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칸에 한 사람씩 이름을 채워본다 가족 친구…… 문턱 낮추고 왕래한 사람들…… 누구를 빼고 누구를 넣을까 고민과 불면을 바꾼 시간이 내 관계의 삶을 만들었는데 내밀한 것들은 어느 칸에 적을까 나에게 꽃을 달아준 사람 부를 수 없는 이름은 어디쯤에 끼워 넣을까 화이트리스트는 점점 짧아지고 블랙리스트는 자꾸만 길어져 나 두서없이 어두워지는데 화이트리스트 맨 위 칸에 슬며시 그를 앉힌다 비밀한 죄 하나 받아 평생 속죄하고 싶은데 나는 과연 그의 어느 리스트 어디쯤 올라있는지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넣고 빼고 수정하며 사랑의 꿈보다 달콤한 꿈에 빠져보기도 하는데 앳 리스트(At least), 최소한 내 사랑하는 이들 잔금 많은 두 손바닥 명부 칸칸에 삭제되지 않는 등본으로 새기고픈 마음 잠시 내려놓고서…… -------------------------------------------------------- *프란츠 리스트의 <사랑의 꿈> 이영혜 원장 -2008 《불교문예》 등단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서울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초빙 부교수 -박앤이서울치과의원 원장 -시집 《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
세상이 웃지 않으면 너와 내가 많이 웃자 크게 웃고 길게 웃고 배와 온몸으로 웃자 고통을 잊고 싶은가 배꼽 빠지게 웃어라! 행복하고 싶은가 매일 많이 웃어라! 사랑해서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리워하다 보니 사랑이듯이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다 보니 행복해지는 것 억지라도 웃자 웃어넘기자 미치도록 웃자 웃어버리자 웃음은 최고의 유산소운동 부작용 전혀 없는 만병통치약 ---------------------------------- *윌리암 제임스 김계종 전 치협 부의장 -월간 《문학바탕》 시 등단 -계간 《에세이포레》 수필 등단 -군포문인협회 회원 -치의학박사 -서울지부 대의원총회 의장 -치협 대의원총회 부의장 -대한구강보건학회 회장, 연세치대 외래교수 -저서 시집 《혼자먹는 식탁》
몽골의 조랑말은 나를 태우고도 기회만 되면 멈춰 서서 풀을 뜯었다 양과 염소들도 깨어 있는 내내 대지에 고개 숙여 풀을 먹는다 저 먹이활동이 즐거운 휴식인지 마지못한 노동인지 궁금했다 식사=휴식이라는 통념은 늘 옳은 걸까 핸드폰 속 세상을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며 빵 한 조각 허겁지겁 베물고 일어 서는 인간의 식사도 있다 혀의 쾌락도 없이 위루관으로 뱃속에 죽을 욱여넣던 루게릭병 친구 휴식도 노동도 아닌 그 순간 눈망울은 말보다 낙타보다 크고 글썽했다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도 못하니 자연의 섭리를 넘어선 걸까 허기가 인류의 문명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명제를 되새김질해 본다 고개를 숙이지 않고도 엄마 품에 안겨 당당히 허기를 채우던 첫 밥의 힘이 지상의 식사를 끌고 간다 이영혜 원장 -2008 《불교문예》 등단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서울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초빙 부교수 -박앤이서울치과의원 원장 -시집 《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
