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조어(造語) 냄새가 물씬한 관광이라는 낱말을, 볼 관자에 빛 광자로 풀어(觀光), ‘빛을 보다(See the light!)’라는 재미있는 직역(直譯)도 있다. 6·25 전쟁의 폐허 속에 세계 제일로 가난했던 우리들에게, 해외관광은 사치요 ‘김찬삼의 세계여행’은 그저 꿈이었다. 80년대 초 5공 때 해외여행 자유화가 선포되었지만, 국제정세와 주머니 형편으로 대부분 국민에게는 여전히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배낭을 메고 당당하게 나서는 MZ 세대와 달리, 여행에 서투른 꼰대들이 패키지여행에 매달리는 이유다. 필자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처음 본 것도 1987년 교정학회, 캐나다 쪽은 1996년 Roth/ Willimams 학회 끝에 딸린 패키지였다. 보면 볼수록 젊어진다는 “나이야 가라(Age, go away)!”라는 가이드의 설명에 폭소가 터졌던 게 생각난다. 환갑기념 마추픽추 여행에서 만난 이구아수 폭포는 그 광대한 크기와 수량에 감탄 불금으로, 필자의 연상(聯想) 기억법에 따라, ‘이구아나의 눈물’로 입력해두었다. 김찬삼의 3대 폭포 중에 이제 하나 남은 빅토리아를 버킷리스트에 찍어두었는데, 코로나에 죽죽 밀리더니만, 지난 3월 그만 ‘중환자실 입원’이라
지난 8월 23일 일본 효고현 고시엔(甲子園) 구장. 제106회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 10회 연장전 끝에 승리한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졌다. TV 화면에 일장기만 살짝 비쳐도 경기를 일으키는 소아병 환자 보유국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얘기다. 이 학교는 1947년 재일동포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설립한 교토조선중이 모태로서, 교가 가사는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 정다운 보금자리 한국의 학원”이라고 한다. 재정난과 학생 수 급감으로 일본학교로 전환하여, 이제 재학생 159명의 70%, 야구부는 전원 일본인인데, 많은 학생이 한국어 능력시험에 응시, 합격한단다. 과거에 일본사람이 작다 하여 왜(倭)라고 낮춰 부르기도 했지만, 한일 두 나라 중 어느 쪽에 소인배가 득실대는지는 조금만 들여다보면 보인다. 미우나 고우나 배울 건 배우자. 여름 고시엔은 3700여 고교 야구부 중 전국 47개 광역자치단체별로 예선을 거친 49개 고교가 나와 경기를 치르는데, 투수에게 변화구를 던지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것으로 안다. 한창 성장하고 있는 근육과 관절에 절대로 무리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튀어나온 윗
6차선 횡단보도 깜빡깜빡 푸른 신호등/ 열 발짝만 뛸까?// 19 18 17 16 ...// 그래/ 다음 신호에 건너지.// 현찰 주머니 속에 바스락/ 만 원짜리 서너 장.// 플래티넘 카드/ 하나도 안 부럽다.// 재래시장 구겨지고 귀 말린/ 퇴계 영정 만나는 날.// 달포 만에 다시 보는/ 울 엄마 표 오이소박이.// 손가락만 한 세 토막에/ 일금 삼천 원.// 거스름돈이 더 민망한/ 이 동네 짱은 퇴계 이황.// 맥도날드 쌍무지개 노랑 쌍무지개 앞에/ 우두커니 섰다가// 모퉁이 돌아 집어든/ 까망 풀빵 봉다리.// 달콤 짭짤 혀에 감치는/ 육즙 맛 뉘 싫으랴?// 한 수 삐끗하면 마냥 헤매는/ 터치스크린에 쫄아 그러지.// 늘근 아내 어제 찾던 새우젓이 왜 예 있어?/ - 미안해, 여보.// 참, 고춧가루 무치려고 내가 옮겼지/ - 응, 그래?// 아무튼 당신, 냉장고 정리 잘 해/ - 알았다니까.// 전우(戰友): 詩作 노트 아뿔사, 팔십 줄에 들어서니/ 몸은 굼뜨고 맘은 헤매어// 눈 바쁘게 도는 세상/ 따라가기 벅차다.// 종 주먹을 들이대며 따지다가도/ 여보- , 한마디에 배시시 쪼개는// 마누라는 미더운 평생의 전우/ 팽팽하던 처녀 때보다 늙어
