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의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의아해 할 것 같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치과의사의 위상도 빠르게 달라지는 게 느껴진다. 십 수 년 전쯤 한창 임플란트 시술이 많아지면서 환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치과의료 서비스가 업그레이드 되어 치과의사의 자부심이 한층 더 고조되었다. 고급시술로 환자와 의사 모두가 만족하는 사회를 꿈꾸지만 의사들끼리의 과잉경쟁으로 인한 부작용도 생기게 되었다. 서로에게 피해가 되면서도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때문에 정당한 수가도 받지 못하면서 치과의사끼리의 집안싸움으로 전락해버리는 부끄러운 일도 발생했다. 치과의료 서비스가 박리다매식 영업으로 취급 받아서 될 일인가? 정당한 의료기술료와 지적재산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더욱이 재료비 대비 치료비를 산정하는 언론의 불합리한 잣대에 더해 보험수가보다 낮은 임플란트 치료비 광고와 교묘한 과잉광고나 불법광고로 눈살 찌푸리게 하는 행위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를 불신케 하는 슬픈 현실이다. 기본과 원칙을 지키는 게 본인과 후배치과의사들을 위한 일일 텐데도 말이다. 박리다매식 낮은 수가로 진료만 하다가 건강을 해치게 되면 얼마나 어리석은
“저는 제가 배운대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다른 과에서 실습을 할 때 잘못한다는 평가를 듣지 않았는데, 교수님 과에서 처음으로 지적을 받네요.” “학생 지도교수가 누구세요?”라고 묻자, “OOO교수님이신데요.”라고 대답한다. 이상은 작년에 필자가 근무하는 치과(예방치과)에 학생 실습을 나온 치위생과 실습생과의 대화 내용이다. 실습생의 Suction tip이 계속 진료 중의 필자 시야를 가린다. Suction의 기본 원칙인 ‘시야 확보’의 원칙을 저버린 것 같아 한마디 주의를 주려 하자, 위와 같은 대답을 들은 것이다. 개원 중인 후배들이 신입 치과위생사들을 채용하여 이런저런 불만을 이야기할 때, 필자가 이전에 개업했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는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옛날 이야기(‘라떼 이야기’)를 하기도 두렵다. 과거에는 필자가 직접 지도해 주는 것을 고마워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자신의 모교에 혹시 ‘누’가 될지 몰라 심지어 눈물을 보이는 학생도 있어, 대학의 담당 지도교수에게 ‘이런 일로 인해 귀교에서 보내준 학생을 마음 아프게 했다’는 등의 개인적인 이메일을 보낸 기억도 있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라떼 이야기’가 되어버
근래에 주거 안정 문제 및 이와 관련한 주택 시장 정책들이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부 지역의 극심한 부동산 가격 상승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하는 듯하다. 심지어 값이 많이 오른 부동산의 소유주 조차도 원치 않는 결과이며 이에 즐거워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필자는 오늘 부동산 가격이나 주거 안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제목에서 말하는 부가가치의 ‘가치’와 함께 그 부가가치가 우리의 삶의 질이나 행복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부가가치는 원자재에 노동이나 연료 등의 투여로 추가로 부여된 가치를 의미하며 3차 산업시대에 그 가치가 극대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4차 산업시대에는 무형의 데이터들도 산업의 소재가 되고 그 데이터의 조합이나 사용 방법에 따라 그 부가가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증가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여러 분야에서 조금씩 느끼고 있다. 우리나라는 과거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급격한 발전을 하였고, 그 바탕에 교육열 또한 큰 몫을 하였다. 순수 교육은 한명 한명의 성숙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데 필수적인 과정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육에는 사교육이라는 특별한 과정이
온라인이 삶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높아졌다. 특히, 온라인을 삶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세대를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 generation)라고 하며, 1980년대 초반 출생부터 2000년대 초반 출생한 사람 까지를 아우른다. 이 세대의 규정 폭은 넓다. 이전의 세대 규정은 세대가 활동하는 범주에 따라 10년 단위로 명확히 이루어진 편이다. 한 세대가 사회에 진입해서 역할하고 있을 때 다음 세대는 학생으로, 그 전 세대는 가정의 주체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인생 흐름과 시간 순서에 따라 서로 나뉘어져, 각 세대 만의 ‘또래’ 문화를 만들어갔다. 그러나 온라인을 기반한 현재의 삶의 패턴은 세대 간의 격차를 줄였고, 여러 세대에서 정보를 ‘공유’하게끔 한다. 사람들은 30년 전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세상과 상호작용한다. 주변을 경험하고, 기억하고, 인지하고, 대응하는 방식이 다르다. 타인에게 전화를 걸 때 본인의 기억력이나 두꺼운 전화번호부에 의존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으며, 지도나 도로교통표지판을 보기보다는 네비게이션에 의지해 목적지에 도착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인터넷이나 핸드폰 내 검색을 하면 간편하게 정보를 얻을
