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치과의료정책포럼 주제는 치과의사의 건강과 삶이었죠. 10월 말에 열린 회의에서 치과의사 건강 실태와 사망원인에 관한 주제발표가 있었습니다. 귀한 연구이고 자료였는데, 제가 주의 깊게 본 것은 우울감, 자살 사고, 질환 통계였습니다. 치과의사협회 소속 전국 회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 응답자 1600명 중 62%가 최근 2주간 우울감을 경험했으며 17%가 지난 1년간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48%가 근골격계 질환을 호소했으며, 고지혈증과 알레르기성 질환, 고혈압이 뒤를 이었습니다. 이 항목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두가 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소아치과 수련 과정에서 얻은 어깨 통증은 진료실에 있으면서 점차 심해져 갔습니다. 잠시 의과대학에 근무하고 유학을 다녀오면서 핸드피스를 놓았더니 더 악화되지는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요. 저는 의료인문학과 의료윤리라는 다소 생소한 전공에 뛰어들어서 좌충우돌하고 있습니다. 아직 아무런 기반도, 틀도 없는 상황에서 글을 쓰고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가족에게 계속 폐를 끼치는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보니 우울감을 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여, 이렇게 집단화된 형태로라도 치과의사
오늘 하루도 알람 소리에 힘겹게 일어나고 씻은 후, 아침 식사하고서 병원으로 출근한다. 그 하루가 월요일이면 그 주의 새출발을 잘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물씬 생긴다. 하지만, 쌓인 피로감이 가시질 않았거나 나를 힘겹게 하는 환자가 또 대기실에 앉아있거나 우리 병원 직원이 실수하는 것을 연타로 경험하면 즐겁지 않을 수 있다. 방긋하고 병원 문을 들어서면서도 이내 웃음이 사라진다. 우리는 하루에 과연 몇 번을 웃고 사는 것인가. 치대 재학 시절에는 졸업하는 그 날만을 기다리면서 미래에 일확천금도 벌고 존경받는 치과의사 선생님이 되고자 큰 꿈에 젖어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절로 미소를 띨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장밋빛 인생이 아닌 것을 깨닫고 실망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보니 그토록 원했던 개인 병원을 열고서 지역 사회에 이바지하겠다는 이념으로 열심히 진료하고자 한다. 그런데, 병원에 내원하는 환자 수가 줄거나 예약했던 환자들이 속속 취소하는 상황을 맞이하면 마음이 더없이 불안해진다. 쌓여만 가는 고지서, 곧 다가오는 임대료와 인건비 날짜, 카드 결제일. 혹시라도 누락된 보험 청구는 없는지 미납한 환자가 아직 남아 있는지 샅샅이 뒤져서 수입을
새벽녘 닭 우는 소리를 언제 우리가 시끄럽다 했던가? 저물녘 멀리 들려오는 송아지의 음매 소리가 듣기 싫어한 적이 있던가? 희미한 호롱불과 더불어 들려오는 다듬잇방망이 소리를 자장가로 여기지 않았던가! 그칠 줄 모르고 울어대는 매미 소리 때문에 더 더워한 적이 있는가? 상달 밝은 보름달 밑에서 우는 귀뚜라미 소리에 가을을 맛보지 않았던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 소리에 여름을 지내지 않았던가? 범종의 울림이 번뇌를 씻지 않았던가? 탁발 스님의 목탁 소리에 미물의 정기를 깨우치지 않았던가? 그래, 그때도 소리는 있었다. 그래도 시끄럽다고 타박하지 않았다. 구박은커녕 그때를 정겨워하고 그리워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많은 훤소(喧騷)와 소음(騷音)에 젖어있고, 잠겨있어, 묻혀있고, 사로잡혀 있다. 주위가 온통 잡동사니 소리로 뒤범벅이 된 지 오래다. 자동차 소리, 기계 소리, 텔레비전 소리, 장사꾼 손뼉 치는 소리, 정치꾼 허튼소리, 야바위꾼의 속임 소리,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아파트 층간 소음, 휴대전화 소리. 뻥튀기 소리…. 그래서 옛날 소리를 아름답다 하고 추억의 소리로 여기는 모양이다. 이에 비교해 지금의 소리는 어지럽고 지겨우며 참기 어렵고 신경질
유치원 시절 피아노를 치던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래서 피아노 배우고 싶다고 조르고 졸랐지만, 예체능을 전공하게 할 생각이 없었던 우리 엄마는 초등학교 입학 후 피아노 학원에 등록해 주셨다. 어렵사리 피아노와 처음 만나게 된 후, 따님이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고 피아노 학원 선생님께서 예의상 하신 말씀을 철썩 같이 믿으며 초등학생 기간 내내 피아노 학원을 개근하였다. 언제부터인지 자연스럽게 피아니스트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중학생이 되어서도 피아노를 배우려고 했으나 결국은 레슨은 포기하게 되었고, 그 후로도 피아노 레슨은 거의 다시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손에서 피아노를 장기간 놓았던 적은 거의 없었다. 이건 오랜 기간 해온 ‘반주’ 덕분이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을 따라 소규모 교회에 출석하게 되면서 반주를 시작하였다. 규모가 워낙 작았기 때문에 인력이 부족해 고사리 손이라도 빌려서 예배를 드린 것이다. 처음에는 온통 실수투성이였으나 이것도 꾸준히 몇 년을 하다 보니 나름 노하우도 생기고 반주에 자신감도 붙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주변 친척들 결혼식에서도 딩동거려보고, 학교에서도 반주할 기회가 있으면 쭈뼛쭈뼛 앞으로 나가 반주를 자원하곤 했다.
