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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답사-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의 흔적을 찾아서

Relay Essay 제2086번째

지난 12월 5일 함석태 개원 100주년을 보내면서 성북동 답사길에 나섰다. 이 길은 76년전(1939년) 함석태 선생이 상허 이태준家를 방문했던 길이다. “淸福反日”이라는 수필도 이곳을 다녀온 후 쓴 것이다.

그분의 체취를 생각하며 우리 일행은 한성대입구역에서 만남을 시작했다. 협회사 편찬위원회 자문위원 김종열 선생님, 배광식, 이주연 편찬위원, 치의신보 안정미 부장, 협회 직원 권남학과 함께 향토사학가 이승을 선생의 도움으로 답사길을 나섰다.

이승을 선생은 함각(함석태 손자)과 이웃인연으로 함석태 선생을 연구하여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찾아낸 분으로 충분한 자료 준비와 설명으로 우리의 답사길을 수월하게 해주었다.

한달 전에 날을 잡았으나 공교롭게도 민노총궐기대회가 있는 날이라 마음은 불안했고 며칠 전 깜짝 추위가 있어서 걱정했는데 모든 게 순조로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우리 일행은 한성대입구역에서 만나 택시로 성북동 길을 거슬러 올라 삼청동 북악 스카이웨이로 갈라지는 삼거리 지점에서 내렸다.

근원 김용준 집부터 답사했다. 근원 김용준은 화가, 수필가로 이태준과 같은 동경유학생으로 집도 성북동 근처에 살아 절친한 사이였다. “두꺼비 연적을 산 이야기”가 고교 교과서에 실렸고 서울대, 동국대 교수를 지냈다. 6·25때 월북하여 평양미대 학장을 지냈으며 성혜랑 씨 말에 의하면 김용준이 김일성 사진이 들어있는 신문을 밖에 버려 처벌 받을 것이 두려워 자살했다고 했으나 확실치 않다. 함석태 선생과도 친분이 두터워 76년 전 이태준家 방문 전에 이집을 먼저 방문했다. 개울을 끼고 물을 찾아 김용준 집을 방문한 감회를 이렇게 적었다. 빨간 감이 익은 여러 그루 노시(老柹)사이로 한적하게 닫혀있는 一閣門이 보였다고 했다. 이곳이 우산 김용준(牛山 金鎔俊)의 山莊이라고 표현했다. 황엽주실(黃葉朱實)에 맑은 산음(山陰)에 만염화홍(萬染花紅)을 이룬 풍상(風霜)한 맛은 홍시산장(紅柿山莊)이라 불러보고 싶다고 썼다. 우리가 당도했을 때 그집은 높은 지대에 굳게 닫힌 대문이라 접근할 수 없었으나 지금도 감이 빨갛게 익어 운치가 넘쳤다. 이 감나무가 그때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감 익은 풍경이 서울에서 보기 드문 경치였고 당시 함석태선생의 감탄을 되새겨 본다.

이 집은 나중 수화 김환기(서양화가)의 집이 되었다. 그 집과 감나무를 배경으로 기념촬영 후 길 건너편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尋牛莊)으로 향했다. 심우장 올라 가는 길은 비탈길이라 사람만이 겨우 다니는 산동네길이다. 대문과 지붕이 거의 맞붙은 좁은 집들이 경사진 골목길을 따라 줄지어 있다. 열악한 동네 모습이지만 아담한 한옥들이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이 길을 따라 정상쯤에 심우장이 있다. 심우장은 “님의 침묵” 시인 만해 한용운의 집이다. 심우(尋牛)는 선종(禪宗)에서 깨달음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 열 가지 수행단계중 하나인 자기본성만이 소를 찾는다는 심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심우장 이름처럼 인간본성에 대한 소박한 명성을 가진 곳이다. 두 칸짜리 소박한 집이었으나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집을 짓고 집에 비해 너른 마당과 2층 토방이 있는 것으로 봐 사대부집 형태였다.


성북구 지정나무로 향나무가 있는데 쭈뼛한 모습에 껍질은 벗겨지고 볼품은 없었다. 오히려 대문에 걸쳐있는 소나무 한그루가 그때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한용운은 삼각동 함석태 집 옆 광문회에서 활동했으며 함석태 부친 함영택과 함께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참여해 함석태와 인연이 있다.

