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할수록 참으로 이상한 밤이었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해. 내가 이제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됐는데도 말이야.” 7호선 남구로역 새벽 5시, 예순이 넘은 노인의 얼굴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한 표정이 깃들었다. 큰 두상에 통뼈로 타고 나서 젊은 시절에 힘꽤나 썼을 법한 체격이었다. 고 씨의 고향은 경남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라 했다. 지난해 새벽 인력시장에서 고 씨는 성만과 몇 번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노가다 일꾼을 구하러 온 십장의 트럭에 올라탈 때도 성만을 함께 부르는 법은 없어서 같이 일해본 적은 없었다. 다만, 주경야독하며 병든 노모를 모시고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면서 3년째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는 고학생이란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성만은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여태껏 살아계셨다면 어르신과 연배가 같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검붉게 녹슨 드럼통 주변에 아직 잠이 덜 깬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장작불에 몸을 녹이고 있었다. 장작불이 뱀의 혓바닥처럼 드럼통 밖으로 날름거릴 때마다 어둠 속에서 남자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사라지곤 했다. 드럼통 안에 건축 폐기물에서 나온 장작을 얹자 불티들이
1927 경기도 용인 출생 1949 서울치대 3회 졸업 1969 예비역 치의 대령 대한치과의사협회 감사 1974 대한치과의사협회 총무 1980 대한치과의사협회 부회장 1967 대한구강보건협회 부회장 감사 고문 1967 대한치과기재학회 3-5대 회장 고문 1978 인공치아이식임플란트학회 초대 2대회장 1979 국제치의학사회 I.C.D. 평생회원 1982 서울대학교치과대학동창회 부회장 1982 전주류씨 전양부원군 종중 회장 현) 종로구치과의사회 지도위원장 유 양 석 치과의원장 상훈 : 보국훈장 협회대상 서울치대동문상 수상 치아는 태어나서 생을 마칠 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저작 운동을 해야 하는 제2의 심장(心臟)이다. 전신건강의 근본이며 전신발육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치아임을 생각할 때 구강 보건과 치아의 건강 없이 체력향상은 기대할 수 없고 체력향상 없이 전력배양이나 국력배양은 없다. 그래서 치아의 건강이 중요한 것이며 전신의 건강은 물론 개인의 행복과 국력에 관한 문제이므로, 조금도 소홀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젊고 건강할 때는 소홀이 생각하기 쉬우나 나이가 들수록 절실히 느껴지는 것이 치아의 건강이다. 결론은, 전쟁을 통해 치과 군의관들은 모든 고난
어릴 때 형이나 누나의 소풍날 새벽녘이면 어머니는 안방에서 김밥을 만드셨다. 자다가 졸린 눈을 배시시 뜨고 일어나 보면, 어머니 옆에는 김밥에 넣을 속 재료들과 시큼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갓 지은 밥이 놓여 있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손으로 집어 먹어 보면 익숙한 맛이었다. 도마 위에는 길 잃은 김밥 꽁다리들이 보였다. 크기도 작거니와 보기에는 볼품이 없지만, 비몽사몽 잠결에 하나씩 입에 넣었을 때의 기쁨이란 먹어 본 사람만이 안다. 그래서 소풍 전날이면 늘 설레며 잠들었다. “일찍 일어나는 아이 김밥 꽁다리 얻어먹는다.” 진심 이런 속담 하나 만들고 싶다. 퇴근길 저녁에 들른 김밥집 사장님에게 어렸을 때 어머니가 소풍 때 싸주셨던 시큼한 김밥을 팔면 어떠냐고 제안해본 적이 있다. 사장님은 손사래를 쳤다. “그럼 김밥이 쉰 지 알고 사람들이 난리 나요.” 사장님은 어릴 적 잠결에 일어나 시큼한 김밥 꽁다리를 드셔본 적이 없는 게 분명하다. 토요일 오후 자전거를 타고 마트에 들렀다. 김밥용 재료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계산하려니 지갑이 없다. 아무래도 김밥은 내일 싸야겠다. 집에 도착해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왜 어릴 때
1927 경기도 용인 출생 1949 서울치대 3회 졸업 1969 예비역 치의 대령 대한치과의사협회 감사 1974 대한치과의사협회 총무 1980 대한치과의사협회 부회장 1967 대한구강보건협회 부회장 감사 고문 1967 대한치과기재학회 3-5대 회장 고문 1978 인공치아이식임플란트학회 초대 2대회장 1979 국제치의학사회 I.C.D. 평생회원 1982 서울대학교치과대학동창회 부회장 1982 전주류씨 전양부원군 종중 회장 현) 종로구치과의사회 지도위원장 유 양 석 치과의원장 상훈 : 보국훈장 협회대상 서울치대동문상 수상 #치과기공문관 채용 치과기공사가 최초로 군에 채용된 것은 나의 건의로 이루어졌다. 보철기술하사관으로 근무하던 하사관들이 제대 후 갈 곳이 없어 고향에 가서는 군에서 배운 기술로 자격도 없이 잠행하여 무면허로 부정 치과 의료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를 양성화하여 그들의 일자리를 마련하고자 군에 정식으로 취업할 수 있는 치과 기공 문관제도를 마련코자 건의한 결과 수용이 되었다. 그래서 1962년 제 5육군병원 근무 시 부산 서면에 성업 중이던 강치과의원에 근무하던 김(金)종태라는 기공사가 최초로 채용되어 잘 있는 사람을 빼내 갔다는 오