마당에서 행패 부리는 취객을 막아선 마담에게 취객은 깨진 소주 병을 휘두르고, 피가 분수처럼 솟자 마루에서 술 마시던 젊은이가 제비처럼 날아와 목을 잡는다. 출혈은 거짓말같이 멎고 두 사람은 그 자세대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마담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고, 약간의 쉰 목소리만 남았다. 장소는 종로 2가 뒷골목의 주점 대련 집이요, 취객을 맨몸으로 막은 마담은 주점 주인이며, 파열된 경동맥을 잡아 순식간에 지혈하고 봉합까지 깨끗이 마무리한 청년은 일반외과 레지던트 K. 마담은 K에게 평생 무료 이용권(?)을 주고, 필자도 가끔 들려 착한 대접을 받았다. K는 바로 교정과 1년 후배의 형이었던 인연이다. 그는 모교에 교수로 남아 한국 최초로 ‘소아외과’라는 분야를 개척하는 값진 업적을 남겼다. 의·치(醫齒)대 본과 수업시간표는 꽉 찬 44시간이다. 중간고사 외에 기별(期別 semester)고사와 시간마다 쪽지시험(quiz)도 있고, 학년제(制)이므로 한 과목만 실패해도 일 년 유급이다. 아르바이트가 어려운 빡센 일정이다. 1967년 인턴 수당은 월 1500원, 가운 세탁비 800원에 구두닦이에게 700원을 주고 나면, 교통비가 없었다. 그해 가을 서울의대 인
용궁을 다녀왔다. 숨차고 가래 끓는 증상이 롱코비드 기관지염 때문인가 해서, 진해거담제로 3개월을 버티던 중이었다. 정기검진 받고 오던 중 호흡곤란으로 서울역 계단에서 쓰러져, 휠체어-KTX-휠체어-119 순서로 충남대병원 응급실에 이르렀다. 호흡기 걸고 40시간, 내과중환자실 사흘, 폐부종의 원인으로 의심되는 심장 약 후유증 문제 분석을 위하여 심장중환자실 나흘, 도합 9일 만에 퇴원하였다. 전에는 하나뿐이던 중환자실(Intensive Care Unit)은 응급·심장·신경의 3개 ICU로 진화되어 있었고, 교수·간호사 모두 과로로 탈진(Burnout) 상태였다. 필자가 충남대 병원에 근무하던 70년대 말 이래 전문과 숫자는 3배가 늘고 세부전공이 분화하여, 영상의학과·내과 수술 또는 시술(施術)이라는 다양한 진료형태가 생겨나 일반화 하였다. 치의신보에 ‘피안성과 정재영’이라는 A4 5장 분량의 칼럼을 쓴 것이 2010년 4월인데 문제 해결은 고사하고, 의료대란이 국가적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칼럼 내용은 ‘통합치과’ 인정을 촉구하는 목적이었지만, 의료계 인기 과가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에서 정신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로 확대되는 시점에, 생명을 다루는 필수
이승만의 토지개혁은 김일성의 ‘폭풍작전’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해낸 신의 한 수다. 공산 독재냐 자유 민주냐 개념조차 생소한 국민에게, 최소한 꼭 지켜야 할 ‘내 것’을 쥐여 준 것이다. 일찍이 레닌은, “농민은 땅에 대한 집착으로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 적당히 이용하고 버려라”하지 않았던가? 충청도는 다른 곡창지대와 달리 지주·소작농관계보다 자작농이 더 많았다. 소작농은 당장 눈앞의 마름 눈에 들어야지, 뼈 빠지게 일하는 건 한양에 계신 지주의 배나 불리는 일이다. 흉년이 들면 지주는 곳간을 풀어 소작농의 생계를 도와준다. 일종의 농기구(農器具) 관리다. 직업이라는 개념에서 ‘도덕적 해이’가 기생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다. 자작농은 다르다. 쌀 한 톨 한 톨이 내 재산이니 피땀을 쏟는다.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낸다. “검은 구름이 몰리는 걸 보닝께 오늘 니얄 한 줄금 허것는 디?” “예끼, 이 사람아. 어느 구름에 비 들었는지 누가 안 디야?” 6·25 전쟁 중에 가장 혁혁한 전과를 올린 명장은 임부택 소장이다(1919-2001). 장군의 7연대는 개전 첫날부터 춘천·홍천 지구에서 북괴군 2개 사단을 괴멸시키며 유일하게 3일을 버텨, 국군은 전열
