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8일자 小考를 끝으로 연재를 일단락 짓게 되었습니다. 의욕과 분별력의 지루한 힘겨루기가 9개월째로 접어들자 그만 체력이 바닥이 나고 만 것 같다고 말씀드리면 구차하나마 변명이 될까요. 소중한 지면을 허락해 주신 치의신보와 읽어주시고 격려해 주신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머지않아 흰 눈 녹은 가지가지마다 다시 하얀 뭉게구름 같은 白木蓮이 피겠지요. 연두 빛 새 잎이 채 나오기도 전에 피어나는 하얀 그 꽃봉오리들은 어쩌면 봄의 여신이 보내는 상냥한 편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봄소식은 언제나처럼 따사롭고 환히 빛나리라 믿습니다…. 오지연 치과의원 원장 서울치대 치의학대학원 동창회 부회장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는 詩 구절 그대로, 퇴근 무렵이 되자 함박눈이 쏟아졌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사서 집으로 간다. 다육이 화분 마냥 운전석 옆에 꽂혀 있는 커피 잔에서 피어 오른 향이 좁은 차 안을 금세 판타지의 세계로 만든다. 원두커피 봉지를 넣어 일단 책들에게 킬리만자로에 온 듯 황홀함을 선사한 뒤 그 가방을 꽃 핀 화분처럼 벨트 채워 조수석에 앉히고 봉천동 고개를 넘는다던 황동규 시인 따라 하기다. 고마운 분이다. 한없는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마다 오랫동안 전해오던 사소함으로 어릴 적부터 요즘까지 쭉 곁을 지켜준 그 빛나는 詩들… 거북이 걸음인 차창 밖으로 백화점의 찬란한 전등장식이 보인다. 동굴에 살던 石器時代부터 우리는 불빛을 좋아했다고 한다. 밤이면 이리나 늑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모닥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았던 기억과, 그 불 옆엔 종종 스스로와 듣는 이 모두에게 두려움과 걱정을 잠시 잊게 해 주는 이야기꾼이 있곤 해서일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 교수 J.R.R.톨킨 역시 매일 밤 난롯가에서 자신의 세 아이들에게 땅 속 공동(중간계)에 사는 호빗이란 반인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수많은 친구들을
예상을 뛰어 넘는 많은 관람객으로 한겨울의 전쟁 기념관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TV쇼의 위력이란 실로 대단해서, 평소 아이들 때문에 억지로 끌려온 지루함을 온몸으로 표현하곤 했을 아저씨들은 온데간데없고 이어폰을 낀 채 전시된 모든 것들을 맹렬한 기세로 들여다보느라 여념이 없는 예비역(?)들의 열기로 장내는 심지어 더울 지경이었다. 인파에 밀려 비실비실 구석으로만 돌다보니 ‘보라매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전쟁 당시 우리 공군의 상황을 설명한 코너 앞에 서게 됐는데 무심코 내용을 읽다가 그만 망연자실하게 되고 말았다. 개전당시 우리 공군에는 조종사가 단 57명뿐이었고 전투기는 한 대도 없었다. 그래서 육군 병기창에서 시험제작한 15kg 폭탄 247발과 경찰에서 인수한 수류탄 500여발은 보유 항공기의 전부였던 (무장이 없는) 12대의 연락기와 10대의 연습기 뒷자리에서 관측사가 창문을 통해 손으로 직접 떨어뜨려야 했다. 목표물에 가깝도록 조종사가 매우 낮은 고도로 비행해야만 했고, 당연히 적의 고사포에 격추될 위험이 컸다는 대목에선 결국 눈물이 났다. 미군이 지원하기로 한 F-51전폭기 10대를 인수하러 개전 바로 다음날인 6월 26일 일본으로 건너간 10여명
