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단둘이 떠나는 여행 벌써 3개월이 지났다. 가족여행은 여러 번 했었지만 아들과 단둘이 그것도 15일씩이나 여행을 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사실 아들과의 여행을 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떠났던 것은 아니었고, 한국 3M으로부터 인코그니토 어드밴스 코스에 초청을 갑자기 받았고, 문득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고 이왕이면 아들과 같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내의 반대가 있었다. 이유인 즉, 개원 한지 2년도 안됐고 병원에서 벌이도 시원찮은데 무슨 여행이냐고, 그것도 2주씩이나. 하지만 지금 아니면 내년에 바쁜 중학생이 되어버리는 아들과 또 언제 여행을 해 보겠냐고 잘 설득을 해 동의를 얻었다. 물론 예전부터 입버릇처럼 아들과 단둘이 여행을 해야겠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막상 가겠다고 하니 아내가 놀란 눈치였다. 진짜로 갈 줄은 몰랐었나 보다. 여정을 보면 독일(프랑크푸르트, 배드 에센, 뷔르츠부르크, 로텐부르크, 퓌센), 오스트리아(인스부르크), 이탈리아(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바티칸, 피사, 밀라노) 스위스(인터라켄), 프랑스(파리) 마지막으로 영국(런던)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는 전형적인 유럽패키지 상품이었다. 다만 우리는 연수회때문에 같
제1570번째 나는 산을 좋아 한다 난 산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고산준령을 넘나드는 등반가도, 자주 산을 찾는 애호가도 아니지만, 춘천이라는 도시는 분지라 주변에 여러 산들도 많고, 눈길 닿는 모든 곳에 병풍처럼 산들이 차지하고 있다. 항시 가보고 싶은 맘은 많았지만, 여러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7월 어느 날 달이 꽉 찬 보름날에 주위 선배님 2분과 동행해 산행하기로 했다. 당일 아침엔 궂은 비가 내리더니 오후가 들어서니 거짓 말 처럼 날이 개었다. 오랜만에 산행인지라 약간 들뜬 마음으로 진료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먼지 쌓였던 배낭 및 등산 도구를 챙겨 약속장소로 갔다. 퇴근시간 때문인지 약속장소인 아파트 입구는 사람들과 차들로 바빴다.오후 7시에 우린 모여서 간단한 밤참거리와 물을 사고, 차로 15분정도 이동하여 등산로 입구까지 도착했다. 오늘 오를 산은 금병산으로 정상은 약 해발 700미터이지만 우린 300미터 지점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입구엔 매점 같은 간이 건물과 산불 초소가 있고, 멀리선 우릴 경계하는 개들이 짖을 뿐 한가로운 시골 풍경 같았다. 등산로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던 것처럼 풀이 무성했고 사람 두 명이 나란히 걷기엔 다소 좁았고,
우연을 가장해 넌지시 다가온 백년손님 미니 임플란트 틀니 치료를 해 온 지도 어언 만 6년이 지났습니다. 우연히 시작된 미니 임플란트 시술이 저를 포함해 동료들과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회사 직원으로부터 2.5mm 미니 임플란트를 처음 소개 받고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시작했습니다. 미니 임플란트를 식립하는 첫날 딱딱한 아래턱 뼈에 거저 대충 심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로지 식립 즉시 힘을 받아야 함으로 거저 빡빡하게 심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마지막 드릴을 하지 않은 채 식립했는데, 그때 부러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만약 다시 인접 자리에 심어 보고 또 다시 부러지면 아예 사용하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프로토콜대로 식립하니 제법 단단하게 식립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헐거운 틀니를 가진 노인들의 의치 지지용으로 미니 임플란트를 지속적으로 적용하게 되었고, 초창기 무개념에 따른 실패를 넘어 이제는 식립과 부하에 대한 개념을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었고, 비로소 환자의 구강 상태와 생역학적인 관점에서 보철물의 디자인 및 식립할 미니 임플란트의 위치 및 개수 등을 고려한 미니 임플란트 틀니를 제작해 줄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흔히 3년
독서삼매경 휴가 새해가 되면 항상 다짐하는 것이 있다. “올해에는 독서를 많이 하자" 또는 “한 달에 2권 정도라도 책을 꼭 읽자" 등등… 그런데 새해 다짐은 작심삼일로 끝나고 만다. 업무상 1년에 한 두 차례 큰 행사를 준비하거나 학술대회 통역을 준비하는 때가 있다.이럴 때는 이 프로젝트에만 집중을 한다.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도 잠을 자고 일어나서도 온통 프로젝트 생각뿐이다. 이렇게 내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하는 일이 생기면 다시금 다짐을 한다.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봐라. 여유를 갖고, 내 시간이 생기면 꼭 책을 읽을 것이야" 하면서 바쁜 여정 속에서 여유를 찾아보려 애를 쓴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끝난다고 시간이 생기지 않는다. 어쨌든 나에게 주어진 24시간은 또 다른 일들로 자연스레 채워진다. 간혹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찾게 되는 유명인들이 내놓는 추천도서 목록은 가능하면 스크랩을 해가며 나도 꼭 읽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이런 마음가짐에도 불구하고 실제 독서는 거의 못한다. 매번 실패를 하는데도 독서만큼은 미련을 못 버리겠다. 누구보다도 잘 안다. 이렇게 바쁘고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독서만큼 투자가치가 있는 것이 또 있을까? 읽으면 읽은 만큼
