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환자) A는 교정치료를 받은 후 하악골의 우측 편위를 보이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에 원고는 피고(의사)의 교정치료 잘못으로 안면비대칭이 발생하였다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한 사건임. 1. 원고(환자)는 피고(의사)의 치열교정치료상의 과실로 안면비대칭이 발생 내지는 심화되었고, 원고가 기초사실 인정과 같이 피고에게 전원동의서를 요구하였음에도 피고가 이를 이행치 않아 원고가 대학병원 등에 갈 수가 없어 위 안면비대칭이 더욱 심화되었으므로 피고는 원고에게 위 안면비대칭을 치료하기 위한 악골수술비 및 이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 등 합계 48,000,000원을 손해배상금으로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함 2. 원고는 처음 진료당시 피고가 원고나 원고의 부모 등에게 원고가 안면비대칭이 있음을 설명하지 아니 하였는바, 만약 피고가 이에 관하여 설명을 하였다면 원고는 치열교정을 성인이 된 후로 늦추어 안면비대칭의 치료와 이를 병행하였을 것이므로 피고는 위와 같은 설명의무위반을 이유로 원고에게 위 주장과 같은 금원을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함 1.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2. 소송비
랩을 즐기는 요즘 청소년들에게 가요 ‘대한팔경’을 아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갸우뚱 할 것이다. 막연했지만 내가 금강산을 듣기 시작하기는 이 가요 첫 구절 ‘에헤 금강산 일 만 이천 봉마다 기암이요…’에서였다. 약주 한잔 하시면 기분 좋으셨던지 선친께서 일곱 살(1949년)인 나를 안고 이 노래를 부르시곤 했다. ‘신라의 달밤’도 그때부터 들어서 알고 있다. 금강산이 유별난 것은 이름이 여럿인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봄 금강산, 여름 봉래산, 가을 풍악산, 겨울은 눈 덮인 설봉산과 눈 없는 개골산 외에도 열반산·지저산 등 이렇게 일곱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직 풍악산을 못 보았다. 금강산 단풍, 그 모습은 아마도 최고 절정의 설악산 단풍과 같지 않을까. 그 파노라마로 상상만 할 뿐이다. 2000년 2월 3일, 설봉산이 나를 맞아 주었다. 만물초·구룡연 등산코스에 돌 하나 계단 하나 보이지 않았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희기만 한 설봉산이었다. 이어서 그해 5월5일 나는 꽃피는 금강산에서 그 동안 못 다했던 산정(山情)을 한껏 품어 보았다. “나는 말여 1939년이다. 청량리역에서 토요일 밤 10시 발 금강산행 기차를 타고 금강산을 갔었다. 밤새도
낯선 나라의 해변에서 섬으로 달려가는 길 청자사발에 담긴 짠 물 같이 답답한 내 가슴을 트이게 한다 산호초가 섬이 된 흰 모래톱에서 수평선까지 온통 에메랄드빛 남극의 하늘을 반짝이며 이곳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들인다 이 보석의 가루 웅덩이에는 밤마다 별들의 눈물이 고여이내 바다가 되어 넘실대니물새들도 앉기를 두려워한다 눈동자를 닦아주는 해초 넘실거릴 때마다 더없이 눈빛 맑아지는 이 바다 무엇을 연모하고 있는지
“가발을 만든 머리카락에는 그 머리를 기르며 품었던 기억과 애증, 슬픔이 깃들어” 영화 ‘가발"은 한마디로 참 무섭다. 치렁치렁 시커멓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익숙하면서도 섬뜩하다. 저 멀리 고전 설화에서부터 ‘전설의 고향’류 괴담의 주인공, 최근에 이르러선 ‘링’ 시리즈로 대표되는 산발의 사다코까지, 예나 지금이나 풀어헤친 검은 머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 품은 망령들은 예외 없이 머리를 길렀다. 원한을 말할 땐 여지없이 그것을 풀어헤쳤다. 머리카락은 어느새 공포의 아이콘이 됐고 공포영화의 관습이 됐다. 늘상 빗고 쓸고 손질하는 익숙한 내 몸이면서 몸에서 떨어져 있을 때에는 한없이 이물감을 느끼게 하는 낯선 것. 더구나 머리에 얹혀 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 분리된 가발이란 형태만으로도 기이함을 주는 대상이었다. 1천만 원이 사용됐다는 정교한 가발 제작기, 삭발을 감행했다는 주연배우의 투혼도 그 위에 얹혔다. 허나 정작 ‘가발"은 가발이라는 소재에 집착하는 영화가 아니다. 가발에는 이야기가 있다. 가발을 만든 머리카락에는 그 머리를 기르며 품었던 기억과 애증, 슬픔이 깃들어 있다. 머리카락 주인의 간절한 소망은 이뤄지지 못했고 그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은 한