단순 의사소통 목적으로 사용하던 어휘를 다시금 곱씹어 보면, 그 어휘가 낯설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이번 경우는 모교가 그랬다. 나에게 ‘모교가 어디인가요’라고 물어보면, 나는 떳떳하게 강릉대학교(2009년 변경된 교명은 강릉원주대학교)라고 대답한다. 전엔 자랑스럽기까지 했는데, 그땐 내가 자랑스러울 게 별로 없던 시절이었고, 이젠 자랑이 미덕이 아님을 안다. 근데 모교란 무엇인가? 우리말 사전엔 자신이 졸업한 학교라 설명되어 있고, 한자문화권인 중국 역시 母校 [mǔxiào]란 어휘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영어로는 라틴어 어원의 alma mater라 하며, 라틴어에선 과거에 다녔던 학교를 의미하지만, 미국에서는 졸업한 학교를 의미한다. 동문회(同門會)를 영어로 alumni association이라 하는데, alumni는 졸업생을 뜻한다. 이로써 우리말 모교가 자신이 졸업한 학교란 의미는 알겠다. 근데 내가 졸업한 학교인데 왜 母를 써서 모교라 했을까. 自校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서는 모교와 자교는 동의어로 자기가 다니거나 졸업한 학교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나의 자교는 강릉대학교 치과대학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혼란도 존재할 것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님께서는 “당신은 어린 시절 어렵게 자라 표정이 너무 딱딱해 직장 생활(민원 담당 공무원)을 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으셨단다. 그래서 부드러운 인상을 만들기 위해 거울을 보며 웃는 표정을 연습하셨고 그 후로는 민원인에게 인상이 좋다며 칭찬을 받았다”고 하셨다. 아들인 내 얼굴도 표정이 없어 사회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것 같으니 당신처럼 거울을 보고 연습을 하라고 하신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주위에 절친한 친구들이 있어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인상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를 처음 떠나 서울에서 재수를 하게 되었다. 같은 반에 중학교 친구가 있어 초기 학원 생활을 하는 데는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6월 월례고사를 보고 친구가 다른 반으로 이동을 하였다. 친구가 떠난 후 붙임성이 없고, 표정이 없는 나는 외톨이가 되어갔다. 아침에 학원에 가고 저녁에 하숙집에 들어가는 일상생활은 감정을 무디게 만들었다. 문득 아버님 말씀이 생각나서 버스 안의 거울을 보며 다양한 표정들을 지어 보았다. 가족과 살며 즐거웠던 때, 친구들과 즐거웠던 순간을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항상 긍정적인 표정을 지으려
2020년 6월 7일. 사랑하는 딸 민희가 사위 김병관을 만나 결혼하는 날이다. 작년 겨울에 날을 잡아 놓았는데, 코로나로 인하여 많이 불안하다. 1월 중순에 상견례를 할 때만 하여도 사돈댁인 대구에 코로나가 발생하지 않아서 즐겁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1주일 뒤부터 대구에서 계속 확진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3월에 결혼식을 하려 했던 필자의 고교 친구 2명의 자녀는 결혼식을 연기하였다. 5월에는 구로 콜센터, 이태원 클럽 발 코로나 환자가 너무 많이 늘었다. 코로나가 심상치 않다. 결혼식 전날에는 결혼식장 근처에 있는 백화점에 확진자가 다녀가서 백화점이 폐쇄되기까지 했다. 수백 명의 하객이 모여 결혼식을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과연 괜찮을까? 심하게 고민이 되었던지 필자의 몸무게가 5㎏이나 줄었다. 3년 전 아들이 결혼할 때 하객이 너무 많이 오셔서 전부 다 수용을 할 수가 없어서 너무나 죄송한 경험이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결혼식을 연락하기도 안 하기도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예식홀이 좀 작아서 고민하던 중 4월에 초등, 고등 친구들이 예식장에서 10분 떨어진 가락회센터에서 편안하게 친구들끼리 술도 마실 수 있는 200명의 피로연 자리를 제안하
우리는 종종 화를 낸다. 얽혀 살다 보면 어찌 기분 좋은 일만 있겠는가 하며, 화를 가라앉혀보려 노력하거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려보거나, 그도 쉽지 않으면 화가 난 일 자체를 잊어버리려 다른 일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화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반응은 분명 화가 난다는 것이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절대 이로울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리라. ‘화가 날 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라는 옛 말씀도 살아볼수록 참으로 귀중한 교훈인지라 필자도 화가 날 땐 이 말씀을 꼭 기억하려 늘 노력하는데 정작 화가 날 땐 도통 기억이 안 난다. 베트남의 승려인 평화주의자 틱낫한은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주제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평화로운 마음가짐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화를 내는 것이니 당연히 그의 저술들에는 ‘화’에 대해 여러 면에서 깊이 생각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그가 쓴 책들 중에는 아예 ‘화’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그 책에서 화를 자주 내는 것이 왜 좋지 않은 지를 ‘집 지하실에 사는 사나운 괴물’의 예를 들어 흥미롭게 충고한다. 요컨대 화가 나고, 화를 낸다는 건 마치 우리의 마음이라는 집 지하실에서 ‘화’라는 괴물이 문을 열고 올라 나와서 마구 날뛰는 것과 같은