결혼식 풍속도가 변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가족과 가까운 친지만의 잔치에 주례는 거의 사라졌다. 이런 변화에는 장점도 있겠지만 결국 결혼의 무게감 또한 가벼워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과거에는 갑자기 주례가 빠지면 예식장의 대리 주례자가 등장하였다. 말끔한 정장에 유창한 주례사가 일품인데, “신록이 짙어가는 화창한 봄날에...”로 시작하는 천편일률의 ‘미사여구’였다. 그래서 미사여구 하면 성의 없고 내용이 빈약한 허사(虛辭)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지난 7월 15일 대전에서 전직 의장단 회의가 열렸다. 협회장 직선제 실시 후 관례처럼 뒤따르는 ‘선거결과 불복행위’가 도를 넘었으니, 원로들이 중재에 나서달라는 여론에 따른 것이었다. 세 시간이 넘는 열띤 토론 끝에 결론은, 의장단과 필자에게 당사자를 만나 조정을 시도하라는 위임이었다. 만남은 무산되고 박 의장의 ‘소송중단촉구’가 보도되었으나, 부척연은 이 또한 “내부 협의, 화해는 미사여구” 라는 거절로 응답하였다. 대전 태화장에서는 기자들을 내보낸 뒤 매우 격앙된 대화가 오고 갔으나, 박 의장은 외부에 공개되는 촉구문에 지극히 절제된 완곡한 표현을 한 것인데, 대화의 자리마저 거부한 부척연의 ‘미사여구’
오쨔노미즈역(御茶노水驛) 철길 위에 걸린 다리를 건너면 도쿄이카시카(東京醫科齒科) 대학이다. 속세와 도량(道場)을 갈라놓은 협곡(峽谷)을 지나는 느낌이랄까? 교정과 서정훈 교수님을 모시고 미우라(三浦) 선생을 뵈러 가는 다리 위에서(1987), 두 장면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첫째는 이화여대 교문 앞. 좁다란 샛길을 내려가면 다리 밑 납작한 판잣집에서 갓 출시가 시작된 라면을 팔았다(1965). 고춧가루 풀고 단무지 서너 쪽을 곁들이면, 짜장면 반값에 무한행복이었다. 하숙집 그린 필드에서 풀만 먹던 뱃속에 뜨거운 닭 국물(소문은 고래 고기 육수라고 했다)이 주르르 흘러들면, 그건 바로 감동이었다. 밤 10시쯤에 슬리퍼 차림으로 내려가서 라면 한 냄비 뚝딱하고 돌아와, 연탄불 따끈한 하숙방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우면, 이내 꿈나라로 빨려 들어갔다. 둘째는 서울역 북쪽 철길 위에 걸린 염춘교(鹽川橋) 다리. 소공동 본과 4년간을 만리재 중턱 외숙 댁에서 걸어 다녔다. 걸어서 30분 거리인데, 전매청 담장 밑으로 도랑을 건너는 샛길로는 조금만 서두르면 20분으로 족했다. 염춘교를 지나 이제는 수제화(手製靴) 거리가 된 중림동에 들어서면, 일제의 유물로 보이는 포도석
초등 5학년 때 자치회장에 뽑혔다(1953). 만 5세 갓 넘어 입학한 탓에 워낙 작고 어려 줄반장도 어려웠지만 회의 진행은 문제없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반만년 역사에 시민사회와 자유와 민주를 ‘겪지도 배우지도 못한 국민’을 깨우치자면, 교육이 먼저임을 꿰뚫어보고 교육입국(敎育立國)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다. 일제 치하에서 늘어난 문맹률이 어느 정도 줄자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자치(自治) 체험을 제도화한 것이다. 4·19 혁명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고등학생이다. ‘전국 최초로 전교생이 일어선’ 대전고등학교 3·8 데모는 우리 61학번의 쾌거였다. 그러나 4월 26일의 ‘하야(下野) 성명’은 독재자의 구명(求命) 퇴진으로만 단순화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첫째, 제4대 대선은 86세인 노대통령의 유고시 승계문제로서, 초점은 부통령후보에 맞춰져 있었다. 야권 제1후보가 공교롭게도 잇달아 급서(急逝: 신익희 조병옥)하여 이승만 당선은 기정사실이요, 문제는 이기붕 부통령후보의 부정이었다. 둘째, 따라서 3·8 당시 우리 구호는 “학원에 자유를 달라, 학원에서 선거운동을 배격한다, 서울신문 구독 강요하지 말라!”에 그쳤다. “이승만 물러가라!”는 귀교하던 고려대생