가족들에게 생색내기는 영화만큼 좋은 게 없다. 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도를 뜻하는 가심비로 최고라고 생각한다. 2015년 7월, 뷔페에서 식사를 마치고 온 가족이 영화를 보기로 했다. 군산에 내려오면서 보려고 마음먹었던 영화는 <연평해전>이었다. 식사 중간에 스마트폰 앱으로 영화를 검색해보니, 아뿔싸 <연평해전>은 하루 전에 상영이 끝났다. 그래서 판타지 호러 영화 <손님>을 보게 되었다. 나는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면 으레 온 가족을 극장으로 초대해 영화를 본다. 여름 휴가차 떠난 제주도 애월읍에서도 9명의 가족을 태운 렌터카를 몰고 40여 분을 달려 영화를 보러 갔을 정도였다. 김광태 감독이 직접 쓴 영화 <손님>의 시나리오는 2013년 우연한 기회에 접한 《피리 부는 사나이》 책 소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중세시대 독일의 도시 하멜른(Hameln)에서 내려오는 민담을 기반으로 한 동화책 《피리 부는 사나이》는 쥐 사냥꾼 이야기와 1284년 6월 26일 하멜른에서 130명의 어린이가 행방불명된 이야기가 합쳐져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로 탄생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우리에게 동화로 익숙한 하멜른의 &l
1927 경기도 용인 출생 1949 서울치대 3회 졸업 1969 예비역 치의 대령 대한치과의사협회 감사 1974 대한치과의사협회 총무 1980 대한치과의사협회 부회장 1967 대한구강보건협회 부회장 감사 고문 1967 대한치과기재학회 3-5대 회장 고문 1978 인공치아이식임플란트학회 초대 2대회장 1979 국제치의학사회 I.C.D. 평생회원 1982 서울대학교치과대학동창회 부회장 1982 전주류씨 전양부원군 종중 회장 현) 종로구치과의사회 지도위원장 유 양 석 치과의원장 상훈 : 보국훈장 협회대상 서울치대동문상 수상 #권위주의자의 횡포 자기 할 일을 다 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남의 일에 간섭하고 깔보며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다. 권위주의자의 속성이랄까 윗사람에게는 약한 저자세로 아부 근성을 부리면서, 아랫사람에게는 가혹하고 야박한 세도를 부리려 한다. 상후하박으로 밑에 사람에게는 인색하고, 속담에 자기 밑이 구리면 남의 밑도 구린 줄 알고 남을 의심하고 자기 할 일을 제쳐놓고 남의 일에 간섭한다. 내가 현역에 있을 때 육군본부 의무감실에는 군에 동시에 입대한 동기생임에도 한 사람은 육군 소장으로 의무감의 권세를 누리고 있지만, 한 사람은 만년 대령으로 그 밑
오늘처럼 이렇게 소나기가 내리는 날이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전날 추수를 마치고 토방 위에 추수한 볏가마니들을 쌓아 놓고 비를 맞지 않게 방수포로 덮어두었던 날이다. 그날도 비가 온종일 주룩주룩 내렸다. 아버지와 나는 마루에 앉아 방수포 위에 시원하게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었다. 아버지 앞에는 막걸리와 평소 술안주로 즐겨 드시는 문어 숙회가 놓여 있었다. 어린 아들은 술 드시는 아버지가 못마땅해 마지 못해 곁을 지켰다. 힘들었던 한 해 농사를 무사히 끝마쳤다는 후련한 표정이 불그죽죽한 아버지의 야윈 얼굴에 어려 있었다. 아버지는 술, 담배를 참 좋아하셨다. 그런 아버지 영향인지 나는 술 한 잔에도 취기가 올라 온몸이 벌게지는, 알코올 분해효소라고는 가뭄에 콩 나듯이 찾아보기 힘든, 몸을 갖고 있다. 그래서 술 한 잔에 시름을 덜고 스트레스를 날리는 애주가들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내게는 미적분만큼이나 어렵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내가 이렇게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사드리면서 어리광도 부리고 그랬을 텐데. 뭐가 그리 급하시다고 서둘러 가버리셨는지……” 오랜 친구의 넋두리를 듣자니, 아버지 생전에 건강에 해로우니 술, 담배 좀 그만하시라고 버릇없이 잔소리만
