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w York Times>에 오랫동안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 “The Ethicist”가 있습니다. 현재 뉴욕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윤리학자 콰매 앤터니 애피아가 맡은 이 칼럼은 독자가 보내는 윤리 관련 질문에 윤리학자가 답하는 방식으로 꾸려지고 있습니다. 치의신보에서 매월 1회 의료윤리 주제로 같은 형식 코너를 운영해 치과계 현안에서부터 치과 의료인이 겪는 고민까지 다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약력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졸, 동병원 소아치과 수련.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 및 건강정책 교실 생명윤리 석사.
연세치대 치의학교육학교실 교수
저서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2018),
역서 <의료인문학과 의학 교육>(2018) 등.
최근 의대 증원을 출발점으로 하여 의료 제도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합니다. 증원 논의가 다른 모든 논의를 다 덮어버려서 그렇지, 사실 더 중요한 제도적 변화가 뒤에서 대안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주어지고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가치 기반 지불제도로의 개편 제안입니다.
먼저, 잘 아시는 것처럼 국내의 의료 제도는 단일보험자 보편 보장 제도의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지불 방식에 있어 행위별 수가제를 기본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행위별 수가제는 의료 행위 각각을 비용으로 산정하는 방식이므로, 간단히 말해 병원에서 검사, 치료, 주사 등을 많이 할수록 많은 진료비를 받게 되는 구조입니다.
행위별 수가제는 검사, 치료 등 서비스 제공량을 늘리는 유인을 제공합니다. 또한, 이미 산정된 항목의 수가가 갑자기 증가하는 일은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새로운 장비나 기술을 도입하여 높은 수가를 받는 것에 힘이 실리게 됩니다.
의료인들이 빨리, 많이 진료하도록 제도가 유도하고 있으므로 의료인력이나 시설 대비 의료서비스 제공량이 많아지고, 환자들은 손쉽게 병의원에 가서 치료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구 관점의 유익이고 개인 관점에선 문제가 됩니다.
의료인들이 빨리 진료하려면 개별 행위의 시간을 극단적으로 줄여야 합니다. 의과의 3분 진료가 여기에서 탄생하지요. 한 의료 행위에 들이는 시간을 줄이고 환자를 많이 보려면 의사가 여러 환자를 보고, 그 사이를 다른 인력이 채워주어야 합니다. 소위 여러 ‘방’을 열어 두고 의사나 치과의사가 계속 옮겨 다니며 진료하고, 비는 시간을 간호사나 치과위생사, 조무사에게 맡기는 일, 더 나아가 이른바 ‘위임진료’의 문제가 불거지는 상황 또한 벌어집니다. 의료기관은 계속 기술을 도입해야 하고, 상담, 교육, 예방, 관리보다 새로운 진단 장비나 치료 재료를 도입하는 데 주로 관심을 둡니다. 또한, 병의원은 환자와 가족의 의도나 가치와는 별개로, 환자를 어떻게든 치료하고 살리는 데 노력하게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몇 질병을 대상으로 행위별로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에 따라 정해진 비용을 보상하는 포괄수가제를 도입하였으나, 특정 질병군에만 적용되며 모든 의료서비스에 일반적으로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질병에 따라 비용이 정해지면, 의료기관이 특정 질병에 제공하는 서비스는 한정될 것이고 예외적인 상황에 대응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도적으로 이에 대응하는 조항들을 만들어 낼 수 있긴 합니다. 예컨대, 우리도 포괄수가제에 행위별 수가를 결합한 신포괄수가제를 시범사업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대 적용에는 재정 우려가 따라붙습니다.
게다가, 행위별 수가제의 틀을 유지하는 한 최근 문제로 지적된 필수의료 영역의 인력 부족이나 응급실의 제한, 지역 의료의 붕괴는 계속 악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필수의료 영역의 수가를 올려주는 데에 한계가 있기도 하지만, 필수의료의 특성상 빨리, 많이 진료하기도 어렵습니다. 중환자실을 빨리, 많이 운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지역 의료의 붕괴는 행위별 수가제의 문제라기보다는 의료전달체계에서 일차적 해결책을 찾아야 하겠지만, 대형 병원에 많은 환자가 모이고 그 환자들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 더 숙련된 의료진이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상황에서 환자들이 더 좋은 치료를 받으려는 일념으로 빅5 병원에 모이는 것을 수가 체계가 뒷받침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물론, 행위별 수가제를 평가하기 위해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설명했음을 인정합니다).
