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실습생들이 재잘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2005년 치위생사 첫 출근을 앞두고 긴장과 설렘으로 밤잠 설쳤던 때가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저는 진료실에서 치위생사로 7년을 일한 뒤 상담실장, 총괄실장을 거쳐 고객 커뮤니케이션을 책임지는 고객관리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커리어의 절반이 훨씬 넘는 기간을 고객과 함께 했습니다. 고충도 있었지만 보람된 기억이 많은 걸 보면 이 일이 천직인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저는 병원 매출을 늘리는 공을 인정받아 현재 위치에 오른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매출만 따졌다면 아주 평범한 상담실장에 그쳤을 겁니다. 하지만 제 스타일은 뚜렷했어요. 저는 진료 시간이 딜레이 될 정도로 상담 시간도 길었고 스몰토크가 많은 편이었어요. 고객들이 살뜰히 챙겨준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더해 우리 병원 치료에 확신을 갖게 된 고객들이 늘면서 소개 고객도 함께 늘어났습니다. “만족스러운 진료를 경험한 고객의 입보다 강력한 마케팅은 없다”라는 격언에 비춰보면 ‘진짜 마케팅’을 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울러 당장의 매출에 연연하지 않는 병원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짐작해봅니다. 대표원장님이 고객을 대하는 가치관과 신념,
2024년, 세상을 바꾸는 현장은 어느 곳일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올해 라스베이거스의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 CES 2024에 참석했다. 종교, 윤리적으로 금지된 도박의 도시라서 씬 시티(Sin City)라고도 불리는 라스베이거스는, 간소한 행정절차로 인해 다른 곳보다 먼저 서비스를 개시하는 사례들이 많다. 간편한 결혼과 이혼 절차는 영화의 소재로도 많이 다루어졌지만, 사실 미국 최초의 비대면 원격의료가 이 곳에서 2014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CES 2024의 주제는 ‘모두를 위한, 모든 기술의 활성화(All Together, All On)’였다. 인공지능, 자율주행, 로봇, 친환경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최신 기술 제품과 미래 방향을 제시했는데, 놀라운 사실은 전시장 곳곳이 한국 기업과 한국 사람들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한편 디지털 헬스는 이번 전시의 가장 중요한 분야 중 하나였다. 2020년 삼성전자 C랩에서 스핀오프한 헬스케어 스타트업 옐로시스는 소변 검사 기반 AI 건강 관리 솔루션 ‘심(Cym, Care Your Moment)702’을 전시했다. 탁유경 CEO의 설명에 따르면 변기에 설치된 소변검사기기가 케톤,
지귀(志鬼) 이야기를 아시나요? 저는 경주하면 지귀가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적어도 저에게 경주는 불국사도 석굴암도 아닌 지귀의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지귀는 선덕여왕을 한 번 본 뒤 반해 버려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선덕여왕을 부르다가, 그만 미쳐 버리고 만 친구입니다. 어느날은 지귀가 영묘사의 탑 아래 선덕여왕을 기다리다가 지쳐 잠이 들게 됩니다. 지나다 그 모습을 본 선덕여왕은 그런 지귀가 가련해 팔목에 감았던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 위에 놓은 다음 발길을 옮기었습니다. 여왕이 지나간 뒤에 비로소 잠이 깬 지귀는 가슴 위에 놓인 여왕의 금팔찌를 보고는 너무 좋아 껴안고 어찌할 줄을 몰라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모의 마음이 너무 커져 불씨가 되어 가슴 속을 활활 태우더니, 어느새 온몸이 불덩이가 되고, 결국에는 불귀신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런 지귀가 세상을 떠돌아 다니자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선덕여왕은 다른 백성들이 다치지 않게 주문을 짓게 됩니다. ‘지귀가 마음에 불이 나(志鬼心中火) 몸을 태워 화귀가 되었네.(燒身變火神) 마땅히 창해 밖에 내쫓아(流移滄海外) 다시는 돌보지 않겠노라.(不見
물건 가격이 9900원으로 끝나는 광고를 우리는 자주 접하게 된다. 마트나 창고형 할인매장에서 프로모션이라는 미명 하에 덤핑처리를 하기 위해 자주 이용되는 방법이다. 쏟아 붓는다는 뜻의 Dump(ing)이란 다른 물건보다 일부러 싸게 팔아 시장을 점유하려고 하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매력적인 가격에 현혹되어 물건을 구매하게 되고 기업은 이윤 창출과 더불어 인지도 상승에 따른 시장 점유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된다. 반면 경쟁에서 밀린 동종업계는 자구책을 찾아 나서려고 상품의 질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좇는데 급급할 것이다. 더 높은 수익을 단기간에 올릴 수 있는 방법을 무조건 선택하는 것은 장기적인 비전에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이 자명하지만 그들은 선택한다.