다음 행선지는 다시 비탈길을 내려와 성북동 복개천을 따라 승설암에 다다랐다.

승설암은 인곡 배정국의 집으로 현재는 국화정원 한정식 집이 되어있다.

배정국은 종로 백양당 출판사 사장이었다. 소전 손재형은 상허 이태준의 부탁으로 1945년 4월 5일 청명절(을유년)에 승설암 후원을 그린 것이 “승설암도”이다.

손재형은 서예가이며 1939년 이태준家 집들이 모임에 참석 시 함석태 모시고 동행한 함석태와 절친한 지인이었다. 배정국은 6·25때 납북되었다. 백양당은 이태준이 발행한 <문장>지의 발행 출판사이다.

그림 윗부분에 글씨가 몇 자 있는데 내용이 을유년(1945) 청명일에 한가한 뜰에 놀러왔다.

상허(소설가 이태준의호 <문장>지의 편집인)가 나(소전 손재형)에게 이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여 즉석에서 이 그림을 그리고 기록하는데 이 모임에 모인 사람이 土禪(토선. 함석태의호), 仁谷(인곡. 승설암 주인 배정국의호), 모암(누군지 모름), 심원(동양화가. 조중현 전 이대 교수), 수화(화가. 김환기. 현 환기 미술관), 소전(손재형)이다.

이 그림 내용을 보면 함석태는 1945년 4월까지 서울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그 후 총독부 소개령에 의해 1945년 6~7월경에 영변으로 갔으리라 생각된다. 손자 함각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그래서 이 그림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승설암은 성북동 이태준가(현재 수연산방 전통찻집) 근처에 있는데 현재는 국화정원이라는 한정식집으로 개조되어 있었다. 우리가 탐방했을 때 기와집형태 지붕의 모양이 승설암도에 그려진 모양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어진 집 모양도 아름답고 목재도 튼튼한 것을 사용해 변하지 않았다.

다음 목적지는 아래쪽으로 걸어 내려가 5분 거리도 채 안되는 곳에 “수연산방”이 있다.
1939년 함석태가 김용준, 길진섭, 손재형과 함께 집들이로 참석했던 집이다. 그 후 “淸福半日”이라는 수필을 써 <문장>지에 기고했다. 이집은 소설가 상허 이태준의 옛집이다. 현재 이태준의 외종손녀가가 전통 찻집으로 운영 중이다. 현재 이태준의 집 방문 당시의 옛 건물이 그대로 보존 되어있다. 분위기도 차분하고 젊은 미인들이 차 마시는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이태준도 골동품 수집가이며 <고완>이라는 글이 고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다음 마지막 행선지는 간송미술관이다. 문이 닫혀있어 안에 까지는 들어가지 못했다. 간송 전형필이 세운 사립박물관이다. 함석태는 전형필과 골동서화 전시회 등도 같이 했으며 친한 사이였다.

당시 성북동은 성문 밖으로 고양군 성북리 상성북둔(高陽郡 成北里 上成北屯)이었으며 북정마을이라고도 했다. 함석태는 당시 성북천이 흐르고 산의 경치가 아름다웠음을 묘사했고 개발이 시작되어 자연이 훼손되어감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날 함석태 일행은 이태준가 방문 후 저녁 늦게 쌍다리(지금 상호 쌍다리가게가 있음) 근처에서 손재형, 길진섭, 함석태 셋은 서울쪽으로 나머지 셋 이태준, 배정국, 김용준은 성북동쪽으로 헤어졌다고 썼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해도 저물고 겨울 바람도 차가워 배광식 선생의 안내로 위로 거슬러 올라와 수월암 근처 “누룽지백숙” 맛집에서 맛있는 식사를 곁들이고 그 위에 있는 6만장의 LP판이 소장된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맛은 일미였고 하루의 피로를 씻어 주었다. 성북동에 이런 곳이 있나 감탄하며 답사를 마감했다. 유익한 하루였다.
변 영 남  협회사 편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