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 어느덧 치의학대학원에 입학한 지 2년이 지나고 본과 3학년이 되었다. 본과 3학년이 된 후 처음으로 맞게 되는 공식 행사는 바로, 그 유명한 화이트 코트 세레모니! 예비 의료인으로서 첫 발걸음인 그 화이트 코트 세레모니를 하게 된다니, 떨리는 순간일 수밖에 없다. 의료인인 오빠를 보면서 난 정말 의료인은 못 되겠다고 혀를 내두른 게 몇 번인지도 모를 정도였던 내가 의료인으로서 첫 발짝을 떼게 되다니, 사람 일은 정말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다. 놀랍게도 의학도들은 원래 검은 옷을 입었다고 한다. 무겁고 진지한 직업이기에 성직자와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었고, 또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엔 의사의 방문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에 세균학이 발달해가면서 위생 개념이 강조되면서 청결하게 보이며, 전문성과 냉철함을 느끼게 하는 흰 가운으로 변했다고 한다. ‘화코세’라고 불릴 정도로 이제는 유명해져버린 화이트코트 세레모니는 1993년 콜롬비아 대학의 의사들을 대상으로 열렸다. 당시 소아과 의사였던 아놀드 골드 박사의 아놀드 P 골드재단에서, 의학 훈련을 시작하는 의학도들에게 “휴머니즘”을 강조하기 위해 시작한 세레모니였다. “올바른 인격과
지금 28세인 나는, 20살 갓 대학생이 되었을 때부터 쉬지 않고 과외를 했다. 용돈벌이로 시작하긴 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언니누나 사이로 지내는게 재미있었다. 어느덧 나이가 벌써 30에 가까워지다 보니 이제는 언니누나로 지내기엔 나이 차이가 너무 크게 나지만 여전히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내고 있다. 항상 1:1 과외로 수업을 했는데 약 반년 전 친구의 권유로 학원에서 파트타임 강사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장소는 무려 대치동! 학생 시절에도 다녀본 적 없는 대치동 학원가에 선생님으로 다니게 되다니. 기대보다는 걱정이 큰 상태로 어찌저찌 시작되었다. 그렇게 우연히 시작된 대치동의 이미지는 내 생각과는 같기도, 다르기도 했다. 일단 대치동 그곳은 내 생각보다 더 강렬했다. 내가 맡은 반은 ‘중등 의대 준비반’이었으니… 내가 다니게 된 학원이 유별나다는 사실을 차츰 알게 되긴 했지만, 처음 마주하게 됐을 때 적잖이 놀란 건 사실이다. 대치동은 진짜 이렇구나 라는 생각으로, 내 색안경은 더 진해졌다. 첫 수업 날 학생들을 만났는데, 내 색안경이 옅어졌다. 학부모의 등쌀에 쓸려 좀비처럼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을 상상했는데 이게 웬걸, 학생들의 의욕이
요즘 세상에서 SNS는 소식의 창구이다. 연락을 하지는 않는 지난 인연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민망하지 않은 방법으로 알아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나에게 있어 SNS는 학창시절 때부터 빠짐없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초등학교때는 버디버디, 중학교때는 싸이월드 미니홈피, 고등학교 때는 페이스북, 그리고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는 인스타그램까지 언제나 함께였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나이기에 SNS를 멀리할 이유가 없었다. 방과 후에 집에 와서는 가상의 세계에서 다시 그 관계를 이어 나갔다. 재미있는 사진이 있으면 업로드하고 서로 웃었으며, 심지어는 몇몇 친구들과 공용 다이어리를 쓰기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런 내가 나이가 든 걸까, 최근에 급격히 SNS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광고와 과다한 정보들이 마냥 유쾌하지는 않다. 특히 텍스트보다 이미지가 강조되는 SNS 특성상, 주변인들이 어떤 ‘감정’으로 지내는지를 공유하고 공감하기보단 ‘어떤 멋진 일’을 하는지만 자극적으로만 다가온다. 게시글을 업로드하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감정을 공유하기보단,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리기 바쁘다. 재미있는 얘기를 친구와 나눈 적이 있다.
