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대학 예과 1학년 때이니 지금으로부터 족히 30년은 다 된 옛날 이야기이다. 예과 1학년생으로 처음으로 진료 봉사를 갔다. 가운을 입었으나 아는 것은 하나도 없는 예과생으로 주로 기구소독이나 안내 등 잡다한 일을 할 때인데 본과 선배가 석션통의 피빠케스(그당시엔 그 유리병을 그렇게 불렀다)를 버리고 오란다. 여름이라 선풍기만 몇 대 돌리는 초등학교 교실 임시 진료소에서 타액과 혈액이 뒤엉켜 부패하고 있는 그 피빠케스 유리병을 그것도 시골 초등학교 재래식 화장실에 버리고 오라 하니 안 할 수는 없고, 내 소변도 손에 닿으면 몇 번을 씻는 성격인데 이걸 억지로 버리고 오니, 30도가 넘는 폭염에 비위가 상해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마져도 깨끗이 닦지 않았다고 또 한소리를 들었다. 그때 참 내가 왜 이걸 여기서 하고 있나 하면서도 말도 못하고 부지런히 비우고 닦던 기억이 난다. 어머님이 구순이 넘으신지 두 해가 더 지나셨다. 8년 전 건강검진 도중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경과 진단을 받고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으셨다. 그때의 그 낙담과 황망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앞으로의 걱정과 안타까움에 치매 관련 책도 사서 읽고, 의과 선배에게 조언
저는 파라오랜드 이집트에서 온 치과의사 하비바입니다. 2017년을 끝으로 치과대학 6년을 마치고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시아에 관심이 많은 집에서 자랐습니다. 저희 언니는 중국에 관심이 많았고 오빠는 일본에 관심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아시아에 속한 나라들에 대해 자주 접했지만 저는 중국과 일본보다는 한국어에 더 끌렸습니다. 한국어를 처음 듣는 순간 저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한국어는 왠지 모르게 저에게 친숙했습니다. 그래서 졸업 후에 한국어의 매력을 더 느끼고 싶어서 한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시점부터 제 가족들, 현지 친구들, 주변 사람들은 저에게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왜 굳이 한국어를 배우느냐, 왜 한국에 관심이 많느냐”가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입니다. 한국에서도 거의 매일 듣는 질문입니다. 한국에서 사람들이 저에게 많은 관심과 호기심에 질문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즐거운 마음으로 흔쾌히 대답해줍니다. 제 가족은 저를 지지를 해주었지만, 제 친구와 동료들은 제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엉뚱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떤 혜택을 받을지가 아닌, 제가
지적장애나 신체적 장애가 심한 분들을 환자로 만나본적이 있으신가요? 근무하시는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선생님들은 자주 만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신체적 장애가 심한 분들은 스스로 집밖을 나올 수 없는 경우가 많고 지적장애가 심한 분들은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동이 가능한 중증장애인들은 경제적 이유나 환영받지 못했던 경험으로 인해 치과 방문 자체를 꺼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증장애인들을 치료하기 위해 입을 들여다보면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남아 있는 치아가 거의 없는데 어떻게 밥을 먹고 있을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하악으로 인해 교합도 제대로 되지 않고 심하게 마모가 된 치아는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스스로 이를 닦지도 못하고 가족들의 케어도 제한적인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없을까? 지적장애로 칫솔질 자체에 거부감이 있으니 치아 상태도 좋지 않고 치료 협조도 역시 기대할 수 없는데 뭘 해줘야 할까? 개인적으로 이런 환자들에게 선의를 베풀고 싶어 하는 선생님들도 계시겠지만, 치과의사 혼자서 개인치과의원에서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중증장애인들을 위해 여러 선생님들의 뜻을 모아 행동하는 의사회는 2010년 나
나는 예나 지금이나 로또 사는걸 즐겨하지 않는다. 어린 학창시절에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집안 사정이 그렇게 가난한 형편은 아니었는데도… 당시에 부모님은 화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중학교 1학년 때 엄마와 함께 치과치료를 받으러 갔는데 환자가 엄청 많았다. 그 때 생각에 치과의사가 돈을 많이 벌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미술대학 대신에 치과대학을 갔다. 치과대학에 다니면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치과의사 국가고시에 무난히 합격하였다. 치과의사가 되면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철과 수련 후에 군의관을 마치고, 잠시 개원을 하면서 보철과 박사학위 과정을 거친 후 모교의 치과대학에 교수로 들어갔다. 기회가 되어 독일의 Freiburg 치과대학에 방문교수로 다녀오기도 했다. 그 후 개인적인 사정으로 공직을 떠나서 다시 개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최근에는 치과의사가 된 지 30여 년이 넘은 나이에 치과보철과 전문의 시험에 응시해서 전문의가 되었다. 그러니까 1986년 치과의사가 된 이후로, 치의학박사, 치과대학 교수, 해외 방문교수, 거기에 더불어 치과보철과 전문의, 개원의까지 치과의사로서 해볼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볼 정도로
