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 턱 다해 하나 밖에 안 남은 송곳니 보기에는 멀쩡한데 살아온 세월만큼 잇몸 허물어져 힘없이 흔들거린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밥 먹다 빠져버리겠다 텃밭에 무 뽑기보다 훨씬 가볍게 뽑혔다 할머니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 흐른다 “아프셨어요, 그렇게?”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 세상에 부모님께 받은 치아들 다 잃고 마지막 남은 아들 같은 송곳니마저 뽑혔으니 불효도 불효지만 누굴 의지하고 살거나 병아리 눈물만큼 핏기 묻은 송곳니 싸달라고 애원한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없는 치과의사 천국 가긴 영 글렀다. 김계종 전 치협 부의장 -월간 《문학바탕》 시 등단 -계간 《에세이포레》 수필 등단 -군포문인협회 회원 -치의학박사 -서울지부 대의원총회 의장 -치협 대의원총회 부의장 -대한구강보건학회 회장, 연세치대 외래교수 -저서 시집 《혼자먹는 식탁》
민혁이 술값을 계산하고 나오자, 박 교수는 그새 담배 한 대를 더 태우고 있었다. “프로토타입을 끼던 환자는 젊어서부터 술,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다더군. 늘그막에 구강암에 걸려서 혀 절제술을 받았는데, 피부판 이식술과 3D 프린팅으로 인공 혀를 재건할 수 있다고 했더니 자기는 울퉁불퉁한 혀는 싫다더군. 그래서 프로토타입이 탄생한 거지. ”박 교수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민혁을 데리고 자신의 연구실로 갔다. 1층은 학부생 실습이 진행 중인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2층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올라갈 때쯤 순찰을 하던 나이든 경비원이 박 교수를 알아보고는 다가와 먼저 인사를 했다. 복도 끝에 연구실을 향해 걸어가자 자동으로 복도 천정에 등이 켜지면서 어둠이 물러갔다. 박 교수는 민혁과 함께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상아색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신문에는 ‘씹고, 말하고, 소통하고’란 제목의 칼럼이 펼쳐져 있었다. “어때, 사진 그만하면 봐줄 만한가?” “네, 잘 나왔네요.” “하하 그런가? 내가 머리숱이 좀 없어 그렇지. 사진발은 괜찮지.” 연구실 우측 벽면의 책꽂이 옆 철제 캐비닛 쪽으로 다가간 박 교수는 맨 위 칸 서랍을 열고 은색 철제 가방을
하늘이 주신 재능을 불꽃처럼 방전하고 2, 30대에 생을 마감한 모차르트 푸슈킨, 가깝게는 이상... 천재는 요절한다. 그러나 역도 진리는 아니어서 장수한다고 둔재는 아니다. 뉴턴 괴테 위고... 물론 의학지식과 농업생산성이 턱없이 낮던 옛날에 나온 얘기다. 다행히(?) 30대를 넘겨 나이 든 천재는 괴롭다. 내 눈에도 경이로운 나 자신의 업적을 어떻게 넘어설까? 치받고 올라오는 후배도 조바심을 부추긴다. 쫓기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렇지만 생각을 바꿔보자. 잔챙이 중에서 준척(準尺)은 폼이야 나겠지만, 월척과 어울려야 오래 살고 씨알이 굵어야 낚시꾼도 몰린다. 영화계 황금기는 문희ㆍ남정임ㆍ윤정희의 1세대와 장미희ㆍ정윤희ㆍ유지인의 2세대 트로이카 시대였고, 소설도 조정래ㆍ황석영ㆍ최인호의 선 굵은 서사(敍事) 삼총사 시절에 인기를 끌고 책도 많이 팔렸다. 흔히 일인천하 독주를 꿈꾸지만, 열띤 경쟁은 판을 키우고 격을 높이니, 작가에게는 생필품이요 고마운 존재다. 치열한 경쟁의 스트레스를 벗어나는 방법. 첫째는, 초반 점수 차를 확실히 벌려 놓는 프로골퍼 방식이다. 마지막 라운드에 여유 있게 우승을 하지만, 모든 자료가 열려 있고 만인이 똑똑한 오늘날,
혀를 되찾은 민혁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보건소로 출근했다. 최 과장은 괜히 소장님 심기만 건드렸다고 짜증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졌다. 그는 휘파람을 한 번 불어보았다. 혀 보형물이 입안에서 스스로 자리를 잡으며 부르르 떨었다. 민혁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구강보건실로 들어갔다. “얼른 울음 뚝 못 그쳐. ”치과 진료용 의자에 앉은 아이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위생사가 아이를 달랬다. “약을 두 번 바르고 빛을 쪼여주면 끝. 어때 쉽지.” 아이는 엄마와 민혁을 번갈아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아이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린 채 버텼다. 그러자 엄마가 아이를 낚아채고는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아이를 꾸짖는 소리가 복도를 사납게 울렸다. 이윽고 아이가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민혁은 속이 메스꺼워졌다. 혀가 저절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혀 보형물이 부풀며 딱딱하게 경직됐다. “그렇게 윽박지르면 아이가 조용해지나! 당신은 부모로서 자격이 없어.” 민혁은 속사포처럼 말을 뱉고는 이내 놀라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목구멍에서 맴돌던
