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습니다.“선생님, 제 아이가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 이빨이 다 썩었어요. 사탕을 먹지 말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안 듣습니다. 제 아들은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들어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말씀 좀 해주세요."그런데 뜻밖에도 간디는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한달 후에 데리고 오십시오. 그때 말해주지요."아이 어머니는 놀랍고도 이상했으나 한 달을 기다렸다가 다시 간디에게 갔습니다.그러나 간디는 “한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또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하나요?"“글쎄 한 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아이 어머니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으나 참고 있다가 한달 후에 또 갔습니다.그러자 간디는 “애야, 지금부터는 사탕을 먹지 말아라."“예! 절대로 사탕을 안 먹을래요." 소년의 어머니가 간디에게 물었습니다.“선생님, 말씀 한 마디 하시는데 왜 두 달씩이나 걸려야 했나요?"“실은 나도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사탕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 내가 어떻게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할 수가 있나요. 내가 사탕을 끊는데 두 달이 걸렸답니다."희생의 모범이 가장 좋은 교육입니다. 교육이란 끝없이 지속되는 희생의 과정
미국의 한 자연주의 철학자는 인간이 가진 유일하고도 가장 훌륭한 덕성이 ‘자비심’이라고 했다. 자비심은 상대를 자기와 둘로 보지 않는 마음인 측은지심이며 인욕과 관용, 배려하는 마음 모두를 포괄하는 마음이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 참는 것은 두렵기 때문이요, 자기와 동등한 사람 앞에서 참는 것은 싸우기 싫어 참는 것이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 기꺼이 참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큰 힘을 가진 자라 할 수 있다’(잡아함경)고 하셨던 부처님의 말씀처럼 두려움이나 부담 때문에 참게되는 경우는 흔하다. 하지만 상대를 누를 수 있는 힘과 지위가 있는데도, 참기는 쉽지 않다. 나아가 상대를 측은히 여기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자비를 인간이 지닌 가장 훌륭한 덕목으로 꼽은 것이 아닐까 싶다.이 포괄적인 마음 가운데 일부인 약간의 인내와 최소한의 친절만으로도 삶은 훨씬 편안해질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성격이 거칠고 잔인해 자비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제바달다라는 자가 있었다. 그의 이런면으로 인해 대중들이 불편을 겪는 것을, 부처님께서 신통으로 아시고는 “비구들이여, 제바달다가 무자비한 것은 지금뿐 아니라
안녕하십니까? 저는 진주교도소 의무과에 근무하는 계장입니다.다름이 아니라 저희 교도소에서는 현재 치과 공중보건의사 선생님 한 분이 수용자의 치과진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만, 형편상 보철치료에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보철치료를 해야할 환자를 모아서 일주일에 한번 정도 보철을 중심으로 진료해 주실 치과의사 선생님을 모시고자 합니다. 수용자의 의료처우 향상에 관심 있으신 치과의사 선생님은 진주교도소 의무과(055-741-2181, 구내 703, 798)로 문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지난 동안거부터 ‘공동관’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공동관이란 한 문제에 여러 사람이 집중적으로 마음을 내면서 그 문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지켜보는, 말하자면 더불어 마음내기 이다. 공동관을 하자면 무엇보다도 인원수가 적당해야 한다. 