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 보는 사람이 외롭지 무인도가 외로운가 새들이 춤을 추며 놀아 주고 늘 파도와 함께 속삭인다 뱃고동 소리 되받아 주고 폭풍이 와도 감싸 주는 당찬 나무들이 가득 찬 섬 사람 없는 곳이 무공해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육지나 새들이 모여 사는 무인도나 떠들어 시끄럽기는 마찬가지 어느 곳이 더 요지경 속인가 잠깐 살다가는 생명들 육지도 외롭기는 마찬가지 이따금 눈길이 쏟아지는 섬 무인도는 외롭게 보일 뿐. 김영훈 -《월간문학》으로 등단(1984) -시집으로 《꿈으로 날으는 새》, 《가시덤불에 맺힌 이슬》, 《바람 타고 크는 나무》, 《꽃이 별이 될 때》, 《모두가 바랍니다》, 《通仁詩》 등 -대한치과의사 문인회 초대 회장
박용호 원장 박용호 치과의원 원장 대한치과의사문인회 회장(전) 한국문인협회 회원 치과신문 논설위원 치의학 박사 수필집 《와인잔을 채우다》 지난겨울, 고등학교 동기회장이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고 치과로 연락을 해왔다. 전화로는 안 되고 굳이 점심때 찾아 오겠단다. 대학 부총장으로 바쁜 그가 전 동기회장(그도 신협 이사장으로 분주하다)과 대동했다. 요지인즉 우리 기수가 고교 총동문회장을 맡을 차례인바 내가 적임자라는 것이다. 사실 수입차 사장과 중견기업 사장 동기 두 사람이 물망에 올랐는데 그들이 고사하니 나에게 밀려온 것이었다. 뜻밖이었다. ‘아……. 감투가 이렇게도 흘러오는구나’ 능력‧재력‧체력‧시간이 필요한 큰 자리다. 유력한 관직이나 사업가 선배들이 역임했던 막중한 직책이다. “나를 생각해준 것은 영광이지만 못하겠다. 새벽 골프도 끊었고 술도 못한다.” “그건 본질이 아니잖아~” 옹립위원회를 만들어 돈 낼 사람 술 대신 먹을 사람 내세울 테니 걱정 말란다. 그래도 그게 어디 그런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내 말에 그들은 삼일만 더 생각해 보라며 돌아갔다. 그즈음 박 대통령 기소로 전국이 시끄러웠고 촛불ㆍ태극기 시위로 떠들썩했다. 감투 비리를 둘러싼 초유
등굽은나무 길가에 서서 한평생 흘려보낸 등 구부린 우람한 정자나무 검푸른 잎마다 활짝 펴 잠시 쉬어가라 한다 가지 끝으로 뻗어나는 여름 새들과 이름 모를 벌레까지 모여 맨몸으로 노래하며 악단 이룬 이 나무 그늘에 내 땀은 잦아든다 곧은 나무들은 다 어디로 가고 긴 세월 혼자 지켜온 이 자리 등 굽은 정자나무 아래 다가서면 모두가 허물 가린 길손이 된다 나는 이제까지 멀쩡한 몸으로 누구에게 즐거움 주었으랴 수많은 사연 등에 건 이 정자나무 우러러보고 다시 떠난다. 김영훈 -《월간문학》으로 등단(1984) -시집으로 《꿈으로 날으는 새》, 《가시덤불에 맺힌 이슬》, 《바람 타고 크는 나무》, 《꽃이 별이 될 때》, 《모두가 바랍니다》, 《通仁詩》 등 -대한치과의사 문인회 초대 회장
박용호 원장 박용호 치과의원 원장 대한치과의사문인회 회장(전) 한국문인협회 회원 치과신문 논설위원 치의학 박사 수필집 《와인잔을 채우다》 아는 후배로부터 급히 연락이 왔다. 60대 환자 단순 발치를 한 개 했는데 며칠 후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어 대학병원 구강악안면외과를 거처 감염내과에 입원했다고 한다. 원래 신장과 심장에 기저질환이 있었는데 바이탈마저 우려되었다가 고비는 넘겼다고 한다. 환자 가족들이 몰려와서 항생제 처방을 안 해줘 이 지경이 됐다고 여러 차례 난리를 쳤단다. 후배는 멘붕 상태였다. 나는 환자가 사망 안 했으니 다행이고 배상은 보험사에 맡기면 되니 행패엔 담담히 대처하라고 일러두었다. 발치는 치과의사라면 매일 밥 먹듯 하는 안전한 수술이다. 중국 오지의 발치사(치의 없는 지역에서 발치만 전문으로 하는 기능사)가 완전 멸균 안 된 기구로 시술하고, 남미에선 토픽뉴스에 나올 정도로 진료 봉사 때 동산만큼 발치를 해도 큰 문제가 없다. 치의에겐 진료의 중심이고 그 자체로 생명의 근원이던 치아가 수(壽)를 다해서 악의 근원이 되면, 발치할 때 그렇게 신날 수가 없다. 사자의 마음과 여우의 말과 원숭이 손으로 소임을 마치면 조폭 두목 잡은 검사의 기
