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석가모니 부처님을 삼계의 도사라고 한다. 삼계의 중생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는 스승이라는 뜻이다.삼계란 나고 죽는 것을 반복하는 중생의 세계로서, 욕계·색계·무색계를 말한다. 이들 세계는 중생의 속성인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정도를 반영하여 나타나는 세계다. 삼독심이 가장 많은 세계를 욕계라고 한다. 욕계는 탐욕이 많아 정신이 흐리고 거칠며,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어리석은 중생들이 사는 세계이다. 지옥에서부터 인간, 일부 천계가 이 욕계에 속하는데, 인간계는 스스로가 하기에 따라서 삼독심을 극복할 수도 있고 더 깊이 빠져들 수도 있는, 의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세계다.고대 인도인들은 삼계를 아래서부터 차례로 형성되는 유형적인 세계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삼계를 단순히 입체적인 공간으로만 보지 않고 정신적인 면, 즉 수행의 깊이에 따라 펼쳐지는 세계로 파악하셨다. 다시 말하면 물질은 곧 마음의 화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리들의 정신세계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니 만큼 입체적인 공간의 삼계와 정신적인 차원의 삼계를 둘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외부의 물질이나 주어진 조건을 가지고 어떻게 해보려고 용을 쓰기에 앞서 자기 성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은 어렵다고들 한다.그러나 나도 모르게 같은 일을 반복 하다 보면 집착이 생겨서 그곳을 떠나기도 어렵고 다른 일을 하기도 쉽지 않게 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사람이 생전에 어디다 어떤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 죽고 난후의 의식이 그곳에 머물러,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과 때로는 부딪히기도 한다. 살아 생전에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기르는 것은 이 우주법계에서 내가 해야 할 소명인 것이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 만이 부딪힘이 있고, 그 부딪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음공부를 해나가는 것이니 부딪힘이라는 경계는 나를 진화시키는 고마운 공부재료인 것이다.어떤 사람이 배를 띄워 호수로 뱃놀이를 갔다.흥에 취해 놀다가 아주 비싼 금가락지를 호수에 떨어뜨렸다.금가락지를 찾으려 아무리 이곳저곳을 헤엄쳐도 금가락지는 보이지 않았다.해가 뉘엿뉘엿 져서 컴컴해지자, 내일 이곳에 와서 찾아야지 하며 반지를 떨어트린 뱃전에 칼로 표시를 해두고는 서둘러 호수를 떠났다. 이튿날 반지를 찾으러 호수로 간 사람은, 뱃전의 표시로는 도저히 그 반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 어리석은 사람의 비유는 우리들의 어디에고 
어느 날 저녁, 청년법회 소속의 남녀 법우 한 쌍이 찾아왔다. 결혼을 앞두고 인사하러 온 것이었다. 그 예비부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질 즈음, 둘이서 무언가를 놓고 쑥스러운 듯 실랑이를 하면서 서로에게 미루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결국 여자 법우가 가방에서 봉투 두 개를 꺼내 놓으며 하는 말이 “스님, 결혼을 앞두고 보니 많은 걸 생각하게 되고, 많은 것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저를 이만큼 키워주시고 가르쳐 주신 저희 부모님과 또 남자친구를 이만큼 키워주시고 가르쳐 주신 남자친구 부모님께 눈물겹도록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 양가 부모님들을 위해 부처님 전에 감사의 회향(回向 모든 공덕을 일체제불과 일체중생에게 돌림)을 하고 싶습니다. 부디 양가 부모님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써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겉모습은 요즘 흔히 보는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는데 마음 쓰는 것은 어찌 그리 지극한지, 참으로 대견했다. 사실 요즘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마음은 더 각박해졌다. 실질적인 이익이 없으면 친구 관계, 스승 제자 관계, 부모 자식 관계조차 파괴하는 세상이니, 청년 법우들의 마음이 한층 더 고맙고 소중
사랑은 많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키워본 사람들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일생에 큰 장애가 되겠다 싶은 것이 아니면 짐짓 눈감아 주는 것이 좋습니다. 일일이 허물을 들추어내고도 온전히 서 있을 수 있는 집은 아주 없습니다. 이성의 가치를 높이 추앙하던 시절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가 온 세상을 휩쓸 때에 인류는 희망을 보는 듯 했습니다. 교육의 가치를 높이 부르짖었습니다. 무지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세상은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1, 2차 세계대전을 치른 후에 허무주의가 세상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목표를 잃은 지식인들은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사상이나 문화나 예술에 있어 기존의 장벽을 허물어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모든 것을 통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가치관의 부재처럼 보이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사상이 없어서 세상이 혼란한 것인가요? 모든 것을 들추어내어서 바른 것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기만 하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될까요?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나 집안을 움직이는 원리는 동일합니다. 그래서 집
