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잘 보지는 않지만 최근 세계적으로 K-드라마가 인기라고 한다. 요즘에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특징 중의 하나가 여러 등장인물의 관계설정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어서, 소위 “막장”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런 “막장” 상황이 최근 우리나라 의료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람은 어딘가 아플 때가 가장 약할 때이다. 바로 그때 아픈 자신의 몸을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것은 그 사람을 무한히 신뢰한다는 의미이며, 그 신뢰에 답을 주어야 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많은 직업 중 의료인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스런 특권이다. 원내생 시절 전공의 선생의 지시로 처음 환자를 예진 했을 때, 나를 향한 환자들의 절박한 눈빛과 안타까운 호소를 들으며, 비로소 내가 어떠한 일을 하여야 하는지를 느꼈고 이때의 긴장감과 사명감은 어렴풋하지만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다. 이후 면허를 따고 나의 작은 의술로 환자의 환부가 낫고 감사해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무언가 좋은 일을 하고 있고, 사회에 의미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뻤고, 이러한 보람을 동력 삼아 의업에 종사하며 근 30년의 시간이 지났다. 세상이 아무리 의사가 이기적이고 돈만 밝히는 사람들이라 욕을 하여도 대다수의 의료인은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사명감으로 의업에 임하고 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 의료 환경은 참 많이 변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 짧은 시간동안 환자들의 의사에 대한 신뢰는 거의 바닥이 된 것 같고, 의사의 환자에 대한 신뢰도 역시 찾아볼 수 없다. 가장 신뢰가 필요한 관계가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왜 현재 대한민국에서 의사와 환자 간에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 의사가 문제인가? 환자가 문제인가? 아니면 다른 누구의 문제인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의사와 환자 모두 문제는 있지만 가장 큰 책임은 그간 정치인들에 의하여 공공연하게 조장된 의료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장 큰 원인인 듯하다. 그것의 끝판왕(?)이 최근 통과된 “의료인 면허 취소법”이리라.
어느 직역이나 일탈하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고, 의료인 역시 의업을 수행할 만큼의 자질이 안된다면 추후 환자들이 당할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해당 의료인의 면허를 박탈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모든 의료인이 동의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의료인이 공분하는 것은 그 면허의 박탈기준이다. 이번 개정안에 의하면 의업과의 연관성, 범죄의 종류, 경중과 상관없이 금고형 이상의 선고를 받으면 면허를 박탈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의업과 관계없는 금고형(집행유예 포함)에 해당되는 과실은 인생을 살다 보면 한 번쯤은 범할 수도 있다. 의료인이라고 어찌 완벽할 수 있겠는가? 의료인은 기본적으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의 사명감으로 살아가는 특별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한편 한 가정의 가장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평범한 생활인이기도 하다. 그 어떤 직역보다 가방끈도 길어서 빨라야 30대 중반은 되어야 경제적으로 어느정도 구실을 하게 되는데, 찰나의 실수로 중죄도 아닌 사안으로 그의 유일한 생계수단을 박탈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너무 가혹하다. 음주 운전 같이 최소 두 번의 기회를 주는 삼진 아웃제도 아니고, 그 면허 취소 사유의 과실이 의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윤리성을 가늠하는 것에 대한 인과관계 입증도 매우 모호하다.