온통 세상이 코로나 이야기이다.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으로 보아 어쩔 수 없지만 여러 기관에서 열리는 토론회(대부분 비대면으로 개최된다)의 주제도 교육학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육, 경제학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경제, 사회학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사회 문제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노말(뉴노말)을 이야기하고 걱정하고 흥분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새로운 워딩을 이야기하지만 그 내용은 구체화 되어 있지 않고 이 문제가 지나가고 나면 우리는 어떤 실제 모습을 하고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생물학 분야와 제약 분야에 최고의 과학과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되길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지만 아직 이 분야에서의 우리나라 기술력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최근 국가기관과 산업계의 연구력이 코로나 이슈에 집중되는 현상을 볼 수 있지만 이 상황이 지나가고 또 다른 새로운 이슈가 나타나면 우리는 어떤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1년 전만 하더라도 미세먼지 문제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였고 국가기관과 산업계의 연구력이 미세먼지 문제에 집중되는 현상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최근 유럽 학회에서 개최하는 비대면 웹
세상이 혼란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혼란스러움이 어제오늘의 일인가? 아니다, 몇 년 전부터도 아니고, 몇십 년 전부터도 아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혼란하지 않았던 날은 하루도 없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뇌는 우리 몸이 소비하고 있는 에너지의 70% 이상인가를 소비하고 있는 구조물이다. 그래서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제거하고 있는데, 과거가 지금보다 나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뇌가 과거 고통의 기억을 지워 버리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늘 혼란스러웠고, 절망적일 때가 많았지만, 발전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마음 속에 늘 긍정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에게는 항상 발전된 미래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포스트 코로나에 대한 이야기들이 유튜브 등의 매체에서 많이 거론되고 있는 지금이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AI 예측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비대면의 비즈니스가 발전할 것이고, 혼밥, 혼술, 방콕을 겨냥한 비즈니스가 앞으로 유리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인 ‘안전’+’게으름’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비즈니스의 대세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매일 반복되는 뉴스 속의 ‘코로나19 오늘의 발생 현황’은 어느덧 무덤덤한 일상 중의 하나로 되어 버렸습니다. 초기 코로나 양성 확진자가 발표되었을 당시 확진자의 모든 동선을 비롯하여 심하다 할 만큼의 과민 반응을 보였다면 처음과 달리 이제는 주변서 발생한 ‘코로나 확진자’에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합니다. 오히려 경기가 어렵다는 점이나 병원 내원 환자수가 떨어지고 있는 현실적인 경제 고민 등이 코로나19와 관련되어 나타났을 때 비로소 다시 코로나19를 생각하게 됩니다. 정부에서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국민 행동 수칙을 발표하였습니다. 과거와 달리 주변의 모든 행인이 얼굴을 가리고 마스크로 무장하고 다니는 것이 이제는 익숙한 거리 풍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코로나19는 우리의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라 합니다. 마치 온갖 부끄러움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치고 앞으로는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고 얼굴에서 마스크를 벗고 가리지 않을 때를 준비 시킵니다. 국민 행동 수칙 중 또 다른 하나는 자주 물과 비누로 손을 꼼꼼하게 씻으라 강조합니다. 마치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이제 그만 ‘손을 씻으라’고 강권하는 듯하게 들리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