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포털사이트에 경쟁하듯 깜박거리는 *9만원 임플란트 광고를 볼 때면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이 광고를 보고 온 환자들에게 *9만원이 안되는 이유를 설명하며 가격 흥정을 하고 있자면 치과의사로서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실상 임플란트 한 개를 심는 데 재료비는 20%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치과의사가 폭리를 취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2022 카타르 월드컵 TV 중계 화면에 비친 손흥민 선수의 페이스 마스크를 보고 떠오른 단상. 내내 그 페이스 마스크가 눈에 띄었다. 시야를 가릴 것처럼 불편하게 보이는 그 마스크는 그의 안와골절 수술 부위를 보호하기 위해 착용한 것이었다고 한다. 안와골절. 예전 군의관을 끝내고 근무했던 준종합병원 시절 생각이 났다. TA(교통사고) 환자분들이 더러 있어서 안와골절 외에도 안면부 골절은 그때 거의 다 해본 것 같다. 그중 가장 어려웠던 증례는 하악 과두부 골절(Condyle neck or High condyle fx.) 2건이었는데, 이때 수술을 도와주러 온 ‘고마운 후배님’ 두 명은 아직도 참 감사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하악 과두부 골절 수술을 위해선, 전이개부 접근(귀 앞 절개 및 접근 Preauricular approach) 및 골절된 과두부 정복(골절편 맞춤 Reduction or reposition)시 숙련된 제 1보조자(1st.assist)의 손길이 절실했었기 때문이다. 난 수련의 때 전이개부 접근(Preauricular approach)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해본 적이 없었다. 기회도 거의 없었지만, 어쩌다 한 번 잡은 기회에서 버벅거리다
갑진년 청룡의 해를 맞아서 話頭란 것을 생각해보셨나요? 화두도 개인적인 화두와 치과의사로서의 화두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중용으로 정했습니다. 지금 나이에 重用은 아니고,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中庸입니다. 치과의사로서의 화두는? 있으신가요? 없으면 같이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도할 때도 중보기도를 하면 더 잘 이루어진다고 하잖아요.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같이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속해있는 모임에서 1월 중순의 마지막 날 신년회를 예정하고 있어서 단톡방을 통해 참가여부를 확인하고 있는데, 한 후배가 참가 신청을 하면서 자신의 올해 화두를 參加로 정했다고 합니다. 사회활동을 열심히 하는 후배여서 모임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자신이 몸담고 있는 모든 모임을 말하는지, 우리 모임을 말하는지 알 수 없으나, 더 활발히 적극적으로 인간관계를 갖고 싶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요즈음 뜨거운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는 소통전문가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바다에 나아갈 때는 혼자 가지 말라고 합니다. 바다 속에는 볼 것, 먹을 것, 생활에 필요한 자원이 많지만 바다는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거친 풍랑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뒤
요즈음 탕후루가 선풍적인 유행이다. 제철 과일에 설탕 코팅 범벅을 해놓은 이 요사스러운 음식은 한눈에 보기에도 단맛을 대가로 치아 건강을 무참히 앗아가는 듯하며, 이렇게 탕후루 유행이 지속된다면 장기적으로 치과 가족 여러분들의 매출에도 약소하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상상을 하곤 한다. 실제로 친구들은 내게 1층에 탕후루 가게를, 2층에 치과 개원을 하는걸 강력히 추천하기도 하며, 단 음식에 대해 자제력이 뛰어난 나 역시 탕후루 한 줄을 게걸스레 비운걸 보면 한참 단걸 좋아할 어린 학생들이 탕후루에 열광하는건 어찌 보면 당연해보이기도 한다. 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서늘해지며 붕어빵과 오뎅에 자리를 내주긴 했으나, 여전히 길가엔 탕후루를 베어 물며 행복해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항상 스마트폰을 들고 있거나, 귀에 에어팟을 꽂고 양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무심하게 길거리를 걸어가던 사람들의 손에 과일이 꽂힌 막대가 들려있는 자못 신기한 풍경을 바라보다 보니 어릴 적 할아버지가 쥐어준 엿가락을 손에 꼭 든 채 혀로 열심히 녹여 먹던 내 어린시절이 무심코 겹쳐 보였다. 시골길 어귀에서 엿장수가 플라스틱팩에 조악하게 포장해 이천
저는 현재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본과 2학년에 재학 중이지만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공학도입니다. 공과대학 학부 시절 로봇과 인공지능 기술에 꾸준한 관심을 두고 5년 정도 관련 연구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 결과 미국 스탠포드 대학원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실험실에서 논문을 작성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기술 개발에 대한 흥미가 더 컸습니다. 그 가운데 인류의 건강을 증진하는 의학·치의학에 접목되는 로봇과 AI 기술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관련 기술들을 조사하면서 치의학이 기계공학과 밀접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치아는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경조직이기 때문에 기계공학 이론들이 생각보다 많이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기계공학과 선배님들이 치의학 분야에서 성공적인 기업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구강 스캐너, CAD, AI 등의 기술이 치의학을 혁신하고 있는 시대에 제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해 치의학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입학 후 수강한 많은 교과목 가운데 허경회 교수님의 판독 수업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파노라마 엑스레이에서 비정상 소견을 찾는 과정이 흥미로웠는데 영상의
