상(顎骨損傷) 환자에게 인공악골(人工顎骨)을 이식한 예로 보아 임플란트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시도하였다. 그 결과 고정이 문제였지만 조직반응은 의외로 큰 거부반응이 없었다. 그 결과가 1962년 4월 부산일보에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한국최초의 일이다.


병원장 정 모 중령이 5·16 주체세력으로 서울 요소에 차출되어가는 바람에, 내·외과 부장을 제쳐놓고 나더러 병원장 대리를 하라고 하여 한동안 대리근무를 하였다. 부산에 정착하려 하였으나 1963년 7월 수도육군병원으로 전속발령을 받아 서울로 불려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