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꿈꾸는 세상 ‘위메진’ 어릴적부터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가끔은 부정적이거나 음탕한 쪽으로 치우치기도 했지만 되도록 제 자신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상상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시크릿’이라는 책의 내용처럼 저는 상상을 하고 이것이 실현되었다고 믿음으로써 강한 추진력을 얻어서 크고 작은 일들을 성취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일을 실행하기에 앞서 습관처럼 상상력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상상하다’라는 뜻의 이메진(Imagine)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제 자신의 행복과 성공을 꿈꾸고 좇으면서 하루하루 발전해 나가는 모습에 흡족해하던 어느날 다음과 같은 글이 저의 가치관을 바꾸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쉽게 자신의 마음을 바꾸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하면 제게는 큰 영향력을 발휘한 문구였습니다. ‘어떤 행복도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게 하지 않으면 지속적일 수 없다.’ 어릴적 막연히 다니던 교회에서 듣던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경구절이 동시에 이해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당신의 이웃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행복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명확한 메시지 였습
울어 보셨습니까? 모든 이의 삶은 울음으로 부터 시작한다.첫 울음은 엄마의 산고를 잊게 하는 행복한 탄생의 울음이다.이울음은 오직 하나다. 왕후장상의 울음이 따로 없고 말구종, 여릿군, 까정이패, 각설이패, 화적패, 논다리, 더벙추의 울음이 다르지 않다. 이울음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곧은 선물이며 옹근 몫이다.울어 보셨습니까? 동계 올림픽에서 우승한 김연아의 눈물이 아니어도 좋다.찌든 삶 속에 한푼 두푼 옹골지게 모은 돈으로 처음 자기 집이라고 15평짜리 아파트를 샀을 때, 창가에 서서 자기도 모르게 흘리는 눈물은 환희와 기쁨의 눈물이며 끝내 해낸 성취의 눈물이다.이때만큼은 지난날의 모든 사연들이나 괴롭고 안타까웠던 모대기가 모두 사라져 버린다.울어 보셨습니까? 이건 큰 싸움이다. 인생의 갈림 길이기도 하다. 꼭 이겨야 했다.전쟁, 전투가 아니고 우리 생활 속의 입시, 선거, 진급, 당첨, 말질 등에서 이겨야 했다.그러나 매양 떨어지고 석패와 열패로 얼룩졌다.어느 누가 말하기를 ‘자기는 운전면허 시험까지 합해 인생의 합격률이 45%라 한다." 그럼 55%는 울었다는 얘기 아닌가?울어 보셨습니까? &nb
철원의 봄·여름·가을·겨울 “104번 사관후보생, 6사단"“훈육장교님, 6사단이 어딥니까"“철원이다" 작년 4월 초임 군의관 배치를 받고 좌절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주로 남쪽, 대도시에서만 살아온 나로서는 우리나라 최북단 시골에서의 삶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국방부의 시계는 거꾸로 놓아도 간다는 말처럼 어느덧 1년이 지나고 교류도 해서 지금은 서울 근교에서 나름 편하게 군의관 생활을 하고 있다. 작년 철원에서 보낸 생활을 바탕으로 잠시나마 철원 홍보대사로 나서볼까 한다.봄작년 봄, 철원에 배치받고 군의관들과 단체로 참가했던 안보관광.역시 철원에 왔다면 안보관광이 빠질 수 없다. 철원은 해방 후 6·25 전까지 북한의 체제 아래 있던 곳으로 철원 평야를 중심으로 쌀 수확량이 많아 인근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안보관광은 서태지와 아이들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로 유명해진 노동당사를 비롯해 ‘철마는 달리고 싶다"의 열차가 전시된 월정리역, 평화전망대, 제2땅굴 관람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관광을 마치고 허기를 채울 식당으로 민통선 안에 위치한 ‘전선휴게소’식당을 추천한다. 민통선 안의 깨끗한 한탄강
요새 내가 하고 있는가치있는 일들 내가 개원하고 있는 성남에서 치과의사회 공보 영역에서 일한 지 2년여가 되어간다. 공보이사가 뭐하는 자리인줄도 모르고 그냥 회보발간만 도와주면 된다는 선배의 말에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어물쩍 맡게 되었다. 처음엔 정말 회보발간을 도와주는 업무로 일년에 한번 내지는 반년에 한번 발간되는 8페이지 분량의 아주 단순한 소식지를 발간하는 일로 가정과 일을 병행하는 데 크게 부담되지는 않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장안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최고의 사랑’에서 톱스타 배우인 독고진과 비호감 생계형 연예인 구애정의 ‘레벨’이 다르듯 2년여가 지난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레벨’이 되었다. 먼저 소식지의 발간이 격월에 한 번씩으로 정례화 되었고 그 사이 소식지의 이름도 회원들의 공모를 통해서 ‘성남치원’으로 명명이 되어졌다. 또한 홍보위원회를 조직하여 구강보건의 날을 앞둔 지난 5월에는 지역에서 영향력이 큰 지역방송과 지역신문 기자들에게 치과치료에 관련된 정보들과 치과계 관련 소식들을 전달, 보도되게 하여 일반 시민들에게 치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현재는 회원들의 과반수가 넘
