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해 예전에는 쉽게 할 수 있던 것들이 대부분 제한되면서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높은 수준의 인터넷 망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감사히 여기며, 동영상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여 여가시간을 즐기고 있다. 요즘 즐겨보는 것은 ‘삼국지(三國志)’의 장편 드라마 버전인데, 어릴 적부터 추천 도서로 알고는 있었지만 10권 정도 되는 분량이라 항상 ‘도원결의(桃園結義)’ 정도까지 보다가 그만두곤 했던 작품이다. 지금은 치과의사 국가고시를 코앞에 둔 수험생 신분으로 공부만 빼면 모든 것들이 재밌어 보이는 상황이 되었고,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한 편씩 보면서 그들이 처한 상황을 함께 고민해보다 잠자리에 드는 것이 하루의 소소한 낙이 되었다. 주말이 되면 일주일을 열심히 보낸 나에게 상을 준다는 의미로 ‘퀸스갬빗(The Queen’s Gambit, 2020)’이라는 드라마를 한 편 본다. 1950-7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인데, 약간은 빛이 바랜 듯한 영상미와 함께 ‘체스(chess)’라는 특별한 소재가 굉장히 흥미롭다. 내용도 내용대로 재미있지만, 해외여행이 거의 불가능에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20년동안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며 속해 있는 기관 또한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이다 보니 성경 말씀 중 창세기 정도는 수없이 읽어보았다. 위에 말씀은 개역개정 성경의 창세기 1장에 28절 말씀이다. 해당 성경말씀의 ‘다스리라’라는 단어는 영문 번역 번 중 King James Version을 보면 “have dominion over”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이 dominion이라는 단어를 dominate라는 단어와 혼돈하여 군림하는 conquer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으나 사실은 통치하는 개념인 govern에 가깝고 실제로 다른 영문 버전인 New International Version에서도 이를 “rule over”라고 번역하고 있다. 동물을 보호하고 잘 조화롭게 사는 것은 종교를 떠나서 현대사회에서는 윤리적인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인간의 이득을 위하여 동물의 고통을 야기하는 일에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변화하고 있는 세상이다. 화장품의 경우 유럽에서는 동물에게 실험한 화장품의 판매를 2009년부터 부분적으로 판매 금지하였고
주제가 자유라는 수필 의뢰를 받고 글 재주가 없는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쓸까 매우 고민이 되었다. 나는 감염관리전문회사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 1년은 모두에게 충격이었겠지만 내게도 큰 충격이었고 감염관리회사 연구원으로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한 해였다. 그래서 코로나19와 나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우리 일상 사방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코로나 스토리에 모두들 지쳐 있을 것 같아 오늘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써 볼까 한다. 최근에 유튜브에 온라온 강의 하나를 들었다. 주제는 ‘내 아이의 뇌에 어떤 스토리를 심어줄 것인가?’ 였다. 아이의 뇌 속에 어떠한 스토리를 만들어 주느냐에 따라 아이가 살아가는 힘이 달라진다는 내용이었다. 부모들이 많이 하는 실수 중에 아이의 강점을 살려주기 위해 아이가 인생을 잘 살아가기 위해 부모 스스로가 믿는 스토리를 아이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내 뜻대로 잘 따라오던 아이는 사춘기를 기점으로 스토리를 벗어나게 되고 부모는 내 스토리 안에서 벗어난 아이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는 강의 내용이었다. 내게는 초 3부터 사춘기를 겪고 있는 것 같은 13살 아들이 있다. (선배 부모들은 사춘기는 시작도 안했다는 절망적인 팩트로 나
요 근래 유튜브/왓차 등의 동영상 프로그램에서 가짜 사나이라는 프로그램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MBC의 예능 프로그램 리얼 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의 패러디물로 인터넷 방송인들이 지원하여 무사트 해군 특수전전단 훈련 과정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다. 2020년 7월 9일, 1기의 1화가 공개되면서 대한민국 인터넷 방송 업계에 엄청난 파급력을 끼쳤고 지상파, 케이블, 종편을 비롯한 텔레비전 방송에도 자주 언급될 정도로 2020년 화제가 가장 많이 되었던 한국 방송 콘텐츠라고 한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진짜 사나이 등의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주었던 군인들의 미화된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예능 프로그램이기에 각색된) 일상과 훈련을 배제하고, 더 철저하게 실전처럼 특수부대 군인 본연의 정신력과 체력을 시험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일반인이 감당하긴 힘들 훈련을 지원자들에게 부여하고 교관들이 1:1로 지원자들을 마크하면서, 종을 3번 치고 퇴교를 해서 훈련을 끝낼것인지, 힘들지만 계속 본인과의 싸움을 통해 육체적/정식적으로 고통받는 것을 참고 이길 것인지의 선택을 종용하고 있다. 필자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느꼈다. 과연 내 인생에서
