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예술의전당 후원회를 창립하면서 졸저 ‘I. O. U.’를 냈다(2004). 대전광역시치과의사회장 때 영시(英詩)와 수필을 엮은 ‘첫사랑’(1993)으로 시작하여, ‘오늘부터 봄’은 대전치과신협 초대이사장(1996), ‘거품의 미학’은 협회 대의원총회 의장(1999)에 취임할 때 출판하였다. 자신의 포부와 정견을 홍보하려는 선거 입후보자의 통과의례, ‘출판기념회’와 비슷한 맥락이다. 다른 점이라면 필자는 출판시점이 취임 후 3개월쯤이고, 최종 발송까지 모든 비용은 자비였으니, 선거운동이나 정치자금 모금과는 거리가 멀었다. 경제적인 부담은 컸지만, 회무를 추진할 때에 회원들이 베풀어준 이해와 협조를 되돌아보면, 결과적으로는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 ‘차용증서(I Owe You)’라는 책 이름은, 캐리 & 론의 노랫말을 빌려 불가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풀어낸 수필 제목이었다. 장형은 부모(長兄父母)요 부모만 한 자식 없다는 말은, 인물비교가 아니라, 가없는 헌신의 내리사랑 얘기다. 공기와 물처럼 내 전부가 그 안에 잠겨있어, 떠나가신 뒤에야 비로소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모님 은혜는 살아생전에 갚을 길이 없고,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만기
야생은 먹이사슬 법칙에 따라 먹이를 구해 생명을 영위하지만, 반대로 순간의 실수로 자신 역시 먹잇감이 되어버리는 살벌한 삶의 현장이자 어떠한 연습도 허락하지 않는 냉정한 세계이다. 포식자는 먹잇감의 사지가 경련을 일으키다 경직이 되는 순간까지 목을 틀어 물어 숨통이 끊어진 후에야 본격적으로 만찬을 즐기게 되는데 어떠한 관용도 베풀지 않는다. 뻐꾸기 어미는 자기보다 몸집이 작은 딱새나 뱁새가 애써 지어놓은 둥지에 몰래 들어와 알을 바꿔치기하는 탁란 방식을 빌어 종족번식을 하게 된다. 주인집 자식을 밀어내어 죽이는 갓 태어난 뻐꾸기 새끼의 본능적인 행동이야말로 이기적인 유전자가 코딩되어 있지 않고는 존재하기 힘들지만, 이 역시 엄연한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야생의 법칙을 인간세상의 법칙에 도입하여 비유와 예제 삼아 인간적인 해석을 덧붙이는 것은 우리 인간에 내재된 동물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화자(話者)의 지나친 야생적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비유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위에 언급한 포식자와 뻐꾸기의 행동은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냉정한 동물의 세계이지만 이들이 동료나 동족을 그 대상으로 삼는 일은 드물다. 얼마 전 모 전문지에
직원들에게 주말마다 산행이나 회식을 강요하는 기러기 아빠인 상사가 있다. 상사는 주중에 바빠서 운동도 못 하는 직원들에게 체력관리도 시켜주고 좋은 맛집에서 먹여주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게 하려고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고 얘기한다. 젊은이들은 이런 기성세대를 향해 갑질을 한다고 하고 꼰대라고 부른다. 꼰대는 본래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으며 사전적인 뜻은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 근래에는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이나 경험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 직장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의미가 변형되었다. 우리에게 꼰대라는 말은 좋은 뜻은 아니며 대부분 본인이 꼰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꼰대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인터넷에 여러 종류의 꼰대 체크리스트라는 검사법이 있는데 내 나름 12개의 항목을 정리하여 만들어 보았다. 다음 항목 중에 본인에게 해당하는 것이 몇 개인지 확인하고 꼰대 여부와 꼰대라면 어떤 유형인지 한번 평가해 보기 바란다. # 꼰대 자가 진단 테스트 1. 나보다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치과대학 중 가장 늦게 설립된 강릉원주대 치과대학에는 정타와(井打蛙)라는 통기타 동아리가 있다. 이 이름의 뜻과 우리 치과계의 현실과 접목하여 생각해보려 한다. 지금 서울에서 강릉까지 방문을 하려면 KTX를 타고 채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지만, 치대 설립 당시인 90년대에는 4~5시간이 걸리는 오지로, 2차선으로 중앙분리대조차 없었던 영동고속도로 중 대관령을 넘는 구간은 마음의 벽이자 물리적인 벽이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설립 초창기 동문들은 대관령이라는 벽을 넘어 치과계의 큰물로 나아가자는 취지로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을 깨고 크게 나아가라며, ‘우물을 깨는 개구리’라는 뜻의 ‘정타와(井打蛙)’라는 동아리 명칭을 만들게 되었다. 강릉원주대 치대는 설립한 지 30여 년이 돼가지만 아직도 신생 치대로 분류되고, 정원 자체가 40여 명으로 졸업생 숫자가 많지 않기에 아직도 각지에서 동문들을 보기는 쉽지가 않다. 치과계 활동을 하는 몇몇 동문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직도 다들 궁금함이 가득한 눈으로 봐주시기에, 우물을 깨오기는 했으나 깨고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서지를 않는다고들 하는 농담을 하곤 한다. 여하튼, 지난 수십여 년의 시간동안 치과계는 봉사와