그래서 대중들을 10~15명씩 묶어 조를 짜게 한 다음, 조원들끼리 따로 모여 각자 어려운 문제를 털어놓게 했다. 자식이 말썽을 부린다든지, 부모가 아프다든지, 남편 사업이 안 된다든지 등등.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되는 한 사람을 선정해 모든 조원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마음을 내주게 했다. 그리고는 어떤 변화가 있는지 살펴보게 했다. 결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각 조원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혹은 잠자리에 들면서 혹은 오전 10시 등, 나름대로 시간을 정해놓고 마음을 냈는데, 문제가 있는 당사자나 마음을 내준 조원들이나 모두 성과가 있었다. 첫 번째 성과는 스스로 문제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간혹 자존심 때문에 혹은 믿지 못해서 문제를 숨긴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진솔하게 자신들의 문제를 밝혔다. 이것은 결국 ‘아상(我想 나라는 상)’을 내려놓은 작업인 동시에 상대와 내가 둘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두 번째 성
학교생활을 한지 어언 3년이 지났는데 금년은 정년을 맞이했던 교수님들이 유난히 많은 했던 것 같다. 과거에는 교수님들이 환갑을 맞이하면 문하생들이 논문집을 만들어 드리면서 큰 잔치를 벌이고, 정년 퇴임식 때는 아주 요란하게 행사를 하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환갑잔치를 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이는 없어지고, 정년 퇴임식도 새로운 출발을 격려해 드리는 수준으로 대부분 바뀐 것 같다. 특히 정년퇴임 기념 논문집을 제자들은 정성껏 만들어 배포 하지만, 읽어보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논문집이 CD로 바뀌어 가고 있는 요즈음은 조금 나은 편이지만 각종 CD가 범람하면서 역시 대접을 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나 치과계에서는 정년 퇴임식을 일류 호텔에서 노벨 의학상 수상자 보다 더 성대하게 거행해 드리는 제자 분들도 계신가 하면, 퇴임식을 완강하게 거부 하다가 제자들이 하도 보채 교수님 자신이 직접 자리를 마련해 소주 한잔 나누면서 정년 퇴임식으로 대신하는 분들도 계시는 등 천차만별이다. 퇴임 소감도 다양해 어느 교수님은 나는 제자들을 위해 무한히 희생했
위화도 회군을 앞둔 이성계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꿈에 벚꽃이 활짝 피었더니 갑자기 확 떨어지고, 밖에서는 까마귀가 까르르 울고 아래서는 거울이 깨지며 또 대문 위에서는 허수아비가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꿈이었다.꿈을 깬 이성계는 매우 이상한 꿈이라 생각하며 기분이 언짢았다.그러나 이성계는 자기가 꿈 해석을 하지 않고 평소 마음으로 따르던 무학대사를 찾아 꿈 해몽을 의뢰했다. 무학대사는 까마귀가 우는 것은 왕궁으로 들어간다는 징조요, 거울이 깨진 것은 큰 소식이 있을 것이라 하고, 꽃이 폈다 지는 것은 곧 열매 맺을 일이 생길 징조요, 허수아비가 거꾸로 매달린 것은 모두가 우러러 볼 일이 생기겠다고 해석해 주었다. 무학대사의 꿈 해몽을 들은 이성계는 용기백배 하여 자기 소신을 그대로 밀고 나가 쿠테타를 성공시켰다는 이야기다. 인생에서 우리는 늘 선택을 해야 할 경우를 자주 만난다.늘 이것이 좋을까? 저것이 좋을까? 요리조리 궁리하고 궁리한다.그러나 ‘이것만이 옳다’라는 정답은 없다.운명(運命)이란 마음을 어떻게 운전하느냐에 따라 정해진다 해서 운명 아니더냐?지나간 일은 이미 지났으니 공했고, 미래 일은 아직 오지 않아서 공했으니 앞뒤 끊어진
치과위치와 치과명까지 거론하면서 음해성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관리하시는 분께서는 조금 신경쓰셔서 그런 글을 삭제했으면 합니다. 사이버 테러니,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왜 일반인의 음해성 글들은 그냥 지나치시는지 이해가 안갑니다.일부 사연을 읽어보니 별로 큰일도 아닌데 ‘횡포’라느니, 치과의사들 싸잡아 욕하는게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치과계를 위해 여러 의견을 들어야겠지만 비판이 아닌 비방 그리고 음해성 글들은 삭제될 수 있도록 신경써 주시기 바랍니다.
