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적 주말 행사가 있었다. 더운 여름철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주 빠뜨리지 않고 하는 행사는, 나는 아버지 손에 들리고 여동생은 엄마 손을 잡고 늦은 토요일 오후쯤 집을 나서는 것으로 시작했다. 열어 놓은 장독에서 새어 나오는 조선간장 냄새 같은 익숙한 살림살이의 체취로 채워진 골목을 지나면서 열린 대문으로 이웃집 마당도 힐끔 훔쳐보다 보면 골목이 끝나고 큰 공터가 나왔다. 시내버스가 다니는 아스팔트 도로 옆 인도라 말하기에도 애매한 비포장 길을 한참 따라가다 보면 다시 고소한 참기름 냄새로 시작해서 생선 비린내같은 익숙한 냄새가 느껴지면 어느새 시장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우리를 발견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재래시장에 가면 또 다른 골목 세상이 펼쳐져 있다. 우리가 생활하던 골목길이 좁은 골목을 기준으로 좌우로 비슷한 모양과 색깔의 철문들을 가진 그만그만한 집들이 마주 보고 있었다면 시장의 골목은 반찬가게, 옷집, 이불집, 그릇가게, 신발가게, 철물점에 국밥집, 분식집 같은 식당가까지 갖추고 있는 일층 평면의 골목 미로로 이루어진 만물 백화점이었다. 안내 표지판도 없는 미로에서 아이쇼핑을 실컷하다가 익숙한 듯 길을 잃지 않고 시장 골목의 끝즈음에 다다르
작년 2월 27일 월요일이었습니다. 큰아이 방학을 맞아 싱가포르에 가 있던 그날 새벽, 갑자기 전화가 울렸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아빠가 이상하니 너라도 먼저 빨리 돌아와야 할 것 같다” 이틀 전인 토요일 만해도 아버지와 함께 진료했던 저는 다급한 마음으로 비행기 표를 끊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시간이 어찌나 초조하던지, 정말 많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아버지께 못 되거나 모진 아들은 아니었는지, 그동안 나도 모르게 불효를 한 건 아닌지…’ 이제는 아버지께 사과도 용서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마음이 무겁고 무서웠습니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게 큰 기둥이셨던 아버지께서는 떠나셨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아버지 장례를 치르면서 잘 알지 못하는 여러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 아버지께 차분히 온전하게 마음을 내드리지 못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잠깐씩 시간이 날 때마다 아버지를 되새겨 보려고 애썼습니다. 한없이 슬프다가도 한편으로는 또 아버지께 문제가 생기면 내가 너무 힘들어할 것을 아시기에 내가 자리에 없을 때 그렇게 되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치의학을 공부하다 보면 다른 인체 부위와 구별되는 독특한 점들이 학문을 더 흥미롭게 합니다. 저는 이전에 생명공학을 전공하며 동, 식물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분자나 시스템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과정을 많이 접해왔습니다. 치의학 분야에도 자연의 지혜를 적용할 수 있는 재미있는 과제들이 많다고 느꼈고, 이러한 열정은 저를 치과대학으로 이끌어 현재 치의학도로서 연구를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가장 흥미로웠던 점들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치아 맹출의 비밀 인간의 치아는 영구치 맹출 이후 재생되지 않지만, 일부 동물들은 치아를 계속해서 교체하거나 성장시킵니다. 상어는 대표적인 예로, 손상된 치아를 치아판(dental lamina)의 지속적 활성화를 통해 새로운 치아로 대체합니다. 이러한 점을 사람의 치아에도 적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점이 부족한지 더 탐구해 본다면 치아의 재생에 큰 발전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쥐와 같은 설치류의 앞니는 지속해서 자라며, 귀여운 설치류를 떠올리면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음식을 갉아먹으며 마모를 통해 환경에 적응하도록 진화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악어는 잃어버린 치아를 새로 교체하는 능력이 있습
흑백요리사의 흥행으로 파인다이닝에 대한 관심이 늘었습니다. “every second counts”라는 구절로 유명한 “더 베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습니다. 시카고 파인다이닝을 배경으로 가족, 직원, 친구에 대해 매우 좁은 화각으로 파고든 작품이며 올해 골든글로브 3관왕을 수상한 수작 입니다. 저는 개원가의 원장으로서 이 작품을 즐기면서 보지는 못했습니다. 기존의 시스템을 지키고 싶어하는(변화를 싫어하는) 직원들, 능력은 있지만 선을 넘는(건방진) 후배 쉐프, 하루가 멀다하고 역류하는 화장실 변기, 낙후된 시설과 장비로 인한 고장들 그리고 화가 잔뜩 난 환자… 아니 손님들. “every second counts” 그럼에도, 레스토랑은 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루를 시작하십니까? 저는 병원 지하주차장에서 그 날의 환자 스케줄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일과의 스위치를 켭니다. 스케줄을 보다 보면, 병원 올라가기 싫은 날도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진행이 잘 안되는 환자가 스케줄에 보일 때, 직원들과의 사소한 마찰로 인사하기도 버거울 때, 한꺼번에 여러 고가 장비가 고장일 때, 환자가 많을 때, 환자가 적을 때… 사실, 굳이 특별한 일이 아니더라도 그냥 하루가
