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빛 없는 동네 뒷산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왠지 모르게 무서움과 나약함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돌아가고 싶은 충동. 어두워지면 나타나는 두려움. 어둠속에 홀로 있는 것은 언제나 두렵다. 그러나 이 시간, 가끔, 아주 가끔 찾아와 주는 안장 위 나와의 ‘대화의 시간. 어두운 산속 한가운데에 있으니 2011년 처음으로 참가했던 아산 280랠리가 떠오르며 카메라가 나를 비춘 장면이 그려진다. 한 중년 남자가 비를 맞고 서 있다. 그 남자는 하루 종일 내리는 장마비에 온몸은 다 젖어있고 추위에 손을 바르르 떨며 부르튼 빵을 먹고 있다. 그는 이 랠리가 끝나면 라면을 아니 곱빼기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팍팍한 개원 생활에서 탈출하고자 아무 의미없이 참가한 랠리.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고 긴 산속 임도를 넘으며 저 산 너머에 뭐가 있을까 저 앞에 보이는 저 산을 넘으면, 그 다음 산엔 뭐가 나타날까? 아직 가야할 거리의 반도 못 갔는데...
뭔가 새로운 것을 그리며 산을 넘는데 이 산을 넘고 나서 보이는 건 역시나 이전에 지나쳐왔던 산들과 단지 모양만 조금 다른 저 산만이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비슷비슷한 어제 오늘 내일이 아무 의미없이 그냥 줄지어 서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꿈꾸며 살아가지만 내게 다가오는 내일은
결국엔 오늘과 비슷하지만 단지 조금 다른 모습의 그저 그런 내일일 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비슷비슷한 일상들.
이런 생각을 하며 힘들게 랠리를 이어가는데 해가 지고 불빛에 비친 사람들이 보이면서 280(이팔공)은 내게 새롭게 다가왔다. 임도위로 보이는 하나 하나의 불빛들! 사람들!!! 산중 어딘가에 박혀서 낮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해가 지고 자전거 전조등 라이트가 켜지니 불빛에 반짝이면서 보이기 시작했다. 문득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저 불빛들이 임도길 위에 반짝이는 이유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 누가 알아주면 뭐하고 안 알아주면 뭐 할건가 그냥 반짝인다는 이유로 그냥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건데 말이야~ 어쨌든 사람들은 다들 저마다의 이유와 열정을 가지고 산속 임도를 달리고 걷고 뛰고 있는데 말이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 랠리 여정 중에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단절된 나와도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280은 그렇게 외롭고 의기소침하고 혼자의 일에만 골몰하던 내 자신에게 스스로 이야기 할 수 있게 해주었고, 같이 동행하는 사람들과 잔차 이야기와 더불어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시간과 함께
10시가 넘은 퇴근길.
밤의 태재고개는 여전히 자동차 불빛으로 가득하다. 헬멧 밑으로 스쳐가는 불빛들은 여러가지 회상이 되어 나에게 다가온다.
시간과 함께 - 많은 것이 변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江이 변한 것처럼 영영 젊을 것 같던 나도 주름 깊은 중년으로 변해있다. 젊은 날의 나는 50세가 된 나를 상상할 수 없었다. 20년 전 나는 50이 된 나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런 나이의 내가 있게 되리라고는 감히 생각조차하지 못했는데 나는 이제 50의 중년이 되어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20년을 생각하고 있다.
시간과 함께 다시 한번 카메라가 나를 비춘 장면이 그려진다. 30대의 친숙한 젊은이가 이제 태재고개에서 막 다운하려는 내 앞에 서서 말한다. ‘나는 당신이 달렸던 모든 곳 모든 순간, 당신 숨결이 거칠었던 그 어느 곳에서도 같이 있었죠. 이제 얼굴엔 그 즐거웁던 표정은 없고 고집과 깊은 주름만이 가득하군요. 주름을 펴고 웃어 보세요. 처음 산을 올랐던 그 첫 마음으로~’ 젊은이는 말을 끝내고 원한다면 내일도 또 볼 수 있다는 듯 미소를 띄운다.
연습하다보면 그렇게 힘을 들여도 안 되던 것들이 시간과 함께 자연스럽게 극복되었던 기억이 있다.
산을 타다보면 낙차 큰 바위가 극복이 안 되어 자전거에서 꼭 내려야만 했는데 어느 순간이 되자 그 바위를 아무 생각없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맞다. 모든 것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자기도 모르게 극복되는 것이다.
매일 매일을 살아내다 보면 그냥 극복되어져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시작.
시간 앞에서, 사람은 무기력해지고, 언젠가 죽어 사멸한다. 육체는 시간과 더불어 쇠잔해간다. 빠르건 늦건, 인간은 소멸한다. 육체가 시들면 정신도 갈 곳을 잃고 말 것이기에 정신과 육체를 꼭 붙잡고 있어야 한다. 패배하고 시드는 그 지점을 조금이라도 뒤로 미룰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것이 지금 새 출발점에 선 한 인간의 목표이자, 라이더로서의 목표이다.
이제 새로운 시작 앞에서 웃자. 그래 웃어 보자. 즐거운 하루 하루를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