얼마 전 한 교수님과 식사 자리가 있었다.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가던 중, 교수님께서 동기부여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셨다. 학업에 있어 동기부여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서 말이다. 여느 교수님들께서 그러시듯, 학생들의 동기부여 부재에 대해 걱정이 깊어 보이셨다. 나 또한 그 자리에서는 웃으며 남의 일처럼 맞장구 쳤지만 속으로는 웃을 수가 없었다. 교수님께서 걱정하는 학생의 모습이 내 모습 같아 당당할 수 없었다.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학업이 재미가 없을 때가 있다. 공부가 재미있는 학생이 어디있냐며 위로해주시는 분들도 많지만, 웃으며 넘길 수 없을 정도의 혼란스러움을 느낄 때도 있다. 기초과목을 배울 땐 나와는 무관한 공부라고 느껴지기도 하고, 임상과목을 배울 땐 아직 먼 일 같아서 애착이 가지 않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내가 느끼기에는) 이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학업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간에 대해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학우를 만나기 힘들다. 그리고 주변에서 동기를 찾지 못해 길을 잃은 느낌이 든다는 고민을 들어본 적도 많았다. 그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해본다면, 미래의 직업적 안정성 때문에 수동적으로 살게 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살면서 매 순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제일 가깝게는 가족, 친구들, 연인과의 관계가 있을 것이고, 학교를 다니면서는 선생님, 교수님과의 관계, 단골 식당에서는 사장님과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마 치과의사가 된 후에는 환자, 치과위생사와도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관계라는 건 참 어렵다. 평소에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기에 특별한 자극을 느끼지 못하지만 한번 어긋나기 시작하면 아침에 눈뜨고 밤에 눈 감을 때까지, 혹은 그 넘어서까지도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가화만사성이라는 고사성어도 다섯글자에 그 뜻을 담고 있지 않은가. 유치원때부터 교우관계가 좋다고 소문난 아이 중 하나였던 나에게도 관계는 민감한 주제였다. 관계는 다양하게 이뤄진다. 갑과 을의 관계, 동등한 관계, 사랑하는 관계 등... 간단하게는 긍정적인 힘을 주는 관계와 나를 위축시키는 부정적인 관계가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적인 관계에 대해서 극단적인 표현으로 정의하고 싶지는 않다. 애초에 관계라는 것은 배려와 이해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어느정도는 내 몫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관계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또한 다양하다. 손해를 보더라도
7월 1일, 뜨거웠던 여름날의 날씨처럼 치열했던 11과목의 기말고사가 끝나고 드디어 방학이 찾아왔다. 방학은 학생에게 있어 최고의 특권이다. 27살이나 먹은 내가 방학이라고 마냥 즐거워하기에는 철없어 보이긴 하지만 신나는 이 마음을 숨길 수는 없다. 각자의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친구들도 내 방학만큼은 부러움에 몸서리친다. 내가 생각해도 약 2개월 동안의 온전한 자유시간은 부러워 할 만 하다. 친구들마다 이 소중한 방학을 즐기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연구에 뜻이 있는 친구들은 학교에서 연구활동에 매진한다. 동아리 활동이 방학에 집중되어 있는 친구들은 합숙훈련에 참여하며 동아리 활동에 최선을 다한다. 어떤 친구들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며 조용히 보내기도 한다. 나는 수많은 선택지 중에 여행을 선택했다. 아마도 3학년 원내생을 시작하면 이렇다 할 여름방학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없이 좁아진 내 시야에 큰 세상을 보여줘야 할 타이밍이었다. 고작 시험 한 과목, 한 문제에 좁아져 있는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야 했다. 여행은 치의학대학원 동기들과 함께 떠났다. 시험기간에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기들과 방학을 하자마자 여행이라니,
한 2주 전 토요일, 여느 토요일과 다름없이 봉사활동을 하러 종로로 향했다. 특별할 것 없는 토요일이었고 봉사활동이었다. 화이트보드에 적혀 있는 귀여운 문구를 보기 전까진 말이다. 화이트보드에는 영락없는 어린 아이의 삐뚤빼뚤한 글씨로 ‘미소를 조금 지어주세요☺’ 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내 추측이건데, 종종 치과위생사 선생님을 따라오는 8살배기 아드님이 써 놓은 듯 했다. 미소를 조금 지어주세요. 써진 모양새는 너무 귀여운 아이 글씨체였지만, 날카로운 펀치를 맞은 느낌이었다. 어린 아이에서 본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회색빛이었으면 미소를 지어 달라는 말을 했을까? 예상치 못한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어린 아이의 순수한 글씨체가 괜히 그 문장에 힘을 더했다. 공격을 받고 되돌이켜보니 미소를 잃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웃음이 많은 현장이기는 하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치과에서 미소를 잃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생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소를 조금 지어주세요’라는 그 한마디는 요즘의 일상 전체를 돌이켜보게 만들었다. 생각해보니 요즘 ‘피곤하다’, ‘짜증난다’ 라는 말을 쉴 새 없이 했던 것 같다. 핑계라고 둘러대보면, 학교가 대면으로 거의 전
심심할때면, 그리고 원고를 작성해야 될 때가 다가오면 괜히 치의신보 칼럼을 찾아보게 된다. 아직 학생, 그것도 고작 본과 2학년일 뿐인 내가, 선생님들과 교수님들 사이에서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말이다. 칼럼을 읽으며 선생님들의 글을 읽으며 다양한 지식을 접하기도 하고, 치과의사가 되어 사회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을 미리 간접체험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정보도 많이 얻을 수 있으니 유익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칼럼을 넘기다 유독 반가운 분의 글을 만났다. 지금 실제로 수업을 듣고 있는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예방치학교실의 조현재 교수님의 ‘미라클 모닝 실패기’ 라는 글이다. 아마 교수님은 날 모르시겠지만, 얼마 전 실습 시간에 직접 뵀을 땐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릴 뻔했다! 하여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교수님의 미라클 모닝 실패기는 공감되는 나머지 고개를 끄덕여가며 읽었다. 미라클 모닝은 나 또한 관심이 많은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미라클 모닝은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일종의 자기계발 캠페인이다. 일과가 시작되기 전,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서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형적인 올빼미형 인간인 나