남과 북의 국력이 그만그만하던 1970년대 초, 육지에서 뚝 떨어진 서해와 남해의 수많은 낙도(落島)는 간첩선이 노리는 안보 취약지역이었다. 해군에서는 매년 정훈담당 중령을 단장으로 공연팀과 진료팀에 온갖 선물을 싸들고, 주민을 달래는(宣撫) 홍보선을 띄웠는데, 통상 중위를 보내는 유배(流配?) 자리에 필자가 찍혔다. 한 달 동안에 20여개 섬을 순회하는 강행군이었지만, 멀미를 모르는 체질 덕분에 크루즈여행처럼 즐겁고 멋진 추억으로 남았다. 그중에서도 해변이 온통 검은 몽돌로 뒤덮인 소안도의 하룻밤이 기억에 생생하다.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자리에서 일어나 해변에 나가 누웠다. 좌르륵 쓰르륵 파도에 밀고 쓸리는 자갈의 합창소리에 스르르 두 눈이 감긴다. 당시 대위 1호봉이 만원 남짓인데, 어느 일본회사가 자갈을 4억 원에 사가겠다고 제안했단다. 수만 년 파도에 갈고 닦인 자잔한 조약돌이 그토록 값진 자산이라니... 1995년 8월 치의신보에 실린 칼럼 ‘새로 적는 노트’를 일부 인용한다. “주택 2백만 호 건설은 6공 공약이었다. 건축자재가 동이 나자 저질 수입품을 마구 썼다. 소금기를 씻지 못한 바닷모래(海砂)에 자갈 대신 쇄석(碎石)이 들어갔다. 망치만
정관장에서 목캔디를 사서 나오는데 갑자기 몸이 붕- 뜬다. 철제 보조계단에 발이 채인 것이다. 골절은 안 돼! 하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치면서, 오른손을 모로 짚고 앞으로 굴렀다. 툭툭 털고 일어나니, 등에 멘 배낭 덕분에 뒤통수와 등도 말짱하다. 60여 년 전 몸에 익힌 전방회전낙법(앞구르기) 덕분에, 저절로 낙상(落傷)을 모면한 것이다. 겨울 방학 체육관의 기계체조 훈련은 몹시 추웠는데, 깡통에 숯불을 피워 주전자에 물 데우기 등 온갖 심부름은 모두 신참의 몫이요, 군소리는 고사하고 걸핏하면 기합받는 일이 당연한 일과였다. 부상은 아차 하는 순간이므로 고도의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체조반 군기는 삼엄하다. 공중회전을 배우려면 떨어질 때 충격을 줄이는 낙법부터 시작한다. 그것도 말로는 아무 소용이 없고 수백 수천 번 연습으로 몸이 기억해야 한다. 첫 회전은 공포 그 자체다. 조교의 시범을 지겹도록 살핀 뒤, 도움닫기로 가속하여 몸을 솟구치는 각도와 회전시작 시점과 착지(着地) 동작까지, 정확하게 구령에 맞춰야 한다. 회전 순간은 조교가 팔뚝으로 허리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회전을 도와준다. 그렇다. 신뢰하니까 몸을 맡긴다. 뒤에서 자전거를 잡아주던 손처럼,
십층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버스정류장 8개가 곧게 뻗은 알록달록 8차선 도로다. 전국에서 영화와 드라마를 찍으려 찾아오는 세트 시설 스튜디오 큐브 앞에, 지난 연말 새 그림 하나가 추가되었다. 천체(天體)를 상징하는 동글납작한 트러스 형 돔 구조 안에, ‘어린 왕자’ 별 기둥이 들어앉은 대형 탑이다. 밤이면 지팡이 꼭대기 붉은 별이 트러스에 빼곡한 LED 전구들과 함께, 아름다운 빛의 축제, 루미나리에를 이룬다. 이름하여 ‘영원한 빛 - 우주’, “인류가 지향하는 미래에 대한 꿈과 가치”를 표현했단다. 예산과 노력을 기울여 이러한 상징물을 세울 만큼 대한민국이 성장했구나, GDP $35,000 국민으로서 가슴이 뿌듯하다. 백 미터쯤 지나 신세계백화점과 대덕대교를 잇는 횡단보도를 만난다. 신호가 나서 걷는데 삐익! 좌회전하던 승용차가 코앞에서 급정거한다. 멈칫했다가 마저 건너자 빵 빠앙, 뒤에 선 시내버스가 경적을 울린다. 노인네 지나갔으니 빨리 출발하라고 승용차를 재촉한다. 푸른 신호는 아직 15초나 남았는데... GDP 천 달러가 못 되는 미개한 후진국형 ‘자동차문화’다. 둘 사이 거리가 고작 백 미터다. 숙소 사빌에서 ‘9 to 5’인 오피스텔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