해군 군의관 전역 후 초창기 충남대학병원 치과 과장을 맡고,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12시까지는 선친의 임 치과에서 교정환자를 진료했다. 대위 4호봉을 조금 넘는 박봉이지만, 동문 주니어 스태프들과 어울려 즐겁게 보낸 5년이었다. 오후 4시 외래가 끝나면 테니스로 땀을 흘리고, 병원 앞 슈퍼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에 이어 은행동 정종대포가 풀 코스였다. 임상연구비 연 백만 원은 사실 생활보조금인데, 논문 제출이 의무였다. ‘구저부(口底部)에 발생한 피부양낭종(Dermoid Cyst) 적출 증례’를 써서 용감하게(?) CPC에 발표했다가, Skin Inclusion을 따지는 조직병리학 교수에 진땀을 뺐다. 평소 큰소리 치는 내과는 직접 열어본 외과에 밥이요, 외과는 세포로 확인하는 조직병리에 밥이라는 속담과 나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고, 다음부터는 주제를 치과 영역으로 돌렸다. 덕분에 남은 ‘하악 제3대구치 발육에 관한 X-선학적 연구’는 작으나마 보람 있는 논문이었다. 당시 성년 전후의 연령감정 수요가 많았다. 남자는 병역과 청소년 운동선수의 한계연령, 여자는 동갑이나 연하남을 기피하는 사회적 통념 탓이었다. 천여 장의 필름에서 제3대구치 발육상태를 10개 패턴으
우리나라의 첫 서양식 치의학 교육기관은 경성치과의학교이다. 조선총독부의원 치과과장과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였던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가 진남포의 실업가 토미다 기사구(富田儀作)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1922년 4월 2년제 야간으로 설립한 것이다. 교사는 총독부의원 건물 일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사 일부를 빌려 사용하였다. 1년 후 주간 3년제로 바꾸었고, 6년 뒤인 1928년 9월 저경궁터에 학교건물을 신축낙성하고, 1929년 4월 병설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개교하여 4년제 치의학사를 배출하게 되었다. 광복과 더불어 1945년 11월 경성치과대학으로 발족하고,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 설립과 더불어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및 부속병원으로 개편되었다. 1959년 1월에 2년제 치의예과가 문리과대학 이학부에 신설되어 4년제에서 6년제로 바뀌었다. 경희대학교 치과대학(치의예과)이 1966년 12월,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치의예과)이 1967년 12월 인가되었다. 이어서, 경북대, 조선대, 전남대, 전북대, 원광대, 부산대에 치과대학이 발족한데 이어, 1992년 3월에 강릉대학교 치과대학(치의예과)이 인가되어 전국에 11개 치과대학 시대가 열렸다. 교육인적자원부의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유행성 질환인 폐렴이 2019년 12월 발병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야생동물을 먹고 위생 생활이 열악한 사람들의 국한된 얘기인 줄 알았다. 2020년 1월 20일 한국을 방문한 중국인이 최초의 감염자로 확진된 이후, 1월 27일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코로나19) 위기 경보 수준을 ‘주의’에서 ‘경계’ 수준으로 격상하고, 중앙사고수습본부를 설치했다. 이후 2월 17일까지 확진 환자는 30명 수준으로 소강상태를 보여 사스나 메르스 때처럼 조만간 종식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2월 20일 대구·경북 지방을 중심으로 특정 종교 집단을 통해 #31 감염자가 나타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WHO에서는 코로나19가 전 세계 여러 나라로 확산하자 1월 30일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했으며, 3월 11일에는 감염병 세계 유행(팬데믹)을 선언했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감염방지를 위해 많은 나라가 외국인들의 입국을 금지하고 도시 봉쇄 등 강력한 조치를 하고 있지만 넘쳐나는 확진자와 사망자로 인해 환자를 제대로 진단이나 치료를 못 해주는 의료 붕괴가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5월 4일 기준으로 확진 환자 1만801명 사망자 252명이고