<On the day of radioactive rain, how about going around wearing a bikini and then refresh your mind by drinking Makgeoli!> 옛날 고등학교 때 물리나 화학 시간에 방사능에 대해 배우기 훨씬 전인 국민학교 다닐 때 이미 퀴리 부인의 위인전을 읽었기 때문에 어렴풋이 방사능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 시험 보느라 딸딸 거리며 전자구조니 양성자니 하는 용어를 외우며 배웠고, 대학가서는 방사선학 시간에 예쁜 여교수의 숨소리를 들어가며 원서로 방사능학을 공부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능의 영향이 한국에도 미칠 수 있다고 하고, 원전발전소의 당사자인 일본 도쿄전력은 뾰족한 대책이 없어 지금도 고농도 방사능 물질을 바다로 그냥 흘려보내고 있다. 무대책이 유일한 대책인 듯하다. 상사의 명령이라면 목숨마저 내걸고 싸우던 사무라이 정신은 다 어디가고, 한국처럼 서로 책임을 회피하고 윗사람들의 눈치만 보며 대책회의만 하고 있다. 방사능 오염 물질이 해류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직간접으로 해양 생태계를 오염시키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문인회는 올해 초 두 번의 문학기행을 기획했다. 지난 6월, 첫 문학기행을 “대마도를 다녀온 조선통신사 후예들”이란 테마로 다녀왔다. 두 번째는, 수연산방에서 길상사까지, ‘성 바깥 북쪽 동네’ 성북동 문학기행(10월 6일)이었다.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의 흔적을 찾기 위해 성북동을 답사한 협회사 편찬위원장 변영남 원장님이 안내를 맡아주셨다. ‘수연산방(壽硯山房)’은 성북구 성북동 248번지에 있다.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된 곳이다. ‘수연’은 벼루가 다할 때까지 글을 쓰겠다는 뜻이다. 해방 전 ‘운문은 지용, 산문은 상허’라는 명성을 얻었던 이태준의 옛집으로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살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한 곳이다. 현재는 이태준의 외증손녀가 전통찻집으로 운영 중이다. 수연산방에 들어서니 젊은 연인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있었다. 안내된 방안에 3단 장식장 맨 위 칸에는 이태준의 ‘문장강화’, ‘상허문학독본’ 고서가 전시돼 있었다. 1939년 10월 29일에 있었던 이태준의 집들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뒤뜰을 액자에 고스란히 담은 쪽문에 시선이 머물렀다.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화단에는 토란, 담쟁이 넝쿨, 그리고 선홍색 꽃들이 석등과 함
오늘도 통증으로 얼굴 찌뿌린 환자와 진료받다가 갑자기 동네 집값이 너무 올라서 우울해서 참을 수 없다며 눈물짓는 단골 환자분을 달래다 보면, 좁은 진료실은 환자를 치료하는 보람 만으로 버티기에는 답답한 곳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정해진 시간동안 한 곳에 앉아 환자를 기다리는 이 직업을 두고, 회사다니는 친구들은 본인은 답답해서 못하겠다고 했었는데, 높은 하늘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나들이를 유혹하는 요즘같은 때는 더더욱 엉덩이가 들썩 거린다. 치의라는 직업은 대부분 1인 기업이기 때문에 인사, 총무, 재무관리 등 웬만한 잡무 또한 직접 처리를 해야하는지라 더더욱 스트레스 지수가 높다. 2015년 영국 루이스 박사팀 연구결과에 따르면 스트레스 해소법의 1위는 독서, 2위는 음악감상이라고 하였는데, 주변 치의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환자를 보면서 동시에 독서를 할 수는 없는 상황이고, 결국 백그라운드로 깔아놓는 음악에서 마음의 위안을 찾는다고들 하는 걸보니 음악감상이 그나마 유용한 방법인 듯 하다. 학부 때부터 음악을 즐겨, 점심시간동안 40분짜리 협주곡 한 곡을 듣고는 책 한권을 읽은 감성에 취하곤 하였는데, 요즘은 그 나마의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
매년 가는 몽골이지만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우리 여수에는 올여름 비 한방울 않내렸는데 사륜구동으로 개조한 중고 스타랙스를 타고 가는 내내 몽골답지 않게 비가 세차게 내렸다. 붉은 용사란 뜻을 가진 울람바토르 공항에서 몽골의 정복자 태무진의 고향이며 우리의 목적지인 빈데르솜 까지는 초원길로 차로 하루가 꼬박 걸렸다. 울람바토르 공항에 늦은 밤 도착해서 치과의료 장비 통관 문제로 공항 세관원들과 옥신간신 하다가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중간 기착지인 게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년 마다 되풀이 되는 행사라 늘 그렇거니 하지만 올해는 유난을 떠는 것 같다. 뒷 돈을 주고 벌금을 내고 하면서 겨우 겨우 통관이 됐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그랬을까? 내년에는 좀 더 발전하는 모습을 기대하며 우린 아침 일찍 낡은 스타랙스에 몸을 싣고 빈데르솜으로 향했다. 초원에 폭우와 천둥번개가 우리를 반겨 주는 듯 연신 비를 뿌려 댔다. 첫날 빈데르솜에서 치과진료를 시작 했는데 발치와 레진 충전을 얼마나 많이 했던지 하늘을 보니 새가 여러 마리 날아가는것 같았다. 진료 마감시간을 한참 넘기고 이제 진료를 마감한다고 하니 기다리고 있던 아이의 엄마가 눈물을 흘리고 우는 것이었다