결국, 의료서비스를 많이 제공하도록 유도하는 한 현재의 문제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의료서비스의 수요를 줄이는 방법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의료서비스의 수요를 줄이는 방법이 있을까요? 물론, 공급을 한정하여 그에 수요를 맞추는 방법도 있기는 하겠으나 선택해선 안 될 방법이겠지요. 선택적인 진료라면 비용을 높여서 접근성을 낮추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지만, 모든 진료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닙니다. 결국, 환자들이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진료 영역이나 부분에 있어 치료받지 않는 결정을 내릴 때만 의료서비스의 수요는 줄어들 겁니다. 좋은 말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여기에 가치 기반 보건의료와 환자 중심성이라는 개념이 제시됩니다. 포터와 테이스버그는 『보건의료의 재정의(Redefining Health Care)』라는 책에서 현재의 여러 논의들, 예컨대 비용을 다른 쪽으로 전가(즉, 시스템의 한 부분에서 발생하는 부담을 다른 부분으로 옮기는 일)하고 매매 교섭력을 높이며 환자 선택을 제한하고 서비스를 제한하여 비용을 통제하려는 방식들은 결국 제로섬 경쟁이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전체 의료 비용을 줄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가치 기반 보건의료로 초점을 옮겨야만 의료 비용의 감소가 가능하며, 이를 개인 선택부터 지불 체계까지 모두가 뒷받침해야 한다고 보았어요.
환자중심성은 말 그대로 진료를 받은 환자에게 의료서비스에 대해 평가하도록 하자는 것이고, 이를 위한 여러 설문이나 평가 기준이 중요해집니다. 심평원이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는 환자경험평가나, 최근 국내에 소개된 환자 자가보고 성과 척도(Patient-Reported Outcome Measures, PROMs) 등은 진료의 성공을 의사가 아닌 환자가 평가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때, 어떻게든 치료하기만 하면 된다는 전통적인 의료적 접근방식은 환자가 원하는 선택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접근방식으로 바뀌게 되지요. 환자는 다양한 치료법을 놓고 고민하고 자신의 가치와 경험에 맞게 결정합니다. 개인 차원에선 결정의 다양성 확보와 환자의 선택권 강화이지만, 이것이 인구 차원에선 의료비 감소라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지금까지 의료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검사와 치료를 추구해 왔으니까요.
이런 환자 쪽의 평가 결과가 더 높아지는 치료와 접근에 더 많은 보상을 하겠다는 것이 가치 기반 지불제도의 기본입니다. 진료의 질과 보상 체계를 연동하겠다는 것이며, 성과와 수가가 묶이는 것이죠. 이때, 환자와 의료진이 함께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가 진료 설정의 핵심이 됩니다. 환자가 수동적인 위치에서 병원과 의료진의 결정을 따라가기만 했을 때, 환자가 그 결과를 결코 좋게 평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국내에선 환자의 자기보고 평가나 함께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전혀 익숙하지 않다 보니 가치 기반 지불제도를 제삼자의 진료 결과 평가에 따른 보상 체계로 이해합니다. 병원이 진료 결과를 복지부에 보고하고, 같은 비용으로 더 많은 성과를 낸 병원에 더 보상을 주는 것을 가치 기반 지불제도라고 이해하는 것이지요. 심지어 복지부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염려가 됩니다. 이는 가치 기반 지불제도의 전제를 오해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비윤리적인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환자를 결과 판단의 주체로 만들기는커녕 더 객관화, 대상화시키는 제도가 되는 이런 잘못된 접근은 결국 약자들, 예컨대 노인이나 장애인은 치료받지 말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이런 분들은 당연히 같은 비용으로 치료 결과가 좋을 수 없으니까요.
따라서, 저는 가치 기반 지불제도의 도입을 위해 환자중심성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검토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런 논의를 치과계에서 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여요. 치료 결과에 관한 환자의 평가나 치료 결정을 함께 내리는 과정 등을 환자와 함께하기가 비교적 쉬운 영역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지불제도가 점차 이쪽으로 이동한다면, 치과 쪽에서 전향적으로 의견을 내는 것이 저희에게도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진료하시거나 치과의사로 생활하시면서 가지셨던 윤리와 관련한 질문을 기다립니다.
dentalethicist@gmail.com으로 보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