퇴근길 차 안에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저 최진영인데요, 회의를 했는데 이번 베트남에 장훈 선생님 같이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래전부터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구순구개열 의료봉사에 같이 가자는 전화를 받았다. 그것도 우리나라 최고의 수술팀과 함께. 기뻐서 운전 중에 차 안에서 소리를 질렀다. 코로나와 함께했던 전공의 시절 모든 해외봉사와 해외학회가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대체되어 한번도 가보질 못했었다. 나는 지금 구강악안면외과 수련을 마치고 병무청에서 병역판정전담의사로 대체복무 중이다. 신체검사를 통해 병역 급수 판정을 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전공의 때 유별난 하고잡이였던 내가 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칼을 못잡게 된 것이다. 3년을 의미있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구강악안면외과 영역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구순구개열 의료봉사에 지원했다. 개인적으로 의료봉사를 가기로 최종 결정하기까지 쉽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봉사 기간이 둘째 아이 출산 직후였기 때문에 아빠로서의 역할을 잠시 놓아야 한다는 것이 가족에게 미안했다. 고민을 하는 찰나 “갔다와, 가서 어른이 돼서 돌아와” 라는 아내의 말에 베트남에 가기로 결심했다. 아내에게 고맙다. 역시 엄마는 위
“엄마”.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울음과 함께 처음 내뱉는 한마디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라는 존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에게도 나만의 수호신, 우리 엄마가 있다. 이것은 우리 엄마, 혹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5살 때의 일이다. 그날은 엄마의 생신이었다. 5살의 나는 한창 구슬 모으기에 푹 빠져있었다. 엄마께 어떤 선물을 드릴지 고민하던 나는 내가 제일 아끼는 구슬들을 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작은 상자를 가져와 가장 아끼는 구슬들만을 골라서 담았다. 일주일을 기다려 문방구에서 힘들게 구했던 분홍색 구슬을 집어 들었을 때는 순간 ‘이것만 내가 가질까’하고 고민했지만, 큰마음을 먹고 상자에 담았다. 그날 저녁 엄마가 케이크의 촛불을 끄신 후 나는 엄마께 눈을 감아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엄마의 손에 구슬이 담긴 상자를 꼭 쥐어주었다. 눈을 뜬 엄마는 “우와, 우리 딸 선물이 최고인데!”라고 하시며 나를 꼭 안아주셨다. 그때 5살의 나는 내가 엄마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믿었다. 내가 제일 아끼는 구슬들이 엄마에게도 정말 최고의 선물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때의 엄마는 몇백만 원짜리 명품 가방을 받은 듯
Relay Essay 제2553번째 (2023년 5월 22일자) 게재 어느덧 고희에 이르셨지만, 작은아버지는 나에겐 아직도 조카에게 줄 소년잡지를 들고 골목 어귀를 들어서는 맑고 하얀 청년이다. 삼촌이 갑자기 작은아버지가 됐을 때 모르는 여자에게 삼촌을 뺏겼다는 생각에 큰 상심에 빠지기도 했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작은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끈끈한 유대와 공감이 있다. 5월 18일 그날의 광주에서, 의과대학 4학년이었던 작은아버지는 고등학교 동문 체육대회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섰고 계엄군이 온 도시를 유린한 그날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보통의 하루를 보내다 행방불명된 다른 무고한 젊은이들의 가족들처럼, 나의 아버지는 당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동생을 찾으러 자전거를 끌고 나가셨다. 그런 아버지 뒤에 남겨진 식구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까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어머니가 재직하던 학교에, 작은아버지가 국군통합병원에 후송되어 있다는 연락이 온 것은 며칠이 지난 후였다. 정신이 반쯤 나가 달려간 아버지가 마주한 동생은, 췌장이 파열되고 3000cc의 피를 흘린 뒤 수술받은 중상자가 되어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무자비한 계엄군의 군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