전문분야 능력 인정 받아한국치과계 인지도 높여연수회·학술대회 참여선진기술 국내보급 한몫 치과의사들이 외국치대 교수로 세계무대를 누비며 한국치과계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토종 치과의사 중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현재 UCLA 치대 학장으로 재직 중인 박노희 학장.서울치대 치주과 출신의 박 학장은 지난 98년 미국 내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는 UCLA대학에서 동양인 최초로 학장에 당선되는 진기록을 낳으며 국내 치과계의 큰 자랑이 됐다.특히 학장 취임 후에는 뛰어난 비즈니스 마인드와 정치력으로 아시아인이란 편견을 극복, 대규모 연구비 수주와 기부금 모금 등을 통해 학교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철저한 교육행정가로서의 진면목을 과시하면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의 능력에 대한 검증은 지난 2003년, 5년 임기의 학장직 연임이란 결과로 나타났다. UCLA대학 역사상 두 번째 일어난 일이었다. 박 학장은 특히 바쁜 와중에도 꾸준한 연구를 진행해 수백여 편에 달하는 연구논문을 세계적 학술지에 게재했고 구강암 분야에서 세계적인 의학자로서 명성을 쌓으면서 학자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에 지난 2002년에는 한민족의 긍지를 지킨 자랑스러운
P. It seems very expensive. How would you like me to pay? Can I pay my bill periodically?매우 비쌀 것 같군요. 어떻게 지불할까요? 나눠내도 되나요? D. Yes, you can. You can pay only half when we start the treatment and pay the rest half when I put in the dentures.예. 치료를 시작할 때 반만 내시고, 틀니를 끼울 때 나머지를 내세요. P. Okay. What about my fear of wearing dentures?알았습니다. 틀니를 끼는 것이 두려운데 어쩌지요? D. I know you?e worried, but I?l try to make the dentures fit well in your mouth. You?l get used to them right away. I will try to choose your artificial teeth carefully.두려워 하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틀니가 입안에서 잘 맞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금방 익숙해질 겁니다. 틀니의 치아를 주의하여 선택하겠습니다
그동안 HNS연구소에서 의료소송과 관련된 사례들을 분석한 결과, 과거에 비해 점점 의료분쟁 판결이 의료인에게 불리한 결과로 내려지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이에 이들 사례중 발치와 관련된 사례 즉, 지치 발치 후 발생한 입술과 혀의 지각마비로 인한 소송에 대한 판례 일부를 살펴봄으로써, 의료의 문제를 법적·제도적으로 해결하려는 우리 주변의 상황과 그 문제의 심각성을 함께 느껴보고자 한다. 사건1: 치과의사 1심 패소 및 항소 기각 사건 내용: 매복 지치를 발거한 후 입술부위의 감각이상을 호소한 환자가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며 검찰에 의사를 고소하였다. 1심 판결: 표준 치근단 방사선사진으로 신경관을 확인하지 못하면 여러 각도의 촬영을 시행하거나 파노라마 방사선사진을 촬영하여 확인 후 발치하는 것이 합당하나 이를 확인없이 시술한 것은 의사의 과실이다. ·항소피고인의 항소 이유 : 피고인이 피해자의 치아를 뺄 당시 피해자에 대한 치아 표준 치근단 방사선사진상으로는 치근이 정상이고 혈관 및 신경관도 치근 아래로 통과하는 일반적인 형태의 것으로 보였으며 피해자와 같이 치근이 갈고리 모양의 기형인 경우는 10%정도의 확률에 불과하여 통
금강산은 약 1천만 년 전, 신생대 제3기 중세 이후에 진행된 경동성요곡운동(傾動性謠曲運動)으로 형성되었다. 지반(地盤)을 이루는 암석은 흑운모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 거의 대부분이다. 수직절리와 수평절리가 복합절리(複合節理)를 이루고 있다. 결과적으로 유별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금강산은 오늘의 북측 금강군 고성군 통천군 그리고 남측 고성군 지역을 통틀어 말한다. 금강산과 그 주변에는 원시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조상들은 이 아름다운 금강산을 곁에 두고 생활터전과 삶을 보다 더 풍요롭게 하여 왔다. 금강산은 일찍이 중국(唐 宋 明)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졌지만 1800년대 말부터는 유럽사람들에게도 소문난 산이 되었다. 문장 시 글 묵(墨)을 그냥 두지 못하는 선현들이 유람하고 남긴 문장이나 그림은 금강산을 명산으로 만들다 못해 금강산 이름을 듣기만 하면 꿈에서라도 꼭 가 보아야 하고 반드시 올라야 하는 산으로 만들고 말았다.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 주재 이탈리아 총영사였던 외교관 까를로 로제티는 귀국하여 한국의 구석구석을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자세하게 쓴 책을 냈다.그는 우리나라의 지형을 이탈리아와 비슷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