치아나 사람마음에 금(Crack)이 가면 다시 예전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 금(Crack)이 표면(겉부분 - 치아의 사기질이나 마음 겉 - superficial depth)에만 있다면 특이한 증상이 없다. 이 단계에선, 치료는 필요 없고 금(Crack) 유발요인에 대한 환기와 그 주의사항을 준수하도록 일러준다. 치아나 사람마음의 금(Crack)의 유발원인은 대개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보다 깊이(속부분 - 치아의 상아질 층이나 마음 내면) 그 금(Crack)이 진행되어 있는 경우, 겉으론 정상인 듯 보이지만 그 곳에 자극을 줄 때마다 아픔(동통 - painfulness)이 시작된다. 치아나 사람은 조금씩 무너져 간다. 특효 치료나 비법은 아직까지 없다. 예방이 최선이고, 금(Crack)이 생긴 경우 가능한 빨리 발견해서 더 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보호(크라운 수복 - 경청과 공감, 격려)부터 해준다. 반드시 증상 진행여부를 관찰(Follow-up)해야 한다. 만약, 증상이 심해지면(치아 신경까지 금(Crack)이 진행됨 - 마음의 평안이 무너짐) 치아 신경치료(- 깊이 있는 공감 및 대화)도 해주어야 하며 이는 아픔을
나는 가정과 회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워킹맘이다. 가정에서는 결혼 14년차 가정주부이자 두 아이의 엄마이며, 회사에서는 예방치과 교육 및 컨텐츠를 기획하는 일을 한다.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 고군분투 하던 2018년 어느 날 나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우울증이다. 하루하루를 전투모드로 일을 쳐내는 마음으로 살아오다 보니 심신이 매우 지쳐있었다. 마음의 여유는 없었고, 가정과 회사에서 바라는 건 송유정이 아닌 ‘슈퍼 원더우먼’인 것 같았다. 때문에 일이 안되거나 내가 힘들어지면 타인을 원망하고, 나를 자책하며, 무기력했다. 이를 탈피하고자 남편에게 털어놓기도 하고, 심리치료사에게 상담도 받았다. 가족여행도 가고, 나를 위한 시간도 가져봤지만 그때뿐이었다. 좋아지는 것 같다가 혼자 있을 때면 공허하고 저절로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마음의 병을 탈피하는 방법들을 알아나가기 시작한 어느 날,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미라클모닝’을 접하게 되고, 마음의 병을 퇴치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시작하게 되었다. 시간에 쫓기는 일상이 아닌 새벽에 일어나 온전히 나를 바라보고,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생겼다. 저절로 아침시간이 여유로워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사람들 사이의 교류가 당연해지지 않은 것도 어언 1년이 되어간다. 모두가 집 밖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람이 모인 어느 곳을 가든 체온을 측정하며 방문자 목록에 개인 정보를 작성한다. 처음에는 마스크를 깜빡 두고 오는 바람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전 급히 약국에 들러 마스크를 사기도 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마스크 없이 길거리에 나서면 허전할 정도이다. 어색하기만 하고 쉽게 적응할 수 없던 것들이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익숙해지는 현재의 상황이 씁쓸하기도 하다.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들을 되짚어보고, 익숙함 속에서 조금은 무뎌졌을지도 모를 코로나19가 앗아간 우리의 일상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고자 한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인터넷 상에서 이와 관련한 수많은 신조어들이 생겨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몇 개의 단어들을 소개하려 한다. 우선 사회적 거리두기 차원에서 외출 및 모임의 자제가 권고되고 많은 부분들이 비대면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을 ‘un’과 ‘contact’의 합성어인 ‘언택트’라고 표현한다. 학생들은 선생님 혹은 교수님과 같은 공기 속에서 수업을 듣는 대신 화면 너머의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말이 한창 유행인 적이 있었다. 한창 사건 사고가 많아서, 혹은 세상살이가 팍팍해서 그런지 ‘툭!’ 하고 누군가 내뱉은 말이 남녀노소 공감을 일으킨 사회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 접어들고 사회 발전에 따라 우리 일상도 다양성이 커지면서 사건 사고도 다양해졌다. 