비워야 갈 수 있는 구불구불 어두운 골목길 불 켜고 노려보는 뱀의 눈 해어지고 허물어진 담벼락 안쪽 검진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나는 수상한 영상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恥部) 보여주고 싶지 않은 오장육부(五臟六腑) 수색 당하고 검색 당하는 수치심 이제 더 이상 은밀한 곳 없다 이제 더 이상 신비한 곳 없다 세포까지도 현미경에 사로잡힌다 고성능 렌즈로 보는 청문회 배율 엄청난 렌즈로 보는 인터넷 거울과 렌즈가 까발리는 세상의 민낯 하루에도 수십 번 몰래 촬영 당하는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 도시에는 사람은 없고 피사체만 걸어 다닌다 실상과 허상의 세계가 맞부딪힌다 안쪽을 볼수록 바깥 같고 바깥을 볼수록 안쪽 같은 안과 밖이 경계를 허물다 김계종 전 치협 부의장 -월간 《문학바탕》 시 등단 -계간 《에세이포레》 수필 등단 -군포문인협회 회원 -치의학박사 -서울지부 대의원총회 의장 -치협 대의원총회 부의장 -대한구강보건학회 회장, 연세치대 외래교수 -저서 시집 《혼자먹는 식탁》
이 미터면 되겠나 그대와 나 사이 거리 말뚝마다 하나씩 앉은 저 갈매기들의 거리 만큼이면 좋지 않겠나 아득히 보이지 않던 그대 얼굴 정말 한 아름 거리에 오기는 하는 건가 밀접했던 마음은 그만큼 더 띄워야 하는 건가 사회적 거리는 물리적 거리 심리적 거리도 멀어지는가 내 옆자리는 언제나 비어 있는데 닿고 싶어 닿고 싶어 네가 없어 키 커진 그림자만 텅 빈 거리를 오래 서성인다 이영혜 원장 -2008 《불교문예》 등단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서울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초빙 부교수 -박앤이서울치과의원 원장 -시집 《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
머리를 뚝 떼어 귀양 보내고 풍만한 유방 튼실한 궁둥이 들고 눈이 맛있는 식사가 푸짐하다 팔은 반으로 접어 나무둥치에 걸치고 아랫도리만 살아서 각선미가 춤을 춘다 파도에 치마는 흘러내릴 듯 감기고 싱싱한 뱀장어가 서로의 다리를 꼬아 햇살 아래 번쩍거리며 교미를 한다 바위 속에 꿈틀거리는 인어의 비늘 형체가 아닌 것을 깎아내 버리면 표정이 이를 희게 드러내며 웃는다 빛을 삭제해버린 어둠 속에서 서서히 판도라의 상자가 떠오르고 직선으로 빗살로 반사의 생명 머금고 곡선이 이기고 직선의 투명한 집으로 꺾여 든다 침묵을 뿜는 분수가 정점에서 떨고 볼 때만 이어지는 생명 보이지 않는 세계로 접히면 조개 속에 진주가 빛을 품는다 이 집의 남자는 몽땅 태양을 안고 가출하고 여자가 홀로 달을 붙들고 열심히 해산을 한다 문이 열릴 때마다 질식 직전의 식구들 원색의 외출복 갈아입고 나머지 시간을 챙겨 호수를 가로질러 안개꽃을 피우러 간다 김계종 전 치협 부의장 -월간 《문학바탕》 시 등단 -계간 《에세이포레》 수필 등단 -군포문인협회 회원 -치의학박사 -서울지부 대의원총회 의장 -치협 대의원총회 부의장 -대한구강보건학회 회장, 연세치대 외래교수 -저서 시집 《혼자먹는 식탁》
보이지도 않는 검은 그림자가 지구 상공을 누볐다 불행히도 불안은 비껴가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는 수액처럼 지상에 스며들었다 뉴스를 보다 잠이 들었는데 끝이 안 보이는 배급 줄 맨 끝에 내가 떨며 서 있었다 격리와 고립이라는 초유의 현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마녀사냥당하듯 죄인이 되고 서로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추궁했다 총성도 없이 선전포고가 이어졌다 마스크 두 장을 다 쓰고 창문 닫고 머리까지 이불을 덮어 올렸다 그날 밤에도 나는 낡은 잠옷 바람으로 보이지도 않는 배급 줄의 꼬리를 찾으며 울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다시 푸르러 맑아진 지구를 검은 그림자가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이영혜 원장 -2008 《불교문예》 등단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서울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초빙 부교수 -박앤이서울치과의원 원장 -시집 《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