윤회는 가르침이며 자비이다세상은 공평하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주위를 살펴보면 재산·학식·인물 건강 등 온갖 것을 다 갖춘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중 하나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이 공평하다는 말이 나왔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윤회’를 말하게 된다. 윤회란 업식(業識)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생명 현상을 말한다. 업식은 세세생생 윤회하며 내가 만들어 놓은 내 모습으로 여기에는 한 치의 덜함도 더함도 있을 수 없다. 악업을 쌓은 사람은 악과(惡果)를 받고, 선업을 쌓은 사람은 선과(善果)를 받을 뿐이다. 즉, 현재의 내 삶은 누군가에 의해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과거 생에 내가 지어놓은 업식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거지가 오면 동냥은커녕 쪽박을 깨고 몽둥이찜질까지 해서 내쫓는 부자가 있었다. 그러면서 항상 아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거지들은 이렇게 해야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너도 꼭 이 아비처럼 해라. 괜히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쉰밥이라도 한 술 떠 주면 자꾸 찾아온다.” 그 부자가 죽어 한 거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장님에다 병까지 앓고 있는 여자 거지였다. 그 거지 어미를 부양하기
상수도 불소화(수돗물불소농도 조정사업)와 정기구강검진 시기에 대한 논쟁을 신문지상을 통해 볼 때마다 우리 치과의사들이 착한 것 같기도 하고, 바보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싫다는데 왜 자꾸 수돗물에 불소를 넣자고 하는지, 매년 하는 정기구강검사가 귀찮다고 하는데 왜 매년하자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내가 전공의 시절 읽은 어느 학술지 사설의 글귀가 생각난다. “남들이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직업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쇠퇴시키는 집단이 있다면 그것은 치과의사들일 것이다. 불소에 의한 충치예방 사업으로 환자가 급감할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실제로 선진국에서는 충치예방에 의한 환자의 감소로 치과대학이 없어지거나 여러 과들이 통폐합되기도 한다. 불소는 확실히 충치를 감소시킨다. 20세기에서 가장 성공한 공중보건사업의 하나로 수돗물 불소화사업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소수 시민단체나 일부 관계 당국에서는 몸에 해롭다는 명확한 과학적 증거도 없이 불소의 상수도 첨가를 반대한다. 이제 지루한 논쟁을 그만두자. 치과의사는 많이 배출되는데 충치 환자마저 감소하면 미래의 치과의사들은 생활고에 빠질런지도 모른다. 충치가 되도록 많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자. 그럴수록 치과의사의 생활
옛날 어느 마을에 심성이 고운 부부가 어린애를 기르면서 곰 새끼를 함께 길렀다.곰은 클수록 부부의 힘든 일을 도맡아 한 식구처럼 잘 지냈다.그러던 어느날, 그 부부가 밭으로 일하러 간 사이에 어린애가 잠을 깨서 울고 있었다.때마침 나무를 해 부엌에 짐을 부리던 곰이 아이가 울 때마다 부부가 아이를 다독이던 모습이 떠올라 방으로 들어가 아이를 다독거렸다.그러나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가서인지 그만 어린애가 죽고 말았다.부부가 밭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와 보니 그때까지도 곰은 죽은 어린애를 두드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부인은 곰이 자기 아이를 죽였다며 난리를 떨었지만 마음씨 착한 남편은 “곰이 곰 행을 하지, 아이를 혼자 버려두고 나간 우리 잘못이다”하며 조금도 곰을 원망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부부의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던 곰이 자기의 잘못을 알아 차렸는지 그 후로는 행동이 사람의 행동처럼 자꾸자꾸 변해 가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밭으로 밥까지 챙겨 오는 것이였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우리 어린애는 죽었지만 같이 지내는 곰이 이젠 제법 사람의 행을 하고 마음을 쓸 줄 아네. 모습은 곰이지만 성품은 사람 못지 않네”하며 안타까워했다.그러던 어느날 곰이