1927 경기도 용인 출생 1949 서울치대 3회 졸업 1969 예비역 치의 대령 대한치과의사협회 감사 1974 대한치과의사협회 총무 1980 대한치과의사협회 부회장 1967 대한구강보건협회 부회장 감사 고문 1967 대한치과기재학회 3-5대 회장 고문 1978 인공치아이식임플란트학회 초대 2대회장 1979 국제치의학사회 I.C.D. 평생회원 1982 서울대학교치과대학동창회 부회장 1982 전주류씨 전양부원군 종중 회장 현) 종로구치과의사회 지도위원장 유 양 석 치과의원장 상훈 : 보국훈장 협회대상 서울치대동문상 수상 #진료영역(診療領域) 양악수술은 당연히 상하악골(上下顎骨)을 수술하는 것이니 구강외과(口腔外科)의 영역이다. 뒤늦게 시작한 성형외과 의사들이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여 제멋대로 양악수술을 하는 것이며, 양심 있는 성형외과는 치과의사의 협진을 받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은 교합 관계를 무시하고 시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확실히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는 것이며, 침범당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상호 협력과 협조 아래 환자를 위한 수술이 되어야 한다. 수도육군병원 근무 시절 군의 대민진료 봉사사업의 목적으로 채택되어 한때 토순(兎脣) 환자 수술을
어린이날 오전, 구립양로원에서 봉사활동을 마친 두 아이를 태우고 동태탕을 파는 식당에 들렀다. 이곳은 국물이 시원하고 얼큰해서 아이들도 흔쾌히 따라나섰던 곳이다. 사장님이 바뀐 게 마음에 걸렸지만······. 휴일 이른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식당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쭈그러진 노란 양은 냄비 안에 동태탕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앞 접시에 동태탕을 덜어 맛을 보니 국물의 간이 맞질 않았다. 육수는 밍밍하고 텁텁했다. 그냥 맹물에 동태를 끓인 느낌이었다. 식당 주인에게 소금을 달라, 다진 양념을 가져달라 온 가족이 부산을 떨었지만 십 리까지 달아난 입맛은 밥 한 그릇을 다 비우는 동안 결국 돌아오질 않았다. 카드를 내밀고 계산을 하면서 ‘내가 끓여도 이보단 맛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진짜로 동태탕을 끓여볼 생각이었다. 마트 생선판매대에 가보니 손질하지 않은 러시아산 절단 동태가 있었다. 막상 집에 사 오긴 했는데 손질하기 막막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결국 동태는 식탁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냉동실에서 그야말로 ‘동태’로 남았다. 아마도 다른 냉동식품에 둘러싸여 당분간 빛을 보기는 어려울 듯싶다. 녀석이 내게 텔레파시라도 보내는지 불현
1927 경기도 용인 출생 1949 서울치대 3회 졸업 1969 예비역 치의 대령 대한치과의사협회 감사 1974 대한치과의사협회 총무 1980 대한치과의사협회 부회장 1967 대한구강보건협회 부회장 감사 고문 1967 대한치과기재학회 3-5대 회장 고문 1978 인공치아이식임플란트학회 초대 2대회장 1979 국제치의학사회 I.C.D. 평생회원 1982 서울대학교치과대학동창회 부회장 1982 전주류씨 전양부원군 종중 회장 현) 종로구치과의사회 지도위원장 유 양 석 치과의원장 상훈 : 보국훈장 협회대상 서울치대동문상 수상 #수도육군병원 육군병원이나 종합병원의 수준과 등급을 알아보려면 그 병원의 치과 시설과 수술실 그리고 도서실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치과 시설은 마치 백화점의 Show window와 같은 것으로 최신장비시설을 자랑하는 곳이다. 특진실(特診室)을 마련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치과 부장실에는 커다란 책상이 3분의 1은 차지하고 있었으니 나에게는 결재할 것도 별로 없는데 Pen보다는 Hand Piece가 필요하다고 이들을 복도에 다 끄집어내고 최신장비를 신청하였다. 이때에 Air Turbine이 한국에 최초로 들어 온 것이었으며 Evacuator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로부터 이름 때문에, 아니면 생김새 때문이라도 별명을 부르곤 했다. 별명은 내가 좋든 싫든 간에 꼬리표를 단것처럼 따라다니며 이름보다 기억하기 좋은 단어로 머리에 남아 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는 그 사람의 인격을 생각하여 함부로 별명을 면전에 두고 부를 수는 없었다. 달갑지 않은 보복이 있을 수 있고 아니면 괜한 시비거리를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별명과 호칭은 한 사람의 인품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때 상대방의 직업이나 존재감을 잘 모를, 즉 중년 남자들은 사회에서 편의상 사장님으로 통했다. 실제로 회사나 자영업 경영 유무와 상관없이, 상대방을 품격 있고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 있는 사장님으로 격상해서 호칭을 불러주는데 누가 화를 낼 것이며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백화점에 가도 그만한 대접에 잠시 기분이 우쭐하여 마치 그 자리에 내가 있는 양 착각한 나머지, 사고 싶지 않은 물건도 종업원의 호사로 구입하기도 했던 모습을 기억한다. 요즘은 연배가 있으신 분들 중 통상적인 호칭이 남자는 선생님, 여자는 사모님이 대중화된 것 같다. 직업의 사회적인 위치에 따라 재직하고 있는 사람이 남녀노소와 상관없이 대중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