백만년만에 서점을 들렀다. 맨날 핸드폰, 아이패드만 쳐다보며 살아서 어디 쓰겠나. 아무리 21세기를 살고 있는 문명인이라고 하지만. 시간나는 주말에 어느 카페에 앉아 바닐라라떼 된장스러운 맛을 느끼며 책 한권 올려놓고 폼 잡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하는 생각에 들러보았다. 썩 눈에 들어오는 폼스러운 책 표지 하나 없어 실망하던 가운데 ‘82년생 김지영’ 제목 한번 느낌있군. 나보다 4살이나 많은 저 누나는 무슨 생각이 많으셔서 저렇게 나이랑 이름 알리고 책을 쓰셨을까 궁금하여 잠깐 들어보았다가 이내 잡지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제목만 기억난다. 86년생 김태흥. 요즘 나도 저 누나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이에 걸맞는 고민이 하나 생겼다. 그건 바로 ‘새.치.’ 하루 하루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뽑아도 뽑아도 자꾸 비집고 올라오는 이 얄미운 놈들 덕분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괴뢰군 같은 것들. 거울 볼 때마다 한숨도 늘어간다. 이게 바로 33살의 모낭인가. 미용실 누나, 33살들도 새치 염색 많이 하나요? 치욕스럽지만 머리 자르러 가서 차분하게 한번 물어나 볼까. 염색은 무슨, 근본적인 치료가 불가능한데 드레싱만 반복해서 무얼하나 따위의 생각
“음악이 사랑을 살찌우는 양식이라면 계속해다오. 질리도록 들어 싫증이 나버리면 사랑의 식욕도 또한 사라지고 말 것이 아니냐. 다시 한 번 들려다오. 아스라이 사라지는 선율, 귓가에 감미롭게 들린다. 흡사 제비꽃 피는 언덕 위의 미풍이 몰래 꽃향기를 훔쳐 싣고 오는 것 같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과 같았던 조선치대 관현악반 40주년 정기연주회가 끝난 지 벌써 50여 일이 지났습니다. 매일 밤 연습이 끝나면 귓가에 들려오던 개구리의 울음소리와 예술극장을 가득 채우던 음악들의 선율은 아스라이 사라졌지만, 가을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에 저미어 여전히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귓가에 감미롭게 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40주년 정기연주회’에서 지휘자라는 영광스러운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제게 무한한 기쁨이며, 감사의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지휘자라는 자리가 저의 개인적인 능력의 범위를 넘어 주어지는 것이라 여겨져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올해 여름은, 40주년 정기연주회를 시샘이라도 하는 듯, 기록적인 폭염을 기록하며 너무나 더웠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부족한 지휘자를 믿고 다시는 오지 않을 청춘의 여름을 연습하며 보내준 단원들과 물심양
조선대학교 치과병원이 올해로 개원 40주년을 맞았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불혹. 일찍이 공자는 논어에서 이르기를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는 나이를 바로 40세”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공자의 말씀처럼 조선대 치과병원은 지난 1978년 개원한 이래 지역사회 구강보건 향상에 꾸준히 기여해 왔으며, 나는 이 치과병원에서 지역사회 일원으로서, 치의학을 배운 학생으로서, 현재 수련하고 있는 전공의로서 40주년을 남다른 의미로 맞고 있다. 사실 조선대 치과병원과의 인연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조선대 치과병원과 현재의 조선대 치과병원을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현재 40만 번의 병록번호를 눈앞에 둔 병원에서, 엄마 손에 이끌러 온 나는 10만 번 초반 대 병록번호를 갖는 어린 환자였고, 치과병원에 왔을 때는 시설이나 규모도 현재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실제로 과거 병원 정문은 조선대학교 병원 내 자리 잡고 있어 정문부터 한참 걸어 올라가는 속칭 ‘헐떡고개’를 올라 힘겹게 치과를 다녔다. “그 때 힘겹고 혹독한 등반수련(?)이 지금의 왕성한 심폐 기능과 지구력을 갖는데 큰 도움이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