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최초의 치과대학은 1840년에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세워진 볼티모어 치과대학(the Baltimore College of Dental Surgery)이다. 이는 헤이든 박사(Dr. Horace H. Hayden)와 해리스 박사(Dr. Chapin A. Harris)가 메릴랜드대학교에 치과를 설립하고자 요청하였으나 거부되자, 따로 치과대학을 세워 메릴랜드 주의회의 공인을 받은 것이다. 이 볼티모어 치과대학은 메릴랜드대학교 치과대학의 전신이기도 하다. 볼티모어 치과대학과 메릴랜드치과대학(Maryland Dental College, 1873년에 설립), 메릴랜드대학교 의과대학 치과(the Dental Department of the University of Maryland, 1882년에 설립), 그리고 볼티모어의과대학 치과(the Dental Department of the Baltimore Medical College, 1895년에 설립)의 4개 기관이 1923년에 합병하여 메릴랜드대학교 치과대학(University of Maryland School of Dentistry)으로 되었다.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의 전신인 경성치과의학교가 1922년
지난 2년간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이름의 사회경제적 개혁정책은 다양한 찬반의견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자영업자가 대부분인 치과계에는 ‘보조인력 구인난에 따른 경영악화’라는 한파를 가져왔다. 모든 개혁에는 양면성이 있을 수 있는 바, 두 번째 직선제 선거를 앞두고 진정한 치과적 개혁의 의미와 방향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어느 사회나 개혁은 필요하다. 개혁은 계속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지만 그 내면은 실천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명제를 가지고 있다. 끊임없이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변화의 속도를 체감하기 힘들 수 있지만, 사회는 계속하여 변화하고 있고 그 중심축은 개혁 속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지난 십여년을 돌이켜볼 때 과연 치과계는 개혁되었는지, 새롭게 거듭났는지 바라보자. 건강보험의 굵은 관점에서보면, 치과계 전체가 반대했던 틀니 보험, 연1회 치석제거술, 임프란트, 광중합 레진충전 급여화는 개혁의 수단으로써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는가? 또한 개혁의 대상이자 변화의 대상이 되었던 치과의사들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찬반의 격렬한 논란 속에서 묵묵히 소임을 수행한 협회 임직원들은 정부 관계자들과 같이 치과의사들을 대표하는 변화의
몇 년 전, 한 여학생이 치아우식증을 주소(主訴, Chief complaint)로 필자의 치과의원에 혼자서 내원한 적이 있었다. 기본적인 구강검진을 하고 치료계획을 세운 다음 진료비 총액까지 산정해 주었다. 하지만 어린 학생이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라 아무런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이렇게 얘기를 해 주었다가 필자는 순간적으로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 마냥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ㅇㅇ야! 진료비가 많이 나올 것 같은데 엄마한테 여쭤보고 결정한 다음에 와서 치료받자~~”라고 얘기를 해 주었는데, 대뜸 이 여학생은 고개를 떨구면서 “저 엄마 없는데요!”라고 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 학생에게 내가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누구나 엄마 없이 이 세상에 오는 사람이 없으니… 이 학생의 나이에 나는 엄마가 계셔서 엄마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랐었던 경험을 그 여학생에게 그대로 요구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면목이 없다. 하지만, ‘엄마에게 여쭤보라’는 의미는 통상적인 최종결정권에 대한 위임의 의미로 이미 한국사회에서는 널리 통용되는 단어이지만, 무심코 던지는 나의 언어습관이 어떤 이에게는 커다란 상처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을 공유해 보고자 한다. 2019년 현재