오후부터 내린 장맛비는 어두워지고 나서는 장대비로 바뀐다. 이따금 번개가 치곤 한다. 천둥소리도 그 뒤를 따르고. 밤 10시 즈음.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이 시간에 뭔 전화다냐, 비상인가?” 아빠는 혼잣말 후, 전화기를 드신다. “네. 여보세요.” “수북하고 월산에서?” “알았어” 전화를 끊고 아빠는 잠옷을 벗고, 곤색의 작업복으로 갈아입으신다. “나가 봐야겄네” ‘이렇게 비가 온디, 나갈라고요.?’ “그럼 나가봐야지. 비상인디, 수북하고 월산이래” ‘아이고 장마 때만 되면 난리네요.’ “벼락만 안치믄 되는데… 벼락이 칭께, 고장이 잘 나부네” “우리 밥줄인디 열심히 고쳐줘야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전화랑 전기가 끊기면 불편하잖는가? “ 준비하는 5분도 안 된 사이, 밖에는 어느새 빨간색 우체국 공사 차량이 와서 대기 중이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셔요.’ ‘아빠 잘 다녀오세요.’ 우리 오남매는 아빠에게 배웅 인사를 하고, 다들 각자의 방, 이부자리로 들어간다. 나는 엄마랑 큰방에서 눕는다. ‘뭔 일 없겠지?’ ‘아빠는 뭐든 잘하시잖아! 만물박사! 아무 일도 없으실 거야!’ 나는 호기롭게 아빠를 자랑삼아 위안을 삼고 어느새 꿈나라로 간다. 비는
기타 가방에서 기타 줄을 꺼내는데 같이 들어있던 보라색 기타 피크가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분명 떨어지는 곳을 봤는데, 어딨는지 안 보인다. 주변 물품들을 이리저리 훑어봐도 그 피크는 보이지 않는다. 가구 바닥 밑으로 들어갔나? 더 자세히 주변을 훑었다. 그래도 안 보인다. 그 작은 피크에 오기가 생긴다. 내가 분명히 봤는데… 그때 밖에서 나를 부른다. 바로 나가봐야 하는 데 쓸데없는 집착…피크를 찾고 그 부름에 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급해지니 그 피크는 더 안 보이는 것 같았다. 순간 중요한 것, 해야만 하는 일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밖으로 나갔다. 나를 필요로 하는 그 일을 끝내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니 그렇게 안 보이던 그 보라색 피크가 작은 실내용 전기히터 받침 위에 놓여 있다. 너무 잘 보였다. 아까는 왜 그리 안 보였을까. 바로 눈앞에 있었구나. … 세 가지 말씀이 떠올랐다. ‘중요한(소중한) 것을 선택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된다.’ ‘마음이 급해지면 시야가 좁아진다.’ - 문제를 만나면 잠시 한 발짝 물러나 다시 그 문제를 밖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보석 같은 진리도, 그리고 내가 아껴야 할 사람들도 바로 내 가까이에 있다.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도시 한복판, 빽빽한 빌딩 사이에서 한숨을 쉬어본다. 두툼한 마스크 때문인지 무거운 마음 때문인지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5년 전 영등포에 개설되어 중증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치과진료를 하고 있는 스마일재단의 장애인치과센터 ‘더스마일치과’가 이전을 해야 한다. 감사하게도 한 장애인단체에서 무상으로 임대를 하였던 공간이었는데 슬프게도 갑작스럽게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개원을 준비하는 보통의 치과의사들이라면 지역 인구와 유동성, 홍보 효과 등을 우선적으로 확인하겠지만 나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장애인치과를 개설하기 위해 많은 고려사항이 있지만 그중 가장 난감한 것은 장애인 편의시설이다. 먼저 계단 혹은 턱을 지나야 진입이 되는 건물은 제외다. 엘리베이터가 없거나 전동휠체어가 진입하지 못하는 소형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는 건물도 탈락이다. 주차가 공간이 없고, 진입로가 좁아 휠체어가 지나가기 어려운 곳들도 곤란하다. 장애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대중교통인 지하철역에서 조금 멀더라도 도보가 가능해야 한다. 휠체어 장애인이 진입할 수 있는 구조와 규모를 가진 화장실을 가지고 있는 건물도 매우 드물다. 간혹 장애인 전용 화장실이 있는 건물도 현장
많은 사진가들이 자신이 기록하고 싶은 피조물들을 현실 생활로 부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사진을 처음 시작할 때는 누구나 최대한 많이 담으려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그것을 왜 담았는지 그 의미조차 잊어버리고 구경거리들만 남기곤 한다. 이차원 공간에 담아 놓은 구경거리들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들은 나에게 과거의 나로부터 미래의 참나를 향한 통로가 될 수 있다. ‘도대체 나는 왜 사진 작업을 하는가?’ 이것은 수없이 많이 생각해 보았으나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던 화두였다. 나는 치의학 분야의 구강악안면외과 전문의로서, 지난 수십 년간 국내외 다양한 학술모임에서 결손된 조직들의 치유 반응 기전, 수복재료 및 치료방법들을 발표하며 임상에 임해 왔다. 그러다 보니 내가 촬영한 사진 작품들을 통해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도 치유해주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참가해 보았던 사진치유 워크숍들은 거의 모두 촬영의 결과물보다는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로 치료를 하고 있어 원래 내 기대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던 중 최근에 갑자기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해온 사진 작업들에 의해서 남들이 치유되기 이전에, 사진 작업을 하면서 나 자신이 치유되