뉴스를 접하다보면 정말 ‘엽기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상식 밖을 뛰어넘는 일들이 많아져서 그런지 그저 무서운 마음이 든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몰려든 일거리를 발 빠르게 처리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순간마다 ‘괜히 이불 밖이 위험한 게 아니야’라는 생각이 매 순간 종종 들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이러한 모습들을 제3자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 결국 이불 밖이 위험하다는 말은 개인마다 찾아오는 이러한 일상의 어려움이 이미지화 된 것 같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잠깐만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이부자리는 일상을 벗어나 그 이상 안락할 수가 없는 휴식 공간이지 않나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모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가장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순간이 이부자리 외에 또 있을까? 물론 다음날 이어질 고된 일상을 생각한다면
인생은 끝없는 도전과 성취,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의 깨달음을 통한 새로운 도전의 반복인 것 같다. 고등학생 때는 “이제 대학만 가면…”, 치대에 입학했을 때는 “이제 졸업만 하면…”, 치과의사가 된 후엔 “이제 개원만 하면…” 등등 매 순간 미래의 가시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도전하며 지금까지 달려, 어느덧 개원의가 됐다. 하지만 아직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낀다. 초, 중, 고 시절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고,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그런데 고학년이 되고 성적이나 진로 설정에 대한 고민을 해야만 하는 분위기로 떠밀려 들어가며 친구들과 경쟁을 하게 된 것이 불씨가 되어, 여전히 도전 없는 삶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치과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독일 친구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내 자신을 위해서도 낙제를 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몇 년을 공부에만 열중하며 살았다. 한국에 돌아와 치과의사 면허 취득 준비를 하던 시절에는 ‘꼭 합격해야 한다’는 생각에 열중하며 살았다. 페이닥터 시절을 거쳐 개원의까지 오는 동안에는 임상의로서 필요한
잔다. 눈을 끔뻑 끔뻑하더니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것도 내 침대에서. 그와 함께 한 지난 4년여의 동거 기간 동안 내 침대는 그의 침대가 됐고, 나의 많은 것들을 그에게 빼앗겼으며, 함께 공유해야 했다. 사람도, 물건도. 퇴근 후 쉴라치면 종종 무방비 상태인 나의 입술을 훔치기도 하고, “앗! 뽀뽀 싫다고!”, “침? 더럽게시리.” 4년여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그의 입맞춤은 별로다. 때로는 저돌적인 눈빛으로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경우도 많다. 이런 그와의 생활은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는 않겠지만 나의 인생에서 빼 놓을 수 없게 된 존재가 된 그. 견(犬)이다. 이름은 쇼콜라, 지금은 ‘콜라’로 부른다. 나름 고급진 ‘쇼콜라’의 느낌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행실 자체가 귀족스럽지 못한 부분들이 많이 포착돼 약간 저렴하지만 부르기도 편하고 입에 붙어서 지금은 ‘콜라’로 불리고 있다. 그래도 그는 ‘콜라’로 만족하는 듯하다. 하기야 ‘순대’보다는 나을 테지. 내가 처음에는 ‘순대’로 부르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는 4년 5개월, 종은 푸들. 색은 진한 초콜릿 색과 순대 색, 콜라 색을 넘나든다. 털? 잘 안 빠지고, 잘 안 보인다. 이 부분이 콜라가 우
그 미용실 고양이들을 알게 된 것은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츄리닝을 입고 동네 산책을 하던 중이었는데, 통유리로 된 미용실 유리문 안에서 냐아냐아 울고 있는 노란 고양이를 발견했다. 울음소리가 직접적으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고양이의 핑크색 혓바닥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무지하게 심심하다고. 그래, 내가 놀아줄게. 나는 쭈그리고 앉아 주먹을 쥐고 통유리 문을 톡톡 두드렸다. 어슬렁어슬렁 유리문 바로 앞으로 다가온 고양이는 갑자기 푹 주저앉더니, 꼬리로 바닥을 몇 번 탁탁 쳤다. 어떻게 놀아주지, 나는 하얀 마스크를 벗어 고양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흔들었다. 고양이의 눈꼬리가 점점 가늘어진다. 그러고는 찢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훽 뒤돌아 가버렸다. 실룩거리는 노란 고양이의 엉덩이를 아쉬운 눈길로 좇던 나는 멀리 스크래쳐 위에서 자고 있는 작은 노란 고양이를 한 마리 더 발견했다. 유리문에 빛이 반사되어 잘 보이지 않아 두 손으로 빛을 가리고 열심히 쳐다보았다. 이 여자 뭐지, 하고 쳐다보는 행인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이후로, 산책을 나갈 때마다 그 미용실 앞을 서성거렸다. 내가 산책을 할 수 있는 시간이야 뻔하다. 약속 없는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