치과이름이나 원장이름을 실명으로 거론하는 것은 문제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게시판 자체에 이런 내용이 올라오는 것은 환영해야 할 일입니다. 혹시 네이버나 다른 사이트에 가서 치과라는 검색어로 검색해보신 적 있으신지요? 치협 게시판에서는 이런 질문이 몇 건 안 올라오지만 검색 사이트에는 수많은 질문과 답이 올라옵니다. 문제는 이런 게시판의 질문과 답은 전혀 치의학 상식에 맞지 않는 감정적이고 경험적인 질문과 답만 올라옵니다. 치협 게시판에 ‘왜 금니가 비싼가요?" 하고 질문이 올라오면 그래도 ‘금값만 있는게 아니고 기공료, 인상채득료, 직원월급 등 등"이라고 답이 올라오지만 그런 사이트에서는 ‘치과의사가 돈벌려고 그래요"식의 답변이나 ‘그거 깍아달라고 하면 깍아줘요"식의 답변 혹은 경우에 따라서 ‘저희 치과로 오세요"식의 답변이 난무합니다. ‘고름 나와서 신경치료 오늘 했는데 아파요"하면 "플레어업이라는게 있습니다"로 답변이 나오는게 아니고 ‘난 하나도 안아프던데", "그 치과의사 나쁜XX"식의 답변이 나옵니다.어느 길로 가시겠습니까? 당장 듣기 싫고 보기 싫다고 문닫고 다른 곳으로 보내서 전혀 볼 수도 없는 상태에서 치과에 대한
피할 수 없다면… 이마에 흐르는 땀이 여름이 다가 왔음을 말해준다. 어느 새 ‘더위’를 호소하는 나를 보면서, ‘항상’하지 않음을 다시 실감한다. 고통과 괴로움은 인간들의 원초적 조건이라고 한다. ‘쾌락과 즐거움’은 마치 이런 조건을 극대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 좀처럼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동서양의 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인생은 어차피 부자유한 것, 삶은 어차피 불편할 수밖에 없다’고 했던 것일 게다. 인간 뿐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두 존재들은 이 원초적 조건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고통과 괴로움을 피하려고만 한다. 물론 고통과 괴로움은 피하려고 해서 피해지는 것도, 얻으려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벗어나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몸부림일 뿐이다. 오히려 고통의 근원을 직시해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하면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고통의 조건을 알면 더 이상 조건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근원을 직시하는 쪽 보다는 이를 외면하거나 막는데 일생을 바친다. 일찍이 진시황은 이 원초적인 조건을 거슬러 불로장생을 얻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반
그러나 1차 기관이라고 하는 개업의들은 대부분 3차 기관에서 수련을 마친 전문의들이고 보면 어찌 우스운 결과가 아닌가? 10년 이상의 시간동안 우리사회는 엄청난 투자를 해 의사라는 새내기 전문인을 만들고 이제 다시 그들에게 경영수업과 사회에서 적당히 적응하며 사는 방법을 강요하고 가르치려 덤벼들고 있다. 열심히 공부하여 중학교에 가고 열심히 공부해 고등학교에 가고 열심히 공부해 좋은 의과대학에 가고 열심히 공부해 수련 받고 전문의가 되고 열심히 살아가려는 의사에게 단번에 올라버린 돈 놓고 돈 먹기식의 부동산 정책을 펼치면서 너희는 성실하게 계속해서 살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잊지 말고 봉사하며 살며 남들보다 세금도 많이 내기를 강요한다. 겨우 단자리수 수가 올림을 해놓고 선심을 쓰는 것처럼 떠들고 청구프로그램대로 일률적으로 청구해 진료건당 몇 백원이라도 더 청구하면 상습적 부당청구자로 실사를 하느니 도덕성이 결여됐느니 비난을 쉽게 한다. 설렁탕에 국수가닥이 들어갔느니 아니니 몇 가닥 더 들어갔느니에 설렁탕집 주인의 도덕성이 문제시되지는 않는다. 사회전반의 부패와 상관없이 의사만은 독야청청해야 한다면 존경과 경외라는 보너스를 주고 그림자도 밟지 않으려는 존중이라
퇴직에 즈음해 서구 사람들과 인도 사람들은 그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고 한다. 서구 사람들은 직장에서의 퇴직을 마치 인생의 퇴직으로 생각해 눈에 빛을 잃고 무기력해진다는 것이다. 이제 뭐하고 사나 싶어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반면 인도 사람들은 오히려 눈에 빛이 나고 얼굴에도 생기가 돈다고 한다. 직장에서 퇴직하면 그동안 미뤄두었던 수행을 마음껏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가장으로서 책임감 때문에 정작 자신의 삶은 살지 못했는데 퇴직으로서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난 동안거(겨울에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기간) 회향식에서 여든이 다 된 한 할머니가 신행담을 발표했다. 할머니는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자지 않고 정진한다고 했다. “거사님(남자 신도를 이름)들도 그렇고 우리 중생들은 낮에는 별로 시간이 없어요. 그러니까 잠을 덜 자고 정진해야 돼요. 엊그제 같이 공부하는 도반이 전화를 했는데, 시부님이 돌아가셨대요. 그 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나는 거야. 이제는 밤을 새워서 공부를 해도 부족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