치과의사 인생 반 백 년에 해외 학술모임에 꽤 나갔지만, 모두 교정학 일변도요, 일반 개원의의 국제대회는 경제적·시간적인 낭비라고 생각해왔다. 김철수 협회장과 후배 김명수 전 의장의 권유로 FDI 샌프란시스코 총회에 게스트로 다녀와서, 그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은 얘기는 뒤로 미룬다. 다만 20년 만에 미국치과의사협회(ADA)와 공동 개최한 이번 총회가 소문만큼 알차고 풍성한 느낌이었다는 점만 밝혀둔다. 일정이 끝난 뒤, 워싱턴에 계신 형님(서울의대 53학번, 정형외과 은퇴) 내외분을 뵈었다. 중국집에서 식사 도중에 치과진료 얘기가 나왔는데, 형은 방문 첫날 보철(임플란트 4본)을 덜컥(?) 약정하고 왔다고 비난조요, 형수는 전문의의 권유를 거절할 수 있느냐며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다. 주차장 모퉁이 벽돌집 2층에 붙어있던, 미국에서는 낯선 ‘UD 치과’ 간판이 기억난다. “결정은 신중해야지.”라는 대답으로 얼버무렸지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라는 속담이 떠올랐다. 이제 헌재 판결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사무장·네트워크 치과 문제는 협회와 회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적·경제적 손실을 입혔던가? 성공의 뒤안길에는 늘 그늘이 있고, 햇살이 강렬할수
2021년 10월 2일은 대한치과의사협회 창립 100주년 기념일이다. 100주년 기념일까지 만 2년이 채 남지 않았다.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꼭 기념일에 맞추어 행해지는 것이 아닌 만큼 100주년이 되는 해의 초반에 이루어지는 행사들은 준비기간이 1년 남짓 밖에 안 남았다고 할 수 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 9일 대한치과의사협회 전신인 조선치과의사회가 창립하였다. 이후 30여 년이 지난 1981년 4월 25일 경주 보문단지 내 관광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30차 대한치과의사협회 정기대의원총회에서 창립기념일을 1921년 10월 2일 조선치과의사회 창립총회일로 제정한 바 있다. 구체적인 제정 경과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서울지부(최재경 대의원)와 군진지부가 공동으로 제안한 치협 창립기념일 제정안 요지는, ‘개인, 단체, 국가 등 모든 곳에 생일이 있으나, 치협은 아직 생일이 없기 때문에 이를 제정하여 매년 기념행사를 가져야 함.’이었다. 박명규 군진대의원의 제안 설명에 따르면, 1921년 10월 2일 조선치과의사회 창립총회일을 기념일로 정하든가, 6월 9일을 기념일로 정할 수 있다는 예시를 하고, 대의원총회에서 날짜까지 확정하기는 어려우니, 제정하는 것
지난 11월 15일 치협 대회의실에서는 치과의사들의 진로 다각화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다. 정책연구원에서 발주한 연구용역의 책임 연구진이 외국 연수 중인 까닭에 권태훈 치협 공공군무이사가 주제발표를 대신했다. 또한 패널로서 각계의 주요 치과의사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발표해주셨는데, 이날 행사에 대한 여러 사람의 생각을 종합해보려 한다. 우선 치과의사의 가장 기본적인 본분은 치과의료를 기반으로 국민의 건강수준을 높이도록 돕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간 보건사회연구원 등의 국책연구기관이 보건의료자원의 공급 및 배출에 관해 정기적으로 진행한 연구결과는 치과의사를 비롯한 일부 의료인력의 과다배출을 수차례 전망하고 있다. 인력의 과잉공급에 의한 시장의 혼탁화는 지나친 상업화 등의 부작용을 가져왔고, 이는 ‘불법 사무장 및 네트워크 치과’와 같은 ‘사생아’를 낳아 1인 1개소법 논란과 같은 소모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과다 배출되고 있는 의료인력들이 치과의료에만 집중하여 레드오션화 하면서 발생한 결과이다. 학부 4년간 혹은 사회 각 분야에서 전문적 지식을 쌓은 사람들이 의학에 자신의 전공을 접목해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 발전토록 한다는 이상적인 목표부터 한미
2025년 6월 5일부터 6일까지 평양 조선무역센터에서 ‘제1회 평양국제치과종합학술대회 및 치과기자재전시회(2025 PIDEX)’가 개최된다. 첫날에는 류경치과병원 치과 리민철 과장의 ‘임플란트 수술(상악동 정복 길라잡이)’ 강의가, 둘째 날에는 평양의학대학 치과 원해룡 과장의 ‘임플란트 보철법’ 강의가 이루어진다. 이번 2025 PIDEX에는 북한 치과의사 200여 명과 러시아, 중국, 몽골, 미얀마 등 5개국 외국 치과의사가 참가하여 임플란트 시술과 보철에 관한 최신 지견을 접하는 것은 물론 보건성치과종합병원 미용외과에서 개발한 CAD/CAM/CAS를 이용한 보철물 설계의 직접 시범시술도 선보일 예정이다. 이 가상의 신문기사는 필자가 5년여 북한사업을 하면서 꿈꿔왔던 남북 치과 교류의 희망사업을 예시하여 가상으로 기사를 만들어 본 것인데 독자분들이 허무맹랑한 가정으로 받아들이실 지는 모를 일이다. 2025 PIDEX에서 북한 치과의사 연자들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케이스와 논문을 바탕으로 내국인과 외국인 치과의사들에게 최신 임플란트 강의 및 실연(Live Surgery)이 펼쳐지기를 고대하며 글을 시작해본다. 만약 남북관계가 해빙무드로 진입해 조만간 남한