대한민국종단 537㎞ 대회를 마치며 7월 11일(일) 오전 6시부터 16일(금)오후 1시까지 127시간의 제한시간 내 부산태종대에서 대구, 문경새재, 괴산, 이천, 서울역, 임진각까지의 코스를 완주해야 하는 2010년 대한민국종단 537km 대회에 참가했다. 2년 전 대회 때는 412km 지점에서 발바닥 물집으로 인한 부상으로 중도기권 한 기억이 있어 약간의 부담은 있었지만 많은 준비를 했기에 내 자신을 믿고 다시 도전했다. 꾸준히 훈련을 해 왔고 6주전에 태화강 100km와 3주 전의 5산종주를 마지막으로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태종대로 향했다. 내내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84명의 선수들이 빗속을 뚫고 임진각을 향하여 힘차게 출발했다. 중반까진 무리하지 않기로 했고 비가 오지만 자주 발을 닦아주며 바세린과 테이핑도 교환해주고 양말도 갈아 신으며 레이스를 펼쳤다. 나중에 돌이켜 보니 발에 투자한 시간이 꽤 컸지만 대회 끝까지 물집이 안 생겨서 편한 후반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약 20km 가량의 부산시내를 통과한 후 낙동강을 따라 달려 25번국도의 직선화도로를 지나고 한참을 가니 반가운 100km cp인 상동역.
제1566번째 병무 전선 이상무! 천안함 사건으로 국내외가 시끄러웠다. 46명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 많은 국민들이 같이 슬퍼하며 정확한 원인 규명과 함께 조속한 후속 조치를 요구하였다. 북한이 배후에 있다는 조사 결과로 한반도는 다시 냉전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최전방에 서 있는 장병들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 지금 이 시점을 더욱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바로 입대를 기다리고 있는 청년들이다. 북한의 위협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천암함 같은 참사가 자신에게도 언제든지 닥칠 수 있다는 걱정으로 입대를 미룰 수 있기 때문이다. 군대에 간다는 것은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는 발전이 없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현실에서, 천암함 사건은 청년들의 군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더욱 부추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군대에 자진 입대하여 국방의 의무를 다하려는 이들이 있다. 나는 레지던트를 마치고 2010년 3월 징병전담의사로 분류되어 논산 훈련소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지루한 군사 훈련과 훈련소 시설의 불평을 일삼는 나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소아마비로 인하여 한쪽 발이
제1565번째 대륙을 지배한 나라 몽골로부터의 선물<하> <1857호에 이어 계속> 실제로 몽골에서 우리에게 진료를 받으러 온 많은 환자들이 아픈 치아를 뽑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학생인 우리가 보기에도 신경치료만 잘 해주면 다시 잘 쓸 수 있는 치아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교수님들께서도 그런 환자들에게 치과에 가셔서 신경치료를 받으시면 다시 치아를 잘 쓸 수 있다고 설명드리고 통증을 완화하기 위한 간단한 약만을 처방해서 보내드렸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부터 돌려보낸 환자들이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 분들은 치과에 갈 여력이 안 되니 제발 아픈 치아를 뽑아달라고 애원했다. 밥을 먹을 수가 없다고. 아무리 이론적으로는 뽑아서는 안되는 치아임을 알지만 그런 분들의 사정을 외면할 수 만은 없었다. 결국 둘째날부터는 아픈 이들 중에서 선별해서 발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국에서는 이제 환자들도 본인 치아를 유지해서 쓰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잘 알기에 치과에서 이를 뽑자고 해도 안 뽑겠다고 버티는 일이 허다한데 몽골에는 아직 그런 구강건강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자리잡혀 있지 않았기에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이나 원칙을 벗어나