변호사, 약사, 수의사, 세무사 등 면허증이 필요한 어느 직역에도 이런 식의 면허취소 제도는 없다. 사회가 고도화된 현재 위의 어떤 직역도 의사 못지않은 윤리성이 요구됨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선거에서의 당선을 일종의 면허로 간주한다면, 정치인들의 경우 의사보다 더 많은 국민의 생명과, 심지어 국가의 명운을 책임지고 있기에 어느 직역보다도 더 높은 윤리기준이 적용되어야 하나, 현실은 현행범임에도 의원직을 유지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이미 전과자인 경우도 어느 직역보다 많다. 정치인들은 현행범이거나 전과자여도 되고, 의사는 의업과 상관없는 조그만 잘못으로도 다시는 의사를 못 하게 한다는 것은 전혀 공평해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 법의 입법자들은 자신들은 어떤지 돌아보지는 않고, 의사는 그저 어떤 흠결도 없어야 하는 일종의 성자(聖人, holy man)로만 살기를 바랬나 보다. 그러면 성자로 대접해주는 법, 혹은, 존경받는 분위기라도 만들어 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참고로 의료인 면허 취소에 대한 유럽이나 미국의 통계를 보더라도 지난 수 십년간 면허가 취소된 의료인의 숫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 역시 살인이나, 고의적 중대의료과실 등 도저히 의업을 수행할 수 없는 자에 국한하며, 이러한 경우에도 최종 면허 취소는 반드시 의료인이 다수로 구성된 의료윤리위원회의 심의 결정이 있고 난 후 신중히 결정된다고 한다. 이미 우리나라 의료인의 면허 취소 건수는 꼭 이번의 의료면허 취소 개정안이 아니더라도 미국, 유럽 국가의 수십 배에 달한다. 한국 의사들이 원래부터 수십 배 더 나쁜 사람들(?)은 아닐 듯하므로, 이러한 통계는 기존의 의료법과 우리나라의 의료단체 윤리위원회의 자정작용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개정된 “의료인 면허 취소법”의 “금고형” 기준조항은 외국과 비교해 “나쁜 의사” 처벌이 힘들었던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조치가 아닌, 그간의 “의사 때리기” 연장선에 있는 또 하나의 정치쇼로 판단된다.
왜 우리나라는 그렇게도 의사들을 억누르지 못해 안달일까? 외국의 의사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게으르게 환자를 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나라 의사들은 세계 최저의 의료비에도 세계 최고의 의료기술과 서비스를 국민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는 그간 “생활인”으로서의 열악한 조건에서도 사명감과 성실함으로 고군분투한 대한민국 의료인의 공이 아닐까? 이를 칭찬해주고 격려해주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의사들의 명예와 권위를 계속 깎아내리려고만 한다면 앞으로 의사들의 선한 열정이 지속되기는 힘들 것이다. 이미 더 많은 열정과 자기희생이 요구되는 중증 의료분야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고스란히 환자의 피해로 되돌아오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직역 간 편가르기, 싸움 붙이기가 보편화되고 있는 듯하고 그 편가르기 수단으로 정당하고, 좋은 의미의 권위조차 깎아내려지고 있다.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을”의 “감정(emotion)”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예를 들면 “그간 네가 얼마나 불쌍하게 “을”로 살아왔니? 그러니 이제 그렇게 너를 주눅들게 했던 그놈의 “갑”을 좀 때려 줄게. 법도 너를 위해 바꾸고, 이제 네 세상이야. 너는 그냥 꽃길만 걸어. 나 잘했지? 그러니 언제든 내 편이 되어주고 표도 찍어줘”. 똑똑하지만 정이 많은 우리 국민들은 유난히 감정적인 부분에 잘 반응한다. 이런 효과를 경험한 일부 정치인들은 이제 이를 상습적으로 이용하는 듯하다. 그저 표를 더 얻기 위한 저질의 정치쇼임이 확실하지만, 그래도 좀 봐줘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전통적 기득권 집단인 의사의 권위를 최소화한 “의료사회주의”라고 하여도, 이미 우리나라 의료전달체계는 충분히 사회주의적이며, “열정”과 “사명감”없이 최고의 의료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넘은 지는 오래되었다. 중급의 국가공무원 지위로 자발적인 동기부여가 부족한 의사들이 제공하는 사회주의 의료체계의 의료수준이 자본주의의 그것에 비하여 어떠한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정치권은 준(準)사회주의 의료체계에서도 많은 부분을 열정페이(?)로 커버하며 세계 최고의 의료수준을 지켜온 대한민국 의료인의 명예를 더 이상 실추시키지 말기를 바라며, 이 유래가 없는 악법조항은 하루속히 폐기 혹은 개정되기 바란다. 영화 “친구”에서 장동건이 수 십차례 칼을 맞고 죽을 때의 마지막 대사가 문득 떠오른다. “이제 고마해라… 마이 무으따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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