대부분 유아들에게 이름표를 달아준다. 길을 잘 잃기 때문이다.(최근엔 이름외에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써넣다가는 유괴범의 표적이 될 수 있는 험한 세상이기도 하지만...)특히 휴대하고 다니는 물건 중, 본인 개인에게만 중요한 물건에는 이름표를 달아놓으면 좋다. 견물생심을 느낄 물건이 아닌 이상 주인을 찾아주려고 노력하는 친절은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천성이다. 더욱이 단체생활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개, 고양이 등 애완동물 목에 이름표를 달아주는 경우도 있고, 기숙사 같은 곳에서는 칫솔, 화장품, 옷, 양말, 팬티 등에 이름표를 써놓는 아이들도 많고, 학교에서는 문방구, 가방, 신발 등에 이름을 뜨개질로 새긴 학생들도 많다.군인들은 군번과 이름과 혈액형이 새겨져 있는 인식표를 달고 다닌다. 그 이름표가 50년 후에도 유골이 가족들에게 찾아가도록 해주기도 한다.노인들이 많아진 세상이 되면서 양로원, 요양원, 치매중풍센터, 정신병원, 요양병원 등과 같은 곳이 꽤 많이 늘었다. 그런 양로원에서는 간혹 옷가지나 개인용품을 잃어버렸다고 화를 내고 불평하는 노인들이 발생할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이름표를 일일이 잘 붙이는 것 외에는 마땅한 해결책이 없는 모양이다.젊은
중국에서 무제(無際) 보살이 선풍을 드날리던 때의 일이다. 양보라는 청년이 무제 보살의 제자가 될 생각에 길을 떠났다. 그런데 도중에 한 노스님을 만났다. “어디 가시오?” 노스님이 물었다. “보살을 찾아 사천 땅으로 갑니다.?양보의 대답에 스님이 다시 물었다. “보살을 찾아가느니 아예 부처를 찾아가는 게 낫지 않겠소?”“부처님이 어디 계신데요?” 양보가 솔깃해 물었다. “지금 곧장 집으로 돌아가 보시오. 그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신발을 거꾸로 신은 채 뛰어나오는 이가 있을 거요. 그분이 바로 부처님이라오.”양보는 왔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갔다. 그러자 과연 이불을 뒤집어쓰고 신발을 거꾸로 신은 채 달려 나오는 이가 있었다. “이게 누구냐, 양보 아니냐!”너무나도 반가워하는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바로 자신의 늙은 어머니가 아닌가. 자다가 아들이 돌아온 것을 알고 이불 제쳐놓을 사이도 없이, 제대로 신발 꿸 사이도 없이 뛰쳐나온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양보는 크게 깨달았다. 어머니가 바로 부처님이라는 것을. 그 후, 양보는 평생 어머니를 부처님처럼 섬겼다고 한다. 흔히들 불공을 드리거나 혹은 불법을 닦으려면 절에만 가야 하는 줄 알고 있다. 또 절에 모
원래 눈이라는 것은 세상 만물과 그 만물들이 이루는 어떤 현상이나 동작을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아주 하등동물이 아닌 다음에야 대개 눈이 두개가 있는데 이는 좀더 정확한 각도에서 거리감까지 살펴보면서 먹이를 찾는데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 생겨났거나 진화돼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눈을 뜨면 보이고 눈을 감으면 안보이는 것은 어린아이라도 잘 알수 있는 뻔한 사실이지만 필자가 말 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뜻의 눈이 아니라 사물(事物)을 바로 보고, 바로 느끼고, 바로 판단하고, 바로 인정하는 그런 종류의 눈을 뜨자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들의 눈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느낀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머리도 희어지고 주름살도 하나 둘씩 늘어감에 따라 눈도 점점 침침해 지고 어두워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인데 여기에 비례해서 사물을 바로 보고 평가할줄 아는 눈도 나이를 따라서 점점 어두워지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나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경험이나 안목이나 경륜이 붙어서 가치관을 바라보는 눈이 좀더 밝아져야 할텐데 말이다. 어쨌거나 비근한 예를 들면 어떤 음식점에서 개밥그릇으로 사용하던 깨진 그릇이 알고 보니 고려
미국의 한 자연주의 철학자는 인간이 가진 유일하고도 가장 훌륭한 덕성이 ‘자비심’이라고 했다. 자비심은 상대를 자기와 둘로 보지 않는 마음인 측은지심이며 인욕과 관용, 배려하는 마음 모두를 포괄하는 마음이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 참는 것은 두렵기 때문이요, 자기와 동등한 사람 앞에서 참는 것은 싸우기 싫어 참는 것이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 기꺼이 참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큰 힘을 가진 자라 할 수 있다’(잡아함경)고 하셨던 부처님의 말씀처럼 두려움이나 부담 때문에 참게되는 경우는 흔하다. 하지만 상대를 누를 수 있는 힘과 지위가 있는데도, 참기는 쉽지 않다. 나아가 상대를 측은히 여기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자비를 인간이 지닌 가장 훌륭한 덕목으로 꼽은 것이 아닐까 싶다.이 포괄적인 마음 가운데 일부인 약간의 인내와 최소한의 친절만으로도 삶은 훨씬 편안해질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성격이 거칠고 잔인해 자비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제바달다라는 자가 있었다. 그의 이런면으로 인해 대중들이 불편을 겪는 것을, 부처님께서 신통으로 아시고는 “비구들이여, 제바달다가 무자비한 것은 지금뿐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