“5만 명이 운집한 웸블리 스타디움엔 환희의 소용돌이가 일었고, 그는 스탠드를 가리킨 뒤 자랑스럽게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한 일본 언론이 지난 5일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터뜨린 손흥민(토트넘 홋스퍼)의 중거리포를 보도한 문장이라며 아들이 보여주었다. 함께 봤던 경기여서인지 실감이 났다. 축구팬이라기보다는 축구팬의 엄마일 뿐이라서 대부분의 시간을 아들 곁에 앉아 헤어스타일로 선수 이름 맞추기를 하며 보내는 형편이라 골 장면 정도는 되어야 기억이 나는 것이다…하하하. 불과 몇 분전에 웨스트 햄의 오비앙이 성공시킨 엄청난 선제골로 0:1로 리드 당하고 있었던 토트넘 이었다. 패스를 받았을 때 상대 미드필더 3명과 수비수 5명 등 8명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손흥민은 눈앞의 작은 공간으로 살짝 트래핑 한 뒤 바로 오른발로 대포알 같은 30m 중거리슈팅을 했고, 골문 오른쪽 구석으로 날카롭게 휘어져 들어가는 공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캐스터는 “손은 마치 페드로 오비앙이 하는 건 나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 눈부신 골을 보여주네요! 오늘 밤 웸블리에는 슈팅스타들이 즐비하군요!” 라고 소리쳤고, 관중석의 한 팬은 두 살 쯤 되어 뵈는 아들(또 한명의 팬
부지런하고 감성 충만한 분들의 사진을 알람삼아 맞는 기쁜 아침, 오늘의 취향저격 최종병기 사진은 눈 내리는 밤의 전철역부근 정경이다. 바삐 어디론가 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한 소녀가 버스 정류장 지붕 밑에서 손바닥 위로 눈을 맞고 있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하염없이 내려오는 눈송이들과 줄지어 늘어선 가로등 불빛은 서로 어울려 마치 별처럼 빛난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란 박인환의 詩가 떠오른다. 상심하여 詩人의 가슴에 혹은 소녀의 손바닥 위에 떨어져 가벼웁게 부서지던 별은 오오, 그러니까 바로 눈이었던 거였다. 꽃처럼 별처럼 빛나다가 땅이나 몸에 닿으면 사라지는 하얀 눈을 경험하지 못하는 곳에선 (화가는 몰라도) 詩人은 나오기 어렵다는 말을 믿어야 하려나보다. 오늘은 밥 시거의 노래를 틀어놓고 출근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흰 눈처럼 폭신한 그의 목소리가 목마와 숙녀를 낭송하는 환청이 들리는 느낌이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라는 구절은 그대로 영화 ‘인터스텔라’로 이어져 STAY란 단어로 가슴에 별처럼 남았다. 일단은
새해맞이 카운트다운 불꽃놀이가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걸 보면 묵은해를 태우고 반짝이는 새로운 날을 기다리는 마음이란 비슷한가 보다. 템즈 강변 사우스 뱅크 부근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했던 적이 있었다. 자정에야 시작되지만 3시면 어두워지는 런던의 겨울이라 이미 캄캄해진 6시 무렵부터 사람들이 모여든다. 코트와 목도리로 단단히 무장을 한 채 시큼한 식초(malt vinegar)냄새가 진동하는 강둑 쪽으로 삼삼오오 걸어가는 끝없는 人波는 그 자체가 이미 구경거리다. ‘향수’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치 사람들을 홀려 이끄는 듯 자욱한 냄새의 정체는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피시 앤 칩스란 음식이다. 런던의 멋진 펍에서 피시 앤 칩스를 시켜 먹어봤지만 느끼하고 별 맛도 없더라는 얘기를 들을 때면 짧게나마 런던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마음이 아프다. 펍에 앉아 포크와 나이프를 써서 케첩에 찍어 먹어서는 결코 그 음식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대구 등 흰 살 생선에 마치 빵처럼 두툼한 튀김옷을 입히고, 굵게 썬 감자튀김과 함께 신문지에 싼 뒤, 그 가게 특유의 비법으로 만든 맥아식초와 소금을 뿌려 테이크아웃 해서 먹는 게 피시 앤 칩스다. 위생적인 전용포장지로 바뀐 후