지난 제69차 대의원총회에서 제31대 이상훈 협회장은 제30대 김철수 협회장의 ‘정책, 소통, 화합’의 원칙에 이어 ‘분열과 반목을 끝내고 치과계 대화합’을 이어서 추진할 것을 천명하였다. 수많은 회원들의 열망과 노력 끝에 치협은 두 번째 직선제 선거를 치렀다. 하지만, 3년 전과 똑같은 인물들의 공약과 스토리는 회원들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다. 상대방에 대한 강한 자극을 통해 지지를 이끌어 내려는 네거티브 전략을 위해, 일반 국민 대상 언론에 자극적인 보도자료를 내보내 치과계 전체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제30대 감사단은 ‘회무 경력 수십 년 동안 이번처럼 대포폰을 이용할 정도로 극렬한 선거운동은 처음으로 이 문제는 꼭 개선해야 한다.’는 발언과 함께 입장문을 발표하여, 몇 가지 사안에 대해 사법적인 해결책 및 윤리위원회 제소를 할 것을 선관위 및 협회에 요청하여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치과계 전체의 상처가 너무 크다. 개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과거에 진행해오던 협회의 관습적 회무에 대해 ‘구태’라는 개념을 대입하기 전에 ‘왜 그렇게 해야만 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합당한 논리적 근거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이러스가 포함된 비말타액으로부터 거리를 두자는 것이다. 상대방의 침이 나에게 튀지 않아야 하니 나는 마스크를 쓰는 것이고, 상대방의 침이 묻은 물체를 혹시 내가 만질 수도 있으니 수시로 나는 손소독을 해야 한다. 내 침 역시 타인들에게 동일한 대접을 받는다. 수많은 환자들의 치과진료 과정에서 발생된 비말타액이 가득 찬 진료실. 잠깐 다녀가는 환자분들보다 온종일 그 진료실을 지켜야만 하는 치과의사들은 비말타액을 흡입할 확률이 산술적으로도 수십 배가 높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치과의사가 진료실에서 흡입하는 것이 비말타액뿐일까? 치과진료 중 발생하는 분진성 미세먼지에 결합된 중금속(수은, 니켈 등)과 화학물질(monomer 등) 역시 치과의사의 호흡기를 거쳐 가지 않는 것이 없다. 이번 코로나19가 터지기 전까지 덴탈마스크 한 장에 의지해 진료를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치과의사의 감염불감증에 대해 우선적으로 개선책을 마련함과 동시에 치과의사가 들이마시고 있는 중금속과 화학물질들로 인한 장기중독(長期中毒)에 대해서도 이제는 진지하게 고민해 볼 일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순위는 사람에 따라 바뀌어도, 으뜸가는 불가사의는 역시 인간 자체일 것이다. 인간을 정의하려는 노력이 인문학(文史哲)이며 그 중심에 역사가 있다. 역사를 읽는 현실적 단위인 국가 흥망을 보면, 멸망 원인은 내우외환(內憂外患), 즉 내우가 앞선다. 가정에서 국가까지 경계해야 할 대상은 항상 ‘내부의 적’인 것이다. 협회장 재선거 과정을 겪으면서 다시 한번 뼈저리게 깨달은 교훈이다. 대한치과의사협회처럼 수익구조가 없는 전문인 단체는 소송 같은 파상적인 소모전 공격에 대책이 없다. ‘미 투’의 물결로부터 “독버섯은 침묵과 방관을 먹고 자란다.”는 교훈을 보지 않았는가? 구성원들이 강 건너 불구경하는 무관심을 기화(奇貨)로, 목소리 큰 자가 휘젓고 다니는 일방통행을 방치하면, 반드시 비싼 대가를 치른다. ‘닥치고 소송’의 재발 방지에 전 회원이 뜻을 모아야 하는 이유다. 선거를 물고 늘어져도 문제지만,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협회의 작은 통제력마저 훼손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요양기관이나 영리병원 등 대세의 흐름을 앞두고 심각한 재앙이 될 수 있다. 예컨대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사무장치과 체인이 ‘연쇄소송’을 ‘학습 모델’로 삼아, 치
60년대 말 예과 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를 읽었다. 그 당시는 실존주의 철학이나 실존주의 문학이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던 때였다. 싫든 좋든 인류 앞에 닥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그 상황에 갇혀버린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와 새로운 윤리의 모색을 시도한 사람들의 문학이 협의의 ‘실존주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가 팬데믹이 된 상황에서, 카뮈의 ‘페스트’가 떠올라 다시 읽어보기로 하였다. 카뮈는 본문 시작 전에, “한 가지의 감옥살이를 다른 한 가지의 감옥살이에 빗대어 대신 표현해 보는 것은, 어느 것이건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빗대어 표현해 본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합당한 일이다.”라는 다니엘 디포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194X년 프랑스령 알제리의 오랑시에서 발생한 페스트로 봉쇄된, 오랑시에 갇힌 시민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구 20만인 오랑시에서 페스트가 발생한 것은 아니니, ‘페스트’ 전체의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빗대어 대신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페스트에 빗대어진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은 무엇일까. 1941년부터 1947년에 걸쳐 7년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