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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쫄딱 맞고 먹은 전기쿠커 라면, 나의 인생음식

수필

어린이날 오전, 구립양로원에서 봉사활동을 마친 두 아이를 태우고 동태탕을 파는 식당에 들렀다. 이곳은 국물이 시원하고 얼큰해서 아이들도 흔쾌히 따라나섰던 곳이다. 사장님이 바뀐 게 마음에 걸렸지만······.


휴일 이른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식당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쭈그러진 노란 양은 냄비 안에 동태탕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앞 접시에 동태탕을 덜어 맛을 보니 국물의 간이 맞질 않았다. 육수는 밍밍하고 텁텁했다. 그냥 맹물에 동태를 끓인 느낌이었다.


식당 주인에게 소금을 달라, 다진 양념을 가져달라 온 가족이 부산을 떨었지만 십 리까지 달아난 입맛은 밥 한 그릇을 다 비우는 동안 결국 돌아오질 않았다. 카드를 내밀고 계산을 하면서 ‘내가 끓여도 이보단 맛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진짜로 동태탕을 끓여볼 생각이었다. 마트 생선판매대에 가보니 손질하지 않은 러시아산 절단 동태가 있었다. 막상 집에 사 오긴 했는데 손질하기 막막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결국 동태는 식탁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냉동실에서 그야말로 ‘동태’로 남았다. 아마도 다른 냉동식품에 둘러싸여 당분간 빛을 보기는 어려울 듯싶다. 녀석이 내게 텔레파시라도 보내는지 불현듯 한 번씩 떠올랐다. ‘나를 좀 동태탕으로 끓여 잡숴주세요~’


지난 주말, 마트에 들러 장을 보다가 손질된 대구탕 팩이 눈에 들어왔다. 손질된 대구와 함께 대파 1개, 육수용 무, 홍고추 2개와 팽이버섯, 애호박이 들어 있었다.


‘대구탕도 참 시원한데. 이걸로 한 번 끓여볼까?’
물건을 담아 계산대로 갔다. 내 차례가 왔을 때 계산원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대구탕 어떻게 끓이면 맛있어요?”
“대구를 수돗물에 씻은 후에 쌀뜨물에 좀 담가두세요. 생선 잡냄새를 잡는 데 좋아요.”


집에 돌아와 큰 냄비를 꺼내서 다시마와 다포리, 대파를 큼직하게 썰어넣고 육수를 만들었다. 대구탕을 끓인다는 말에 아내는 집에 있는 덜 싱싱한 무를 육수용으로 잘라서 넣으라고 말해줬다. 양념장이 채소팩에 들어있긴 하지만 소금과 고춧가루를 추가하면 더 칼칼하니 맛있다면서 직접 넣어주었다.


육수가 끓기 시작했을 때 대구를 꺼내 흐르는 물에 연한 상추를 씻는 것처럼 세심한 손길로 씻어냈다. 마침 밥을 지을 때가 돼서 쌀을 씻은 뒤 쌀뜨물에 대구를 담가놨다. 무와 팽이버섯, 홍고추, 애호박, 양념장을 넣고 끓이다가 쌀뜨물에 담가놨던 대구를 넣고 함께 끓였다.


아내는 독서실에 간 딸아이가 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살짝만 익혀놓으라고 한다. 너무 끓이면 생선 살이 흐물거려서 맛이 덜하다고 말했다. 딸아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빠가 너 배고플까 봐 대구탕 맛있게 끓여놨는데, 몇 시에 데리러 갈까?”
마음이야 지금 당장 집으로 와서 시원한 대구탕 국물에 밥 한술 뜨라고 말하고 싶지만, 공부에 방해될까 싶어 꾹 참는다. 보통은 자정쯤 독서실에서 퇴실하기 때문이다.


“오호, 11시쯤 나갈 게 아빠.”
딸아이가 바로 답 문자를 보내왔다. 딸아이에게 시원하고 얼큰한 대구탕을 맛보게 해주고 싶은 아빠 마음을 알아챈 걸까. 김장김치를 어슷하게 썰어 접시에 담고 김이 오르는 대구탕을 국그릇에 담아 갓 지은 밥과 함께 소박한 식탁을 차렸다.


딸은 집에 오자마자 대구탕 국물을 한 숟갈 입으로 가져갔다.
“와, 엄청 맛있는데? 여태 아빠가 해준 음식 중에서 제일 맛있어.”


딸이 국물까지 게 눈 감추듯 먹는 걸 보니 마음이 흐뭇하다. 이런 맛에 요리를 하나 싶다. 맛있게 먹어줘서 고맙다.


아이들을 위해 요리할 때마다 군산에 계시는 어머니가 생각난다. 파스타를 요리할 때 그랬고, 수육을 삶을 때도 그랬다. 맛있는 음식은 늘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만든다.


몸도 마음도 모두 방전돼버리면 차를 몰고 무작정 어머니가 계신 군산으로 내려갔다. 대문으로 차를 몰고 들어서면 어머니는 연락이라도 주고오지 그랬냐며 반가운 기색으로 밥은 먹었느냐고 물으신다. 부엌으로 가셔서 아들이 좋아하는 콩나물국을 끓이시고 냉동실에서 박대를 꺼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노릇하게 튀기고 시금치나물을 짭조름하게 무쳐서 소반에 차려 주셨다.


“미리 연락 주고 왔으면 더 맛있는 것을 해놨을 텐데……”


왜 갑자기 연락도 없이 내려왔는지, 무슨 속상한 일이 있는지 짐작하시는데도 어머니는 늘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저녁을 드셨을 텐데도, 너 먹는 거 보니 식욕이 돈다며 소반에 앉아서 식사를 거들어 주셨다. 사랑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 있다면, 분명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음식은 식당에서 사 먹는 음식보다 더 무겁지 않을까.


내가 초등학생일 때 일이다. 갑자기 하굣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지금이야 뛰어가면 한달음에 닿았을 거리를, 학교에서 집에까지 걸어오는 길이 얼마나 길었던지, 정말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온몸이 흠뻑 젖어서 집에 들어왔다. 입술이 파래져서 치아끼리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온몸이 떨리고 처마 끝에서 빗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바짓가랑이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머니는 젖은 옷을 마른 옷으로 갈아입히시고는 전기쿠커에 라면을 끓여 주셨다. 입안에 들어오는 라면 면발과 뜨끈한 국물 그리고 이후에 찾아온 안도감과 포만감에 이불 속에서 스르르 잠들었던 기억, 그래서 그날 어머니가 전기쿠커에 끓여주신 라면은 나의 인생 음식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그때 먹었던 라면 맛을, 그 안도감과 포만감을 우리 아이들에게 입속에 넣어 주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임용철 원장

 

선치과의원
<한맥문학> 단편소설 ‘약속’으로 신인상 등단
대한치과의사문인회 총무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2013 치의신보 올해의 수필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