지난 2년동안 나는 ‘함께아시아’라는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해왔다. 함께아시아는 외국인근로자에게 무료로 치과진료를 지원하는 봉사단체다. 치의학대학원 학생이 아니었을 때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제는 깊은 인연이 되어 나름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치의신보에 칼럼을 올리게 된 계기 또한 함께아시아 때문이니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봉사라는건 생각할수록 복잡하다. ‘봉사라는건 뭘까?’ 라는 질문부터, ‘봉사활동을 하면 착한 사람인가?’, ‘치과의사라면 봉사의 의무가 있나?’라는 질문까지, 생각할수록 추상적이고 복잡할 뿐이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봉사를 “해주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될 때도 있다. 이 곳을 찾아오시는 환자 분들을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마음이 들 때면 죄책감이 들면서도 솔직히 종종 그런 내 모습에 취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때에는 누구를 위한 봉사활동인지 헷갈린다. 나를 위해서, 내가 기분 좋자고 하는 활동 같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이따금은 이런 생각도 든다. 봉사를 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일까? 나는 매주 봉사활동을 하니까, 적어도 다른사람보단 착한 사람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봉사
얼마 전, 가까운 친구 한명이 ‘바디프로필’이란 것을 찍었다. 바디프로필의 열풍이 분지도 벌써 몇 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 바디프로필을 찍는 친구를 봤을 땐 솔직히 ‘저렇게 헐벗고 찍는다고?!’라며 놀랐었지만, 이제는 안 찍는 사람이 없다. 말그대로 개인의 profile 중 하나가 되어버린 듯 하다. 언젠가 분명 자기 PR이라는 단어가 큰 유행이었던 적이 있다. 생각난 김에 단어를 찾아보니, Public Relation의 약자라고 한다. ‘Public relation을 위한 자신의 홍보’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듯 하다. 어느 순간 겸손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스스로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그놈의 ‘겸손’이 문제라며, 자신감 넘치게 자신을 ‘홍보’하는 서구의 방식이 더 멋지다고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자기 PR이라는 단어가 예전처럼 많이 들리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처럼 자기 PR이라는 단어가 피부로 와닿은 적도 없었다. 지금은 자기 PR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인스타그램을 눌러보면 제일 위에 내 프로필이 뜬다. 내 직업은 뭔지, 어느 학교를 다니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등등
얼마 전 유튜브에서 재미있는 채널을 만났습니다. 요즘 TV 프로그램에서 종종 뵐 수 있는 유현준 교수님의 건축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채널이었습니다. 흥미로운 마음으로 영상 하나를 틀었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업로드 된 동영상을 죄다 보았습니다. ‘공간’이라는 주제를 생각해본 적 조차 없었기에 오히려 흥미로웠던 걸까요? 갑작스럽게 ‘공간’이라는 주제에 매력에 홀려서는 저의 공간을 생각해봤습니다. 사실 몰아치는 시험과 실습들을 핑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본과 학생이기에… 공간이란 무엇인지 생각할 만큼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갖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항상 존재하는 그 곳이 공간인데 특별함을 느끼지도 못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간과 제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유현준 교수님의 말씀에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생활하고 있는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이라는 공간은 조금 독특합니다. 다른 의과대학 혹은 치과대학이 그렇듯이 병원과 함께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실습때문에 병원과 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특이점이, 유현준 교수님의 건축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것보다도 큰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
벌써 코로나가 시작된 지 2년에 가까워졌다. ‘여름에는 괜찮아지겠지?’ 라던 작년 봄의 걱정이 무색하게 코로나는 여전히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다. 코로나가 누구의 예상보다도 장기화되면서 사회도 처음엔 허둥대는 듯 하더니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을 해나가고 있는 듯 보인다. 특히 나는 학생으로서 코로나에 적응하고 있다. 처음 코로나가 세상을 들썩이게 했던 20년 봄에 비대면 졸업식을 하고, 21년 봄부터는 비대면으로 학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2학기가 시작된 지금, 또 다시 비대면으로 교수님들을 만나 뵙게 되었다. 오랜만의 비대면 강의를 듣다 보니 새삼 여러 생각이 든다. ‘이게 맞나?’ 싶으면서도 묘한 편안함도 들고…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치의학대학원에서도 비대면으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느냐고, 수업이 되기는 하냐고. 그래서 학생으로서 코로나에 어떻게 대처하고 적응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적어볼까 한다. 먼저 강의는 비대면으로 진행하기에 그나마 제일 수월한 부분이다. 줌이나 녹화강의를 통해 진행된다. 좋은 것이 있다면 단연 편리함이다. 9시 수업이지만 8시 50분에 일어나는 게으름이 허용될 뿐더러, 부리나케 윗옷만 그럴듯하게 갈아입지만 바지는 잠옷이어도 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