대내외적 경기 둔화로 요즘같이 심란할 때면 2017년 히말라야가 그리워진다. 추위를 피하느라 겉옷을 겹겹이 껴입고 침낭 속에는 보온물통 1L에 뜨거운 물까지 넣어서 발밑에 재워두었다. 칼바람만 막았을 뿐이지 추위 때문에 침낭 속에서 끙끙거리다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 한밤중 둔해진 몸뚱어리를 조심스레 일으킨다. 이곳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트레킹. 전 세계 트레커의 버킷리스트 1순위 장소이자 트레커의 성지이자 트레킹 천국이다. 이번 일정 중 제일 높은 고도 4130m에 위치한 ABC lodge. ABC lodge는 코앞에서 장엄한 일출을 볼 수 있기에 인기가 제일 좋은 곳이다. 여기에 도착하기 위해 하루에 6~7시간을 4일간 걸어왔다. 잠자는 다른 일행에 방해되지 않게 아내와 나는 침낭을 벗어나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었지만 약간의 삐그덕 소리는 어쩔 수 없다. 문을 여니 칠흑같이 깜깜한 밤, 그러나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이제껏 본 것 중 가장 많은 별들. 선명하고 눈부신, 형언할 수 없는 황홀한 감동이 느껴진다. 별들과 만년설의 조화. 거기에 구름이 지나갈 때마다 만년설이 보였다 안보였다 하고 모든 장
청주시 치과의사회에서는 올해 3월부터 매월 임상 세미나 ‘대가들의 임상레시피’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청주시 회원들에게 분야별 최고의 연자들의 강의를 제공하고, 비회원들에게는 회무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시작된 이 세미나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젊은 치과의사 선생님’들과의 교류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분이 동감하시겠지만 요즘 치과의사회 모임에서 젊은 원장님들을 찾아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치과대학을 졸업한 지 10년이 넘은 제가 아직도 치과의사회에선 막내라니 정말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젊은 원장님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이끌어내는 것이, 현재 회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치과대학 졸업 직후의 저를 생각해 봤을 때 그 시절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건, 바로 임상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임상은 현장에서 바로 적용이 어렵고, 봉직의로 근무하면서 개원에 필요한 술기들을 모두 습득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늘 세미나를 듣기 위해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서울을 다녀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적은 급여에 비싼 세미나를 계속 듣는 것도 굉장히 부담되기도 했고요. 아마 지금 젊은 선생님들도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대한여성치과의사회(이하 대여치)가 8월 17일 오스템임플란트 사옥에서 ‘멘토멘티 만남의 날’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는 전국 치과대학·치의학대학원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선배 여성 치과의사들의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이다. 사전에 문자로 등록할 때부터 두근거렸던 마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였다. 필자는 아침 일찍 강릉에서 택시타고, 기차타고, 지하철도 타며 마침내 행사가 열리는 어금니 형상의 오스템임플란트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방학임에도 많은 인원이 참석하여 행사장이 후끈하였다.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소중한 자리였다. 종강한 뒤로 보지 못했던 익숙한 얼굴들과 인사를 나눈 뒤, 학생기자석에 착석하였다. 다른 학교의 학생기자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행사가 시작되었다. 장소희 회장님을 필두로, 최규옥 오스템임플란트 회장님의 축사와 함께 행사가 개최되었다. 장소희 회장님은 후배 여성 치과의사들을 양성하고 지원하기 위한 행사의 취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행사에 참석한, 혹은 참석하지 않은 모든 후배의 앞날을 축사로 응원해 주었다. 각 치과대학 여동문회 회장님들의 격려사에 이어 대여치의 역사가 소개되었다. 1971년 창