스탠퍼드 대학 입구 넓은 잔디밭을 지나, 나지막한 교회와 대학건물을 마주하면, 마치 개척시대 장원(莊園)에 들어선 느낌이다. 최초로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한 철도왕이자 전 상원의원인 스탠퍼드(Leland Stanford)가 거대한 농장 Palo Alto(큰 나무)에 세운 대학으로, 캠퍼스가 미국에서 둘째로 넓다고 한다(1885, 개교는 1891년). 당시 정부는 철도회사에 철도 양편으로 각 10m씩의 토지를 주어, 사냥터와 농토를 빼앗긴 인디언·농민들과 철도회사 간의 마찰은 피할 수 없었다. 더욱이 남북전쟁 후 수십만 병사가 돌아오자, 거국적인 “Go West, young men!” 캠페인이 벌어지고, 링컨 대통령은 전쟁 중 빈번해진 인디언 습격을 제압하여 치안의 확립을 지시한다. 그렇게 피 묻은 돈으로, 동부가 아니라 캘리포니아에 명문대를 세우자는 열망은 열매를 맺어, 오늘날 세계 랭킹 5위안에 들어가는 연구중심 사립대학으로 성장한 것이다. 왼편에는 로댕의 야외 조각상이 서 있고, 정면 첫 건물은 어렵게 얻었다가 너무 일찍 잃은 아들 릴랜드 주니어에게 헌사 된 교회다. 21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후버 대통령 및 페리 국방과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을 배출하였다. 터
우리나라에서 치과 전문과목의 연원을 찾기 위해, 치과대학이나 그 전신의 부속병원 진료과목을 살펴보자. 1929년 경성치전 부속의원엔 외과·보존·보철·교정의 4개부와 특진실이 있었고, 1946년 서울치대 부속병원은 외과·보존·보철의 3개부로 출발하였다. 여기에 소아치과가 보존과에서 분리독립(1956.4)하였고, 치주과는 제2보존과로 출발(1957)하여 2년 후 치주과로 개칭하였다. 그 사이 치과방사선과가 시작(1958.1)되었고, 예진 업무로 시작(1959)된 구강진단과는 1963년 첫 전공의를 모집하였다. 그후 치과교정과가 부활(1964.9)하였고, 구강병리과가 임상과로 편입(1978.7)되었다. 법령에 나타난 전문과목을 살펴보면, 1962년에, ‘의료법[법률 제1035호] 제36조(전문과목의 표방)’에 의거한, ‘의료법시행규칙[보건사회부령 제77호] 제16조’에 치과 전문과목 5개과(구강외과·보철과·교정과·소아치과 및 치주위병과)가 열거되었다. 또 동시행규칙 17조에 전문과목 ‘표방허가를 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험을 행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1975년에는 이 5개과가 보사부령에서 삭제되고, ‘의료법[법률 제2862호] 제55조 3항 2호’에 명기되기도
치과계 주요 내홍이자, 현안이었던 ‘1인 1개소법’이 합헌으로 정리가 되었지만, 아직도 SNS의 주요 광고를 도배하고 있는 ‘기업형 불법 사무장병원(불법 네트워크 치과 포함하는 의미로 이하 사무장병원)’ 광고를 보면서, 단순히 ‘시장경제원리’라는 단어로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혹자는 국회와 정부에 민원을 제기해 입법을 하자고 하고, 혹자는 검경에 고발을 해 수사를 하게 하자고 한다. 허나 전자는 이번 헌소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법률의 기본권 침해논란에 휩쓸릴 경우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일이 허다하고, 후자의 경우는 개인정보보호법 제정 이후 협회 등 외부에서 사건파악이 어려운 경우가 많고, 자원이 많이 필요하다. 당연히 이 모두 중앙회가 어려워도 해야 할 일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지만,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그간 이 문제를 직접 당면하면서 대응의 선봉에 섰던 몇몇 고문 및 전 임원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사무장병원 문제는 개설 단계부터 차단을 시키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신다. 현행법상 의원의 개설은 보건소 신고사항으로, 명의도용이나 개설자금 등과 같이 민감한 사항을 확인하기는
사람은 왼손과 오른손 각각 다섯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태어난다. 물건을 다루고, 식사를 하고, 일을 하고, 칭찬과 약속의 증표로 새끼손가락을 걸어보고…심지어 욕을 할 때에도 사용하는 손가락은 가히 만능이다. 안중근 의사는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단지동맹하여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는 혈서로서 비장한 각오를 표현하였고, 불교에서는 견지망월(見指忘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이라 하여 손가락 자체의 기능보다는 목적을 가리키는 매개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치과의사들은? 치과의사에게 손가락이 소중하고 각별하다는 것은 불문가지로 일반인의 손가락보다 더욱 섬세하고 정교한 조작을 하도록 훈련되어진 치과의사의 손가락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핸드피스를 손에서 놓는 것은 은퇴를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죽는다는 의미의 ‘숟가락 놓다’처럼 ‘핸드피스를 내려 놓는다’는 것은 치과의사 직업의 사망선고를 뜻한다. 매일 세 번 숟가락을 드는 것 이상으로 핸드피스와 기구들은 한시도 치과의사의 손을 떠나지 않고 있으니 치과의사의 손가락은 직업의 의미를 넘어 많은 상징적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른손 중지에 박힌 굳은살을 훈장처럼 여기며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