12월은 의외로 결혼 시즌인가보다. 지난 주말에도 매서운 강추위에 두 곳의 결혼식에 다녀와서 결국 감기에 걸리고 말았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무엇인가 매듭을 짓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일이겠거니 짐작해본다. 그러나 2018년이 온다고 해서 지구가 새 것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 또 겪어 보신 분들은 모두 알고 계시듯 결혼이란 매듭이라기 보단 차라리 하나의 새로운 시작에 가깝다. 요컨대 꼭 이럴 것 까진 없지 않나 싶지만 남 일일 땐 다 알 것 같아도 막상 내게 닥치면 생각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그러기에 ‘내로남불’이라 했던가. 조카의 결혼선물로 앞치마 7개를 주었다는 글이 있었다. 미대를 나와 오래 동안 출판 관련 일을 하고 있던 여성이었는데, 물방울무늬와 꽃무늬, 줄무늬 등 앞치마 디자인으로 쓰이는 대부분을 망라(?)하여 일주일간 돌아가면서 사용하라며 주었다는 것이었다. 페미니즘 적 관점에서라면 살짝 논란을 부를 선물이고 글일 수도 있겠지만 직장과 가정을 힘겹게 양립시키며 살아 온 스스로의 所懷를 역시 비슷한 삶을 살아갈 조카딸에게 조용조용 들려주는 글이어서 꽤 뭉클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않을 수도 없고, 직장과 살림과 육아 중 어느 것을 외면 할
청경채랑 버섯은 충분한데 삶은 돼지고기가 조금 밖에 없지만 이제 그 정도 일 쯤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즉시 베이컨으로 보충하고 (태연자약하게) 굴 소스로 마무리해 꽃 빵과 함께 저녁으로 내 놓았다. 일단 냄새부터 딱 동파육 이네 云云 과장 섞인 칭찬을 남발하며 맥주 한 캔씩 들고 슬그머니 TV 앞으로 그 퓨전 혹은 짜깁기 음식을 가져가는 父子를 큰 인심이라도 쓰듯 못 본 척 해 주는 주부 9단 신공. 아무렴, 大器는 晩成이라 했다. 스타워즈 8편을 기다리며 지난 일곱 편 리뷰에 여념이 없는 분들 많으실 텐데 이번엔 전에 없이 나까지 끼어 앉아 보고 있다. 얼마 전 레아공주 케리 피셔가 세상을 떠나면서 40년간 시리즈와 같이 했던 내 지난 추억 일부분도 공주와 함께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 들어서다. 신해철도 김주혁도 그립겠지만 레아공주를 잊기는 더 힘들 것이다. 늘 불리한 전세임에도 저항군을 이끌고 용감하게 싸우던 공주는 유연하면서도 박력이 넘쳤고, 누구나 그 행동을 예측 할 수 있을 만큼 정의감에 불타는 명료한 캐릭터였다. 자신의 이익이 최우선인 한 솔로 선장이 혼자 빠져 나가려다가도 번번이 발길을 돌려 공주를 찾아 가는 것 또한 어디 있을 지 뻔한
양만춘장군이 들어앉아 지키고 있는 鐵甕안시성이라도 되는 듯 도무지 뚫리지 않는 메탈 크라운을 간신히 제거 한 뒤에 양치하는 환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저 분은 방금 전까지 자신의 입속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던 기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과연 알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어둡고 좁은 동굴과도 같은 곳에서 조준과 포지션을 유지하려 숨도 멈춰가며 그 어떤 보호 장비도 없이 집중했던 작업이었다.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 쉴 this very moment를 내가 얼마나 고대했는지 그는 아마도 알 도리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재료비는 낼께’라는 험하디 험한 말씀과 함께 아침부터 들이닥친 먼 친척뻘 되는 환자에게 결코 찌푸린 낯을 보이지는 말자는 克己였고, 또 어쩌면 안시성에서 敗退한 뒤 長安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病死한 당태종 꼴이 되진 않겠다는 각오였다. 龍도 아니고 왕은 더더욱 아니지만 작은 상처에도 사뭇 견디기 힘든 ‘거꾸로 솟은 비늘’ 같은 부분이 나라고 없을 리야! 천진난만인지 무신경인지 모를 저 난폭한 재료비 운운에도 결코 평정심을 잃지 않을 때에야 下山할 경지에 이른 거라던 모 선배 말씀이 생각나는 울적한 오전이다. 이런 날엔 진통제 삼아, 막내 동