제1564번째 대륙을 지배한 나라 몽골로부터의 선물<상> 여름을 앞두고 과대표가 강의실에 들어와 본과 4학년 학생들의 몽골 의료봉사 참가신청을 받았다. 이미 여러 해 동안 이루어져 왔던 활동이었고, 이전에 참가하셨던 개원하신 선배님들이나 수련의 선생님들로부터 그 당시 봉사활동의 보람됨과 즐거움을 익히 들었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많은 수의 학우들이 참가 신청을 했다. 올해는 예년보다 참가인원이 더 줄어들어 본과 4학년 학생들 중 2명만이 참가할 수 있었기에 면접을 보고 제비뽑기를 해 결국 노동수 학우와 나를 포함한 두 명이 선발됐다. 이후 강력한 참가 의사를 밝힌 김상완 학우도 치대 학생이 아닌 진료팀의 소속으로 가게 되어 결국 치과대학에서는 세 명의 학생들이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료부장이시자 단장님이신 구강외과 김철환 교수님, 보존과 문호진 교수님, 보철과 최유성 교수님, 구강외과 2년차 상진규 선생님과 단국대학교 보건학 박사출신이신 새한치재 이명구 사장님, 김영미 치위생사님, 김혜정 치위생사님, 신창선 주임님, 보철과 사무원 행정학과 도화연 학생을 포함한 총 12명의 치과 의료 봉사팀이 꾸려졌다. 6월 19일 토요일, 봉사단은 치
제1563번째 나의 특별한 연애담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려니 문득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님의 침묵 중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라는 시귀가 떠오른다. 누구나 청춘시절 한번쯤 첫눈에 반해 가슴 벅차게 좋아하고 뜨겁게 사랑했던 연애담 하나쯤은 있었을 것이다. 헤어지면 바로 보고 싶어져 집에 돌아와 곧장 전화를 하면서 뭐 그리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몇 시간씩 집 전화를 불통상태로 만들곤 했던 시절이 내게도 분명 있었다. 가슴속 깊이서부터 지펴진 그 뜨거움을 젊은 날의 사랑이라 믿고 정열을 불태웠던 그런 시절 말이다. 이십여년 전 어느 봄날 난 우연히 알게 된 배드민턴에 반해 눈멀고 귀먹어 지금까지 뜨거운 연애중이다. 배드민턴에 대한 나의 무한 사랑은 나의 삶에 역동성을 부여한 에너지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만남들을 가져다 주는 디딤돌 역할을 하게 되었다.배드민턴에 빠져 지내던 시절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잠을 자면서 꿈속 스매싱을 하다가 옆에서 곱게 자고 있던 아내를 때려 엄동설한에 아내한테 쫓겨나 보기도 했었다. 내 삶의 최우선 순위를 그녀 배드민턴에 두었
제1562번째 2010 월드컵 해의 여름풍경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2006년을 거쳐 2010년이 되니 월드컵 축구 거리 응원이 이젠 아주 익숙한 풍경이 된 것 같다. 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어김없이 전국적으로 약 4백만 명이 길거리 응원을 했다고 하니 한번 한다 하면 ‘훅!!" 하고 끓어오르는 우리나라 민족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서도 대한민국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직원들은 알아서 붉은 티에 청바지에 머리에 치장들을 하고 환자들을 응대하였고 이미 기성세대가 된 느낌인 원장인 나도 좀 어색했지만 붉은 옷을 입고 진료를 진행했다. 우리나라 대표팀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리스와의 첫 경기를 신나게 이기는 명 경기를 펼치고 원정 팀 최초로 16강에 올라 10여일 동안 나를 비롯해 국민 모두를 유쾌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뭔가 표현하긴 어렵지만 예전 같은 열정보다는 허(虛) 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번 응원에서는 2002년의 감동과는 좀 다른 것들이 느껴졌다. 길거리 응원에 큰 방송사나 여러 대기업들이 후원 및 편의 제공을 하며 자사의 광고 및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월드컵에 집중된 국민
제1561번째 나를 만들어 준고마운 인연들에 대한그리움을 보내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단지 공부를 좀 했다는 이유만으로 난 무작정 서울행을 택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이방으로 눈 덮인 고속버스를 타고 마치 어찌 될 줄 모르고 트럭 짐칸에 실려 가는 가축들마냥. 그런 나에게 손을 내 밀어 준 것은 예수였다. 그는 나에게 위로와 용기와 그리고 많은 친구들을 주었다. 성경 속에서 난 나의 잊혀진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막연히 그리워하던 영혼의 고향을 향한 강한 향수를 느끼게 하였다. 가난했지만 난 정열적이었고 행복했었다. 성경의 말씀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위해 신학에 빠져들었고 나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사상들로 머리가 너무 무거웠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나의 진정한 물음에 답을 주진 못했다. 온통 최루탄 가스 냄새로 학교 공기가 오염되던 시절 대학인들의 화두는 민주화, 군부독재타도, 인권수호들이었다. 많은 친구들이 감옥에 가고 학교를 그만두고 현실을 바꾸기 위한 고민들을 많이 했었다. 그러나 난 거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기 보다는 겁이 났었고 그런 고민을 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