내왕국에 마당에 새떼가 날아와서 빛나는 눈빛과 알 수 없는 언어로 이 땅의 주인처럼 나의 존재에 끼어들고 있다 구름 속에 숨어 산을 넘고 바람 타고 강 건너온 무리 내가 왕이고 싶은 내 땅과 내 나태를 잽싸게 낚아챈다 새들이 짝지어 부르는 노래 사랑의 연극같이 보이지만 시시때때로 지쳐 울부짖는 내 속내보다 즐거워 보인다 나를 점령하고 깃발을 높이 펄럭이며 식민지가 된 내 마음에 사랑의 등불 켜놓고 간다. 김영훈 -《월간문학》으로 등단(1984) -시집으로 《꿈으로 날으는 새》, 《가시덤불에 맺힌 이슬》, 《바람 타고 크는 나무》, 《꽃이 별이 될 때》, 《모두가 바랍니다》, 《通仁詩》 등 -대한치과의사 문인회 초대 회장
세상의 모든 꽃들이 다 결실을 맺을 필요는 없다. 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더구나 자신과 같은 비숙련자가 - 비록 식물이라고는 하나 종자를 남길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거창한 다른 개체의 문제에 관여하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A는 더 이상 자신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인공 수정에 실패하면 리톱스 화분도 다시는 보지 않게 될까. 아버지의 무심한 목소리가 파동이 되어 조용히 허공을 갈랐다. A는 그 파동에 자신이 쨍하니 울리는 감각을 느꼈다. 손가락 사이로 열심히 노란 꽃술에 붓질하던 자신의 모습이 물결처럼 일그러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A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 자신의 딸을 데리러 왔던 B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운동회 날, A의 어머니는 멀찍이서 양산을 쓰고 서 있던 B의 어머니에게 여기 와서 같이 앉자고 말했다. A는 어머니 옆에 앉아 있다가 B의 어머니가 다가오자 좀 더 구석으로 당겨 앉았다. B의 어머니는 눈인사를 하며 돗자리에 앉았고 A의 어머니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새 보니 마당에서 고추를 말리던데 고추 농사도 짓는지 몰랐다, 그런 이야기를 A의 어머니가 했던 것 같다. 그런데 B가 달리기를 하다가
B로부터 다시 연락이 온 것은 A가 이사를 온 지 2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A는 편의점에서 재고 정리를 하던 중이라 B가 보낸 스마트폰 메시지를 바로 확인하지 못했다. 일을 끝내고 확인했더니 오후 5시쯤에 잠깐 오피스텔에 들렀다가 돌아갈 거라는 내용이었다. 시계를 보았더니 오후 4시를 약간 지난 시간이었다. A는 점장에게 인사를 하고 곧바로 오피스텔로 올라와 방 정리를 했다. 그동안 손도 대지 않았던 캐리어에서 책들을 꺼내 대충 비어 있는 책장에 꽂았다. 냉장고에 보관 중이었던 편의점 도시락도 모두 꺼내 버렸다. B는 오후 5시 반쯤, 부스럭거리는 큰 비닐 봉투를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 A가 문을 열었더니 B는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표정이었다. “날씨가 너무 덥지 않니? 에어콘 좀 틀고 있지 그랬어.” B가 익숙한 손동작으로 리모컨을 조작했다. “사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지금 막 들어온 참이거든.” “너 아르바이트 하는구나. 어디서?” “여기, 바로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 거기? 일하기 편하긴 하겠다. 그런데 거기 은근히 손님이 많아. 바로 앞에 흡연 부스가 있어서 그런가.” 그건 B의 말이 맞다고, A는 생각했다. 유난히 담배를 찾는 손님이