‘아빠와 나’ 지금은 어린이들이 거의 대부분 다니는 유치원이 내가 어린 시절은 흔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거의 형제들이 4~5명은 되는 시절에다가 흔히 집안에서 어머니께서 어린 자녀들과 가족들을 챙기시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 유치원에 다니는 것은 일종의 사치였고, 셋째인 막내동생이 태어나기 전 연년생으로 태어난 남매중에서 나는 장녀라는 특권(?)으로 부모님께서 다니시던 교회의 부속 유치원에 다니도록 배려하셨다. 그런데 유치원에 신나게 다니던 나와는 달리, 교편을 잡고 계신 어머니께서 유치원에 다니도록 나를 배려하여 주시는데는 많은 수고가 따랐다. 시시때때 잘 다린 유치원 교복은 물론이고 계절이 바뀌면 달라지는 유치원 교복 챙기시기, 재롱잔치와 소풍갈 때면 이것저것 배려하시기, 친구들에게 뒤지지 않는 귀여운 머리모양이랑, 머리핀 등등…. 여하튼 여자아이라서 매우 손이 많이 갔던 것 같다. 유치원의 큰 행사는 단연코 생일잔치이다. 생일잔치에는 그 달에 생일이 있는 아이들에게 유치원에서 생일상을 차려준다. 그리고 여자아이는 유치원에서 제공한 예쁜 족도리를 쓰고, 집에서 챙겨온 한복을 입어야 한다. 남자아이들은 양복을 입고, 와이셔츠도 입으며, 나비넥타이를 제
배려(配慮) 아침 출근시간, 우리치과 엘리베이터 앞은 항상 만원이다. 15층 대형 클리닉 건물이다 보니 출근시간이면 먼저 타기 위해서 전쟁을 치른다. 엘리베이터 한 대를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니 다들 하나 둘씩 엘리베이터 문 앞으로 바짝 다가선다. 그러면 나는 뒤로 물러나서 다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곤 한다. 내가 조금 지각해도 나의 출근시간을 따지는 사람이 없으니 작은 배려를 할 수 있어서 즐겁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리번거리는 어르신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엘리베이터 걸(?)이 된다. 층을 누르는 스위치 자리에 바짝 다가서서 자연스럽게 외친다. “몇 층 가세요? 어르신! ^^”“5층요!… 7층요!”“4층 가시는 분은 안계신가요?”라고 하면 엘리베이터 저 구석에서 외마디 외침이 들려온다.“11층요!!!” “네” 대답하고 나면 층마다 내리는 분들이 안전하게 내리기까지 열림 버튼을 누른다. 7층 문이 열리면 아름다운이 치과 우리 직원들이 먼저 내리게 배려한다. 빨리 가서 출근카드를 찍으라는 배려다. 지각할까봐 엘리베이터 앞에서 뛰는 직원들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진료가 끝나고 환자들이 입을 헹구고 나면 “티슈”라고 종종 외친다. 환자분들은 입술에 묻은 물기를
가족과 함께한 등산의 즐거움 예전엔 등산이 좋은 줄 몰랐다. 아니 그것보다는 산의 고마움을 몰랐던 것이 아닐까 싶다. 연세가 많으신 선배 치과의사 분들한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나이 40을 넘기니 예전 한창 때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술을 통해 배운다. 학창 시절에는 힘든 수업을 마치고 나와서 선후배들과 술을 마시고 기껏해야 3시간 정도 자고 또 나와서 공부를 하고 테니스 한번 때리고 나면 개운했었다. 한창 시절까지 안 내려가도 몇년전까지만 해도 술 좀 먹는다 싶었지만 요즘엔 술자리를 골라서 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몸을 챙기게 되고 뭐 좀 좋은 거 없나 건강을 챙기기 위해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러던 중 집 앞에 조그만 산 하나를 발견! 일단 혼자 올라 봤다. 등산이라고 하기엔 좀 민망한 높이. 그러나 도심에 자리잡고 있는 산이지만 공기부터가 다르다. 더욱 매력적인 것은 두 아들래미와 결혼하기 전 몸매를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 몸매를 갖고 있는 와이프도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높이다. 그래도 동네 뒷산이라 하여도 산은 산이지 않은가? 가끔 숨이 턱턱 막히는 구간이 있지만 이게 산의 매력이다 싶어 움직이기 싫어라 하는 가족들을 이끌고