걸림돌이라고 발로 걷어차지 말라 돌아오는 것은 아프고 쓰린 상처뿐 언제 우리도 다른 사람의 걸림돌 된 적 있으리라 걷어찬 것만큼 우리도 걷어 채이고 아파서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차가운 광대 거무튀튀한 어둠의 밤 돌 위에 내리는 별빛 평평한 디딤돌인 줄 알고 밟았는데 뾰족한 걸림돌에 걸려서 크게 한방 넘어져 발이 부러진다 세월의 씻김과 바람의 빗김 걸림돌 닳고 닳아 누군가의 디딤돌 될 때 우리의 무대는 막을 내릴 때가 된다 깎이고 마멸되는 마음 끝없이 쏟아지는 빗물 내 마음의 강물 디딤돌은 어디인가 김계종 전 치협 부의장 -월간 《문학바탕》 시 등단 -계간 《에세이포레》 수필 등단 -군포문인협회 회원 -치의학박사 -서울지부 대의원총회 의장 -치협 대의원총회 부의장 -대한구강보건학회 회장, 연세치대 외래교수 -저서 시집 《혼자먹는 식탁》
유난히 더 노란 봄이 왔다 산수유꽃들까지도 바이러스 왕관*을 쓰고 있었다 꽃구경 다녀간 사람들이 왕관에 감염되었다며 모든 꽃놀이를 금지한다고 했다 만개한 유채꽃밭을 트랙터가 갈아엎었다 천지는 더 노랗게 뜨거나 하얗게 질렸다 부고도 없이 바람에 떨어져 사라지는 혼들이 매일같이 봄밤을 흔들었다 비말처럼 기침처럼 혹은 각혈처럼 꽃잎들은 숨죽여 죄인처럼 피고 졌다 세기적 봄날들이 역사책에 붉은 꽃잎으로 각인되며 고개를 떨어트린 채 흘러갔다 * 코로나(Corona) : 라틴어로 crown(왕관) 혹은 halo(후광, 광배)를 의미한다. 이영혜 원장 -2008 《불교문예》 등단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서울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초빙 부교수 -박앤이서울치과의원 원장 -시집 《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
여행객들 오고가는 김포공항청사 번쩍번쩍 유니폼 입은 기장 초라한 내게 거수경례를 한다 순간 당황한 나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다 군의관님 안녕하십니까 육군항공대 박 중위입니다 그때 치료해 준 치아 지금껏 잘 쓰고 있습니다 하하 크게 웃는 기장의 입속 훈장처럼 금니가 번쩍인다 김계종 전 치협 부의장 -월간 《문학바탕》 시 등단 -계간 《에세이포레》 수필 등단 -군포문인협회 회원 -치의학박사 -서울지부 대의원총회 의장 -치협 대의원총회 부의장 -대한구강보건학회 회장, 연세치대 외래교수 -저서 시집 《혼자먹는 식탁》
명성 호텔 라운지 레스토랑에서 민혁은 순영의 부모님과 저녁 식사가 약속 돼 있었다. 라운지 안에는 제이슨 므라즈의 이란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뵈는 창가 자리였다. 마천루들 사이로 정체된 차들의 불빛이 크리스마스트리 알전구들처럼 보였다. 순영은 이번이 아버지를 설득시킬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오빠, 오늘은 아빠 마음에 꼭 들게 말해야 해.” 순영이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다. 호텔의 입구 쪽에서 순영의 부모님 두 분이 걸어 들어왔다. 민혁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넙죽 인사를 했다. “두 분 오시느라고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특별히 야경이 멋진 창가 자리로 예약해두었습니다.” 순영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민혁은 라운지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친구와 통화 중이었다. 순영은 민혁을 놀라게 해주려고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잘 지내지? 결혼? 응 조만간 할 거 같은데. 장인 되실 분이 보건소 그만두고 제주도에 내려와서 개원하라고 성화셔서 말이야. 데릴사위? 말도 안 되지. 우리 어머니는 어쩌고. 보건소를 그만두긴, 지금 개원환경이 얼마나 안 좋은지 뻔히 아는데. 제주도에 내려가서 개원하는 척하면서 일단 결혼하면, 순영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