초딩 때 윤백남의 소설 <흑두건>을 읽었다. 배경이 인조반정 전후였던가? 천하장사들이 만나 힘을 겨루는데, 갑이 손가락으로 굵은 호두알을 아작 깨뜨리자 을은 두툼한 엽전을 종이처럼 접는다. 부엌에서 따닥 소리가 나서 가보니 한 총각이 아궁이 앞에 앉아 팔뚝만 한 참나무를 가볍게 분질러가며 불을 땐다. 과장인 줄 알면서도 지붕 위를 훨훨 날아다니는 영웅호걸들의 활극에 가슴이 뛰었다. 일제의 강압 하에서 개화기를 맞은 선배들은 역사극처럼 제한된 소재로 흥미 위주의 글을 많이 썼고, 이런 풍조는 극한적인 대립과 전쟁으로 멍들었던 해방 후로 이어졌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사람들은 영웅호걸에 열광한다. 주인공은 영어로 히어로ㆍ히로인 아닌가? 어쨌든 이광수의 <단종애사> 김동인의 <젊은 그들> 박종화의 <금산의피>는 우리의 역사관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소재가 무궁무진한 세계적인 문화재 《이조실록》 덕분에, 사극은 여전히 소설ㆍ드라마의 노다지판이다. 사극 DNA는 7-80년대 3대 구라 황석영, 조정래, 최인호로 꽃을 피우는데, 출세작 <장길산>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황 작가는 스스로를 얘기꾼(Story
민혁은 M치과대학병원 구강악안면외과 주임교수인 박병삼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박 교수는 그가 졸업한 치과대학의 은사였다. 연구실은 복도 오른쪽 맨 끝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박 교수는 보이지 않았다. 우측 벽면에 책장 세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고 그 옆으로 철제서랍장이 있었다. 좌측 벽면에는 클래식 기타 동아리 지도교수답게 보면대와 기타가 벽에 기댄 채 놓여 있었다. 학생들의 과제물이 수북이 쌓여 있는 박 교수의 책상 위에는 여러 권의 책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민혁은 《언어중추에 관한 연구보고서》란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중간지점에 ‘뇌의 언어중추 영역 브로카 베르니케’라고 적힌 인덱스 부분을 펼쳤다. 책 하단에 다음과 메모가 적혀 있었다. 뇌에서 말을 만들어내는 브로카영역 뇌파를 활성화시키는 혀 보형물 프로토타입(원형, 原型), 말을 이해하는 베르니케 영역 뇌파를 활성화시키는 B타입, 두 영역 모두 활성화시킬 수 있는 C타입. 잠시 후 박 교수가 연구실로 들어오자 민혁은 서둘러 손에서 책을 내려놨다. 민혁은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했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정수리를 겨우 가리고 있었고 그는 습관처럼 머리를 왼쪽으로 쓸어 올렸다. 모습
김상기 전 대전 MBC 사장이 타계한 지 어언 3년인데, 가끔 그 얼굴이 떠오른다. 얼굴은 전부터 알았지만 파탈하고(신흥초등 대전중ㆍ고 서울대 모두 4년 후배) 자주 만난 건 2010년경 부터다. 상배(喪配: 2007)한 후 매주 한 번도 빠짐없이 대전공원 아내 묘를 찾던 열부(烈夫)가, 가까운 동기 월례모임에 필자를 초청한 것이다. <삼국지>하면 적벽대전 때 양측사상자 숫자까지 뚜르르 꿰는 기인(奇人)인데, 뭐에 필이 꽂혔는지 올 때마다 필자를 꼭 불렀고 술 한 방울 못하면서 좋은 포도주를 서너 병씩 들고 왔다. 모임에 얽힌 추억 중에, 게스트로 초청한 미국인 교수와 필자가 카페 ‘팔로미나’에서 벌인 팝송 따라 부르기 대결(?)을 기억한다. 하루는 아내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담은 시집 《아내의 묘비명(銘)》을 몇 권 가져왔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가슴이 먹먹했는데 이튿날 집사람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육십 넘은 아마추어의 첫 시집이 이토록 감동을…. 그래서 시의 생명은 ‘진정성’에 있다던가? 얼마 뒤 4천 권 넘게 팔렸다면서 아마추어 시집으로서는 베스트셀러요 기적이란다. 곁들여 보도국장 시절에 들은 ‘사재기’ 관행을 얘기한다. 많은 출판사