응석사 지난 주말 나는 마음이 맞는 오랜 친구와 함께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서울을 떠나 잠시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눈과 귀가 쉴 수 있는 곳으로 여행지를 잡기로 하고 고민하던 중 출가하여 스님이 된 친구가 떠올랐다. 8년 전 쯤 알게 된 친구는 어느 날 스님이 되겠다며 속세를 등지고 해인사로 들어갔다. 지금은 경상도 어디 절에 있다고 했는데… 산 속 고요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면 하룻밤 신세를 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연락을 취했고, 흔쾌히 그는 허락했다. 함께 가기로 한 친구가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에 그녀는 기쁜 맘으로 여행길에 올랐고 나도 오랜만의 여행에 마음이 설레었다. 우리가 다녀온 응석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로, 집현산(集賢山, 높이 572m) 동남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절로 올라가는 길은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둡고길고 구불거려 오르는 내내 겁이 났다. 절에서 일을 봐주시는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요즘 같은 여름 날씨엔 동네 주민들이 그냥 도로에 멍석 깔고 길에서 잠을 청하기 때문에 올라오는 동안 사람
연아이글스를 생각하며… 20년전 우리는 막연한 의문을 가지고 모임 하나를 만들었지. 언젠가 먼 훗날에 이 모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지난 5월 29일 수원에서 치러진 ‘연아이글스 창단 20주년 기념식’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행사 내내 흥분하며 상기 되었고, 때론 시간 앞에서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날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떠오르자 옛이야기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잠시 나는 꿈을 꾸듯 그날로 걸어 들어가 본다. 연아이글스는 연세치대 축구부의 졸업생 모임이다. 따라서 1991년에 창단되었지만 1970~80년대의 학창시절의 추억들이 이 모임의 근간을 이룬다. 지금도 생생하지만 처음 축구부를 노크하던 날, 그 가족 같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는 집을 떠나 처음으로 세상이란 큰 조직에 속한다는 벅찬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때 가슴에 새겨진 첫인상은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었다. 이렇게 나는 축구부에 빠져들어 갔다. 6·9제를 준비하는 짧은 봄날의 에피소드지만 축구부는 우리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주었다. 모두가 낮에는 축구선수였고 밤에는 술꾼이 되어 닭똥냄새나는 신촌시장을 배회했었다. 마치 인생길에 미처 나서기도 전에 지쳐
24시간주! 5월 7일(토) 오전 11시~8일(일) 오전 11시까지 24시간주 국가대표선발전이 한국체육대학교트랙에서 13명의 24시간주와 11명의 12시간주(A조-2명, B조-9명)선수가 참가 한 가운데 열렸다. 체대생과 실업선수들 훈련이 늦게 끝나서 12시반부터 시작했고 12시간주는 200바퀴 80km, 24시간주는 400바퀴 160km가 최소완주 기준이다. 국가대표선발자격은 220km(550바퀴)이상이며 4시간마다 트랙도는 방향을 바꾸고 각자의 개인부스가 있어서 음식과 물, 개인봉사자 등을 둘 수 있다. 12시간주는 24와 같이 출발과 12시간 지난 후에 출발하는 두 팀으로 나눴지만 거의 B조로 출발했다. 목표는 180km, 450바퀴로 세우고 다른 선수들의 거리와 속도는 신경쓰지 않기로 하고 천천히 뛰기로 했다. 30km를 달린 후 처음으로 5분가량 쉬며 빵과 물을 마셨고 50km(125바퀴)를 마치고 죽과 좋아하는 족발을 먹으며 힘을 충전했다. 저녁이 되어 선선 해져서는 조금씩 속도를 올리는데 초반에 오버한 몇 몇 선수들은 기권을 했고 클럽회원들이 응원을 오기시작해서는 더 힘이 나기 시작했다. 회원들의 도움으로 맛사지도 받고 맛
봉사가 벼슬이 아닌데… 봉사를 하긴 오래 한 것 같다. 1974년 학창시절부터 의료봉사를 했으니 근 40년이 되어간다. 1970년대 국내 의료봉사는 신바람 나는 봉사였다. 농어촌마다 서로 자기네 고장으로 진료를 와 달라고 성화를 했으니 말이다. 정말로 봉사 할 맛이 났었다. 요새 국내 의료봉사는 거의 사라지고 의료보험 때문에 환영도 받지 못 한다. 대신 해외 의료봉사는 종교단체, 각종 봉사단체, 여러 의치과대학교가 서로 가겠다고 벌떼 날듯 난리다. 나라가 그 만큼 잘 살게 되었다는 게다. 그런데 해외 의료봉사에 대해 말이 많다. 혹자는 말한다. 3~4일의 해외진료로 무슨 의료봉사가 되겠는가? 어떻게 3~4일 만에 병을 고친단 말인가? 이는 자신들의 낯내기 봉사지 진정 그 곳 사람들을 위한 봉사가 아니다. 이런 봉사는 큰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한다. 다른 이는 이렇게 말한다. 3~4일의 봉사가 어때서? 봉사를 안 하는 것보다는 얼마나 더 좋아? 우리의 6·25 때를 생각해 봐. 힘들고 배고프고 아플 때 작은 도움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희망이 되었는지를 6·25 경험을 통해 잘 알 수 있잖아? 봉사에 덧칠을 해서는 안 된다. 그냥 봉사 그 자체만으로 큰 뜻이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