감명 깊었던 다큐멘터리를 다시 볼 때는 도중에 보기 시작해도 이해에 무리가 없을 뿐 아니라, 기억에 남았던 부분이 다가올 때면 매번 가슴이 두근두근하기까지 하다고 말씀드리면 이내 눈치 채셨겠지만, 그리고 좀 쑥스럽지만, 무척 즐기는 취미이다. 가령 일주일쯤 문 밖 출입을 못하는 정도는 내게 아무런 불편도 주지 않는다. 궁금해 하실 분도 없겠지만. 엊그제는 처칠에 대한 BBC의 다큐를 봤는데, 그의 장례식 후 템즈강을 통해 生家인 블렌하임 성으로 가기 위해 유해를 실은 배가 출항할 때 항구의 타워 크레인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여 조의를 표하는 유명한 장면이 나왔다. 그 부분에서 꼭 눈물이 나는데, 도중에 기차로 옮겨 싣고 지나갈 때 들판이며 언덕에 나와 서서 모자를 벗고 예를 갖추는 사람들 때문에 계속 울게 된다. ‘늙은 사자’라 불리던 영국을 2차 대전 승전국이 되게 했던, 나치즘과 파시즘 등 모든 극단적인 것들에 맞서 극단적일 만큼 저항했던 처칠을 향한 영국인들의 이 유별난 사랑은 또한 당시 재위했던 조지6세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콜린 퍼스의 능청스런 연기로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묘사되었듯, 조지6세는 심한 말더듬이였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자신과는 상관없
지난 달 푸미폰 전 태국 국왕의 장례식 직후에 파타야에 갔더니, 마치 집안 친척이나 할아버지 얘기인 듯 장례식 다녀온 얘기를 하는 태국인이 많았다. 방콕까지 직접 다녀온 사람도 있고 파타야 곳곳 영정을 모셔놓은 분향소에 다녀온 사람도 있었는데, 전부터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예사롭지 않은 열기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푸미폰 왕은 1946년 즉위한 이래 70여 년 간 재위하며 국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산간 오지의 농민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심던 아편을 커피로 바꿔 재배하도록 독려하고 그 판로도 마련하여 지금도 타이항공에서는 승객들에게 그 커피를 제공한다고 하며, 오염된 저수지의 정화 정수 장치를 개발해 새우와 물고기 등을 양식하게 하여 식량 자급자족을 하도록 도왔고, 가뭄을 해결하고자 왕 스스로가 인공강우 전문가가 되었을 정도로 농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데 평생을 바쳤다. 오랜 재위기간 중 로얄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개발도상국의 단계적 발전 계획들 수천 개를 펼치는 동안 스무 번에 가까운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왕권은 점점 강화 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서로 첨예하게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푸미폰 왕에게만은 일치
한국인 記者와 결혼하여 서울에 20여 년째 살고 있는 일본인 여성을 치료하고 있는 도중에 그녀의 시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며느리 입장이야 이심전심 알만 한 처지라 짐짓 무심한 척 글러브도 바꿔 껴 가며 딴전을 피워 편하게 통화하도록 해 주었다. 서둘러 통화를 끝낸 뒤 미안하다며 변명처럼 “아들과의 효도폰도 있는데 늘 말도 잘 안 통하는 제게 전화를 하셔요…”라기에, 효도폰은 ‘유사시’에 쓰라는 전화니까 그야 당연한 일이죠 라고 웃으며 말해 주었다. 일본 여인 특유의 놀라는 표정으로 눈이 동그래 진 환자가 남편과 하도 통화가 안 되어 어머니와의 핫라인인 그 효도폰 번호로 전화를 했다가 대판 싸운 일이 있었다며, 남편이 설명도 안 해 주고 불같이 화만 냈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고 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심지어 핫라인 효도폰 번호인 줄도 몰랐고, 내가 동기 골프 모임 회장이던 몇 년 전, 무슨 기념패를 만드는 의논 차 당시 총무이던 남자 동기에게 (바뀐 전화번호를 미처 몰라) 옛날에 입력해 놓았던 번호로 전화를 건 것뿐이었는데, 왜 이 번호로 전화했느냐, 지금 올림픽대로인데 갓길에 차 세우고 비상등 켜놓고 받고 있다, 이거 우리 엄마랑 만 통화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