그것은 실로 특이한 식물이었다. 독특한 문양을 가진 자갈돌을 촘촘히 박아놓은 것 같기도 했고 탈피를 앞둔 갑각류가 납작하게 엎드린 채 무리를 이루고 있는 듯도 했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 식물에 대해 꽤 지식이 있다고 자부했던 A였기에 이 낯선 식물에 대한 호기심은 적지 않았다. A는 화분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그 식물을 만져 보았다. 차갑고 매끈했다. “그거 화분 말이야, 진짜 예쁘지 않아?” B가 화장대 거울 속에 비친 A에게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화분이 예쁘다는 뜻인지, 이 독특한 식물이 예쁘다는 뜻인지, A는 헷갈렸다. B는 거울을보며 선물로 받았다는 새 귀걸이를 조심스럽게 끼우고 있는 중이었다. B는귓불이 약해서 새로운 귀걸이로 갈아 낄 때마다 상처가 나곤 했다. “응, 예쁘다. 그런데 이건 다육식물인가? 이름이 뭐야?” “뭐라더라? 저기 파일에 보면 사진이랑 이름 있어. 한번 봐봐.” B는 익숙하게 화장 솜으로 귓불을 꾹 누르며 책상 위에 있는 파일을 가리켰다. B는 시내의 이름난 꽃집에서 매주 ‘그린 인테리어’ 수업을 듣고 있었다. 요즘 강남의 젊은 부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실내 조경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직접 화분을 만들거나 간단
산수국 어디론가 떠나면서 건네받은 산수국 지난날 영산나루 강둑에서 만나보고 잊고 또 잊었는데 보랏빛 겉 꽃잎은 호위무사처럼 벌 나비를 유혹한다 가까이 다가서 들어다 보니 당신 같은 참꽃도 피워 가는데 속절없이 변해가는 마음이 블루로 남았다 보랏빛 꽃잎 같은 시절의 속죄가 서럽기도 그립기도 하여 일찍 떨군 꽃잎들은 강 톱에서 외발로 서서 우는 왜가리 같은 흰 꽃 무더기로 변해간다 일평생 가져 보지 못한 찬란한 헛꽃의 꿈들은 당신이 떠나간 빈 허공에 하나 둘 셋 별을 메어단다 임창하 원장 임창하 치과의원
언제나 편하게 오늘 밤이 어때? 감미롭게 넘어가던 와인이 목구멍에서 걸린다.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웃음이 부드럽게 살랑거린다. 뜻밖의 말이다. 뜻밖의 얼굴 표정이다. 마치 뜻하지 않은 연극 속 배우를 보는 듯하다. 20cm 거리의 그녀가 낯설다. 그녀의 숨소리는 잔잔하다. 와인 내음이 풍기지 않는다. 눈동자가 반짝인다. 내가 무슨 말을 했길래 그녀가 그런 대답을 했을까? 순간 기억이 가물거린다. 오히려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의아한 듯 바라본다. 그녀는 조용히 와인 잔을 입술로 가져간다. 웃음이 번지는 입술 속으로 와인이 스며든다. 옅은 초콜릿 색 입술이 선명하게 보인다. 어때, 오늘 밤? 그녀가 다시 한 번 나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와인이 스며든 그녀 목소리는 초콜릿처럼 달콤하다. 좀 더 나에게 다가오며 더 진하게 웃는다. 숨소리는 차분하다. 반쯤 남은 와인을 음미하지 않고 냉수처럼 벌컥벌컥 들이킨다. 와인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동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오늘? 좋지. 쉽게 대답이 나온다. 취기 때문에 나온 대답이 아니다. 놀라움에 나온 대답이다.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숨을 빠르게 가라앉힌다. 들숨날숨을 몇 번 크게 쉬면서 조용히
푸른 상흔 치명적이다 아프다, 푸르다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아프다, 푸르다 기억한다 지워지지 않는다 푸른 상흔 젊은 날의 맑고 깊은 떨림이 있어 목숨 걸고 사랑해야 한다면 상처가 위로가 될 수 있어야 한다 푸른 상흔 자유롭게 유영하라 지내온 상처를 덮쳐 가듯 덮쳐 간만큼만 홀로 서자 홀로 서 기다려보자 늦은 비를 기다리듯 늦은 시를 갈망하듯 치명적이고 푸르디푸른 상흔은 갓 올려진 푸덕거림으로 소중한 당신을 아름답게 하리라 당신의 아름다움을 누구나 사랑하게 되리라 푸르디푸른 상처를 들어 보여준 당신은 사랑이어라 깊고도 깊은 사랑이어라 임창하 원장 임창하 치과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