찻잔에서 노란빛의 송화밀수가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이 차는 꿀물에 잣을 띄워 마십니다. 원기를 북돋는데 그만이죠.” 친절한 설명과 함께 주인이 곁들여 내온 감자 맛은 그 작은 씨알만큼이나 소박했다. 빗방울들이 통유리 너머 나뭇가지에 염주처럼 매달려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가 을씨년스러웠다. 밤새 내린 비로 불어난 계곡물이 바위를 끼고 돌며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둘은 한참이나 대리석 교각 위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손을 맞잡고 계곡을 따라 아치형 통나무다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나는 오빠가 안타까워 죽겠어.” “뭐가 안타까운데?” “싫다는 소릴 못해. 그래서 사람들이 오빠를 우습게 알잖아.” 둘은 다리 위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민혁이 순영을 살며시 안았다. 그의 온기와 심장의 박동이 순영에게 전해졌다. 다리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민혁은 순영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을 때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가 순영의 입술 안으로 혀를 밀어 넣자 갑자기 순영이 비명을 지르며 입안에서 뭔가를 뱉어냈다. 바닥에 떨어진 분홍색 물체가 다리 틈새로 떨어졌다. 민혁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지만,
1995년 디트로이트의 2년제 지역대학(Community College)에 들렸다. 구강위생과를 비롯한 20개과 중에, 지금은 미국 드라마를 통하여 많이 알려진 CSI(Crime Scene Investigator; 범죄 현장 조사)과가 신기했다. 지역주민은 등록금이 무료이고, 4년제 정규대학에 진학하면 취득한 학점을 그대로 인정해준다. 1988년 방학 중에 대학 문창과가 시민을 위한 강좌를 열었다. 글쓰기에 문외한인 아내가 친구 따라 등록하더니 기승전결에 주제가 뚜렷한 콩트 세 편을 써내고, 홍보이사로서 대전광역시 약사회지를 창간하여 3년을 꾸려갔다. <외갓집 풍경>은 필자의 <할아버님댁>과 짝을 이루어, 서정 태선희의 그림으로 꽃단장한 뒤 대전문학관 ‘명사 시화전’에 걸렸다가, 이제는 우리 거실에 와 있다. 치인문학(齒仁文學) 동인인 윤양하 원장의 주선으로 멜로디까지 얻었다(CD). 이제 상설강좌로 자리 잡은 문창과 강의는, 학부로서는 물론 노후 시민들에게 생의 의미를 다시 살려 사회통합에도 기여하는 ‘제2의 문맹퇴치 운동’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제1이 읽기라면, 제2는 쓰기다. 걸출한 이야기꾼(Story Teller) 황석영 씨의
지우의 휴대폰이 핸드백 속에서 다급하게 울렸다. “어, 영미야! 미안~ 내가 갑자기 학교에 일이 생겨서…… 좀 더 있어야 할 거 같은데. 그래, 택시 타고 약속장소에 먼저 가 있을래? 응, 미안.” “퇴근 후에 후배랑 약속이 있었거든.”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지?” “지은파 선생님까지. 그래, 지은파 선생님은 지금 어디에 계셔?” “교실에서 고양이를 키워서 자기 아이가 고양이 털 알러지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한 학부모가 교육청에 민원을 넣었거든. 학부모 참관수업에 왔다가 우연히 내게 먹이 주는 모습을 본 모양이야. 그래서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어. 본인이 책임을 지시겠다고.” “참, 어이가 없네. 겨우 어린 들고양이에게 먹이 준 걸 가지고." “자기 아이가 회장이 되지 못했다고 담임선생님에게 불만이 많았던 엄마였거든.” “아이가 회장에 뽑히지 않은 게 무슨 선생님 잘못이야!” 지우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파 선생님이 떠난 후 갑자기 또 혼자가 돼버렸겠구나.” 비체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떠나고 나자, 갑자기 반 아이들이 돌변했어. 나를 더럽다고, ‘블루 데블’이라고 욕을 해대는 아이들도 있었고, 죽어버리라면서 돌멩이를 던
하늘 찌르는 첨봉들 구름 아래서 피어오르네 태고의 신비 감추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기암괴석들 바위 휘감고 늘어진 노송들 삼경(三景)이 어울려 장관 이룬다 아, 바로 여기가 신선이 살던 황산이더냐 옛 선인들 말씀에 “황산 보지 않고 산경 논하지 말라 황산 본 후 오악(五岳) 가지 말라 보지 않고, 가지 말라” 참으로 그 말씀 가슴에 닿네 사계가 다 다른 경이 있다고 하나 내 분수에 어찌 사계 다 보랴 일계만 보았어도 내 평생 가 본 중 감히 으뜸이라 말할 수 있네. 최 단 원장 -<순수문학>으로 등단 -국제펜클럽 한국문인협회 회원 -전쟁문학회 이사 -광진문학 고문 -순수문학회 부회장 -치문회 회원 -최단치과의원 원장 -<한국전쟁문학상> 시부문 본상 -<순수문학> 시부문 본상 -저서 《사진과 함께하는 나의 세계 문화 기행시 上.下》, 《미선나무》, 《노을의 미소》, 《영운당의 풍령》, 《나, 허수아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