“왜 이 일을 하세요?” 정말 자주 듣는 질문입니다. 치과의사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일차진료로서의 구강건강의 중요성을 외치는 일은 진료가 주된 치과의사와는 확연히 다른 삶이긴 합니다. “사회의 주류로서 어떻게 사회공헌을 하시고 싶으신가요?” 어제 특강후 나온 질문입니다. 주류라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에서 짧은 시간을 보내고 미국에서 여느 이민 1세대와 같이 가족이 모두 함께 일해야 하는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저는 등록금이 없어 휴학계를 내야 했던 날도 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등록금과 생활비를 모아야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막막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은 빛나는 순간들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간절했던 공부는 정말 달고, 재밌어서 밤새도록 교과서를 읽으며 지식을 갈망했던 열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제게 치과대학에 도전해보라고 말했습니다. 가난과 질병은 절대 공존하면 안된다고 곱씹은 20대로 인해 일수도 있고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의사의 길은 너무나 멋지게 보일 수도 있었겠습니다. 미국에서 치대로 들어가 공부하던 중 Paul Farmer 교수님을 만나, 사회의학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었습
뜨는 해를 먼저 만날 수 있는 동해안 작은 도시에 살고 있다 보니 가끔 이른 새벽에 눈이 떠지면 새해 첫날이 아니더라도 집 근처 바다에 가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곤 한다. 특별한 결심을 하거나 꿈을 품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그 행위만으로도 가슴 뭉클한 무엇인가가 있다. 사람마다 해가 떠오름을 보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지만 대개 희망이나 시작에 관한 것일 것이다. 지난 주말 대학 동기들과 졸업 35년과 환갑을 기념하는 1박 2일의 짧은 가을 여행을 다녀왔다. 가을이 내린 식물원을 걷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떠들었다. 숲속의 작은 음악회에서 들은 사철가의 가사는 가슴을 후벼 팠고 들을 만큼 익어야 들린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학창 시절 MT에서처럼 스물다섯 명 동기들이 좁은 숙소 방에 모여 간단한 다과를 앞에 두고 자신의 일상을 잔잔하게 이야기하던 밤에는 서로 살아온 과정이 달랐음에도 같은 지점, 비슷한 현실에 있음에 공감하기도 했다. 새벽 숲속 공기가 상쾌한 아침, 강원도의 투박한 아침을 들고 손영순 까리타스 수녀의 ‘죽음 앞에 선 인간’이라는 주제로 두 시간의 강연이 있었다. 잔잔한 우리 동기들의 성정을 믿고 한 번쯤은 멈춰 서서 죽음
1. 좋은 설명은 직관적이어야 하고 설명을 듣는 사람이 그 내용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니를 뽑고 실을 뽑으러 올 때쯤 “아직도 아파요.”라고 이야기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개 이런 상황에서는 대놓고 말하진 않아도 ‘니가 잘 못 뽑아서 내가 아픈 거 아냐?’라는 의심과 원망의 분위기가 미세하게 깔린다. 이럴 때는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한다. “사랑니를 뽑고 나면 입안에 상처가 남는데 이는 손톱크기의 살점이 떨어져 나간 상처와 비슷합니다. 손톱 정도의 상처가 생기면 낫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적어도 한 달은 아프고 불편할 거예요. 약을 먹어도 불편함이 남겠죠? 사랑니 크기가 손톱만 하고 뽑고 나면 뼈 안에 그만한 상처가 남으므로 한 달은 불편할 수 있고 진통제를 먹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2. 사랑니를 뽑고 주변 치아가 아프다는 것도 같은 방법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손톱만큼 살점이 떨어져 나가면 낫는 동안 주변에 살이 열이 나고 아프고 불편하듯이, 사랑니를 뽑고 나면 낫는 과정에서 주변 치아나 뼈 등이 아플 수 있어요.” 여기서 팁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부분에서는 좀 잔인하게 설명하면 좋다. 3. 사랑니 발치 후 신경손상
나는 21년간 치과계에 몸담으면서 수많은 변화를 목격해왔다. 가장 큰 변화는 아날로그 방식의 진료술식에서 디지털 진료술식으로의 변화, 종이차트에서 전자차트로와 변화 등 치과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에서의 기술적 발전은 치과계의 성장을 느끼게 했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바로 AI, 인공지능의 시대다. 지금 나는 AI 소프트웨어 회사를 다니며 마케팅 기획을 담당하고 있다. 치과계에서도 AI와 관련된 시장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치과는 항상 정밀함을 요구하는 분야다. 마치 건축처럼 무너지거나 고장난 치아를 재건하는 치과적 치료계획은 사람마다 다르고, 복잡하기 때문에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AI가 이 분야에 가져올 변화는 상상 그 이상이다. 이미 AI는 진단 보조 소프트웨어를 통해 여러 문제들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환자의 구강상태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내가 마케팅 기획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AI가 단순한 기술의 발전을 넘어서 치과계의 흐름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AI를 활용한 진단, 치료 계획 수립, 환자 맞춤형 솔루션 제공 등은 이미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