유년 시절, 여느 아이들처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우연히 피아노 학원을 방문한 것이 나의 피아노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와 80년대의 경제발전과 더불어 클래식 음악, 특히 피아노 교육이 대중화되었다. 1980년대는 동네마다 피아노 학원이 생겨났던 시절이었다. 피아노는 클래식 악기 중 음량이 큰 편이고, 방음에 대한 개념이 약했던 시절이었기에 피아노 학원 근처는 피아노 선율이 크게 울려 퍼졌다. 특히, 오가다 들은 쇼팽의 피아노 선율은 참 아름다웠다. 은연중 피아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린 나는 클래식 음악과 첫 조우를 했다. 집에서도 한 번씩 연습하라고 할아버지가 사 주신 흰색 업라이트 피아노는 나와 우리 가족의 구심점이었다. 거실 한 켠에 자리 잡은 피아노의 덩치가 크기도 했지만, 가족을 한자리에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동생과 옆에 나란히 앉아서 젓가락 행진곡을 신나게 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피아노곡의 변주도 시도해보았고, 작곡도 해 본 기억이 난다. 운 좋게도 학창시절 내내 학급의 반주자로 역할을 할 수 있었는데, 늘 음악시간 전에는 어떻게 하면 더 잘 반주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었다. 또, 피아
동심은 어린아이의 마음, 순진한 마음을 뜻한다. 어린아이의 마음이 나쁜 뜻으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순진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세상 물정에 어두워 어수룩함’이라는 부정적인 뜻이 있다. 그렇다면, 세상 물정에 관심이 없는 아이의 마음이 동심인가? 이런 관념의 틀 안에서는 세상을 빨리 알아가는 요즘 세대의 아이들은 동심이 조기에 없어진다고 봐야 할까? 2016년 3월에 태어난 첫째 딸은 이제 제법 대화가 통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피아제의 인지발달론의 단계로 보자면, 직관적·상징적 사고가 가능한 전조작기(preoperational stage)에 해당되어 언어를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이해하며 논리적 추론이 가능한 단계가 되었다. 행복, 무서움, 사랑, 죽음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말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고, 가정에 충실할 수 있는 군의관 시절의 아빠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느 초보 아빠처럼 다소 수동적으로 놀고 동화책 읽어 주기만 하다가, 아이와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의외의 것이었다. 신데렐라 놀이를 하다가 문득 “아빠 죽는 게 뭐야?”는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헤어져서 다시 볼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거야”라고
오타쿠. 일본어로 お宅(おたく)라고 쓴다. 외출은 하지 않고 집(宅)에만 틀어박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는 젊은이를 부르는 신조어였다. 일본어의 높임말 접두사 ‘오(お)’자가 붙어 있지만 가상세계에 푹 빠져서 생활하는 외톨이를 비하하는 호칭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오타쿠의 의미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집에만 박혀 있는 외톨이’를 넘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 취미에 몰두하여 일가를 이룬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기성세대는 이해할 수도 없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오타쿠들의 세계가 열리고 있다. 아니, 이미 열려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폰과 같은 정보통신문명의 기기들의 출현으로 급격하게 증식하고 있는 가상의 세계, 어마어마한 의미의 세계다. 그리고 오타쿠적 성향의 인재들이 이를 주도한다. 오타쿠. 가상세계를 개척하고 선도하는 전위병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유사 이래 인류는 혈통으로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그 잣대를 혈통에서 금력으로 전환시킨 일대사건이 발생하였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이었다. 유럽인의 관점에서는 ‘신대륙의 발견’이라고 불렀다. 아메리카 대륙 발견의 소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