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유행가중에서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흘러서 가나”라고 노래하는 ‘하숙생’이란 노래는 가히 철학적 경지의 노랫말을 담고있다. 깊이 마음에 새기면 새길수록 공감이 가는 가사말이다. 과연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갖는 존재적인 질문이다. 사람들은 인생 문제에 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친구와 밤을 새워 토론하기도 하고 홀로 명상에 잠기며 이런 주제를 담은 책을 사서 읽어보기도 한다. 동서고금의 현인(賢人)들의 가르침과 명상을 실은 책들은 심신이 지친 현대인들에게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여유와 인생을 이성의 빛으로 비추어주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사람들은 자주 등산을 인생에 비유한다. 등산을 할 때 우선 중요한 것은 길을 아는 것이다. 또한 등산로의 표지판을 잘 이용하는 것이다. 어떤 이가 길도 모르고 표지판도 무시한 채 산행을 계속한다고 하자. 그는 사고의 위험이 가득찬 길을 걷게 된다. 인생도 이와 비슷하다. 인생의 올바른 목적지에 잘 도착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길과 안전한 길을 알아야 한다. 길을 안다면 이미 성공적인 삶의 시작인 셈이다. 진정한 삶이라는 것은 목숨을 연장하는 차원이 아니다. 오
세상에는 많고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교리나 사상은 다소 다를지라도 인간의 구원이란 측면에서 모든 종교는 같은 방향성을 갖는다고 봅니다. 또한 모든 종교는 개인의 구원과 세상과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 함께 서로 협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타 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몇년전 지하철 안에서 체험한 일이다. 모 종교의 신도들이 지하철 안에서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소란스러워 보니 신도 여러명이 한 젊은 스님을 에워싸고 스님에게 면박을 주고있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자녀가 되어서 아버지를 올바르게 믿어야 한다”며 스님께 봉변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당하는 스님은 아무 대꾸도 않고 그들을 그냥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미동도 하지않자 나중엔 듣기 거북한 욕설까지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오히려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아무 대꾸가 없고 오히려 주위사람들이 항의하자 그들은 우르르 다른 칸으로 몰려갔습니다. 그때 그 스님의 흐트러지지 않고 여유 있는 자태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종교를 떠나서 한 인간으로 올바른 인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엄숙하게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금요일 해질 무렵부터 다음날 어두워질 때까지 휴식하며 거룩하게 지키는 날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오랜 역사 가운데 단결을 유지해왔으며, 그날은 하느님과 맺은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게 해주는 즐거운 날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현대인에게 안식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누구나 바쁘고 지쳐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시간에 쫓기고 순간의 휴식마저 잃어버리고 삽니다. 사람과 일에 지쳐서 “오늘은 혼자서 조용히 꼭 하루만이라도 푹 쉬고 싶다”는 바람을 누구나 공감합니다. 일상사를 잊고 떠나고 하루라도 진정한 심신의 휴식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유명한 발명가 에디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80세인데도 원기 왕성하게 하루도 쉬지 않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비결을 아십니까? 나는 결코 쓸데없는 일로 나를 피로하게 하지 않습니다. 앉을 수 있는 곳에서는 앉고, 누울 수 있는 곳에서는 누워서 몸을 쉬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쉬운 말 같지만 실제로 실행하기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영국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일까?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닐까? 나를 배신하고 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여라”는 성서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과연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물론 일곱 번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뜻을 포함하고 있다. 즉 어떠한 조건이나 한계가 없는 무한한 용서를 의미한다. 주의 기도에서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겸손되이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이를 용서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성서에도 용서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고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했다.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완전한 용서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용서하는 것은 사랑하기보다 훨씬 더 어렵다. 조용필이 부른 ‘Q"라는 노래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너를 용서 않으니 내가 괴로워 안되겠다/ 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 너는 나의 인생을 쥐고 있다 놓아 버렸다/ 그대를 이제는 내가 보낸다.…" 용서를 할 수 없어 잊어버리겠다는 것이다. ‘화라’는 것은 내겐 정말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사람들은 무언가를 잃었을 때 그 가치를 새롭게 깨닫는다. 건강을 잃게 되면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떠나갔을 때 그가 남긴 빈자리를 보면서 비로소 그의 소중함을 알게된다. 이처럼 인생의 깨달음은 안타깝게도 늘 한발자욱씩 늦게 간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유와 목적이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 의미를 깊이 느끼지 못하고 이유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보면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 감사할 일 뿐이다.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 때 세상은 얼마나 더 아름답고 행복할까. 한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복과 불행이 어느 한순간 갑자기 바뀌는 경우를 자주 체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쁨 속에 살게되면 과거의 슬픔을 잊기 쉽고, 아픔 속에 살 때는 과거의 기쁨을 잊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기쁠 때도 자만하지 말고, 슬플 때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다른 이들이 볼 때 초라하고 비참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가치 있게 사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주 오래
얼마전에 한국웃음연구소의 웃음에 관한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보았다. 한국웃음연구소는 대한민국 최초의 웃음 전문연구소이다. 한국웃음연구소의 주장에 따르면 웃음으로 다이어트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웃음을 통해 나오는 엔돌핀 등 호르몬 분비가 체지방 분해를 도와 살을 빼는 데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3분 동안 웃으면 11kcal가 소모되는데 이는 에어로빅을 5분 동안 한 운동량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한 웃을 때 231개의 근육이 움직이는데 많은 근육이 움직임에 따라 활력이 생기고 웃고 난 후에는 근육의 긴장이 이완돼 편안함을 느끼고 소화기 활동이 왕성해진다고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웃음이 마음에 여유를 주고 부정적인 생각과 불평불만 등을 없애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웃음이 좋다는 건 모두가 잘 알면서도 웃을 일이 없기 때문에 잘 안 웃는다. 좋은 일이 생기고 행복해야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웃음연구소의 주장은 웃다보면 좋은 일이 생기고 행복해진다고 한다. 먼저 웃게 되면 다른 이들에게도 웃음을 나누어주게 된다. 웃음을 자연스럽게 배우려면 골목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 된다. 덥거나 춥거나 할
“일소일소 일노일노 (一笑一少 一怒一老)” “소문만복래 (笑門萬福來)” 같은 말은 이제 식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웃음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유쾌한 웃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건강과 행복의 상징으로 통용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생활이 고단하다는 증거이다. 실제로 거리와 버스, 지하철 등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무표정이 요즘의 사회를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겨운 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웃음이 사라지면서 홧병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두근두근하며 속에서 열이 치밀어 오르고 목에 뭔가 걸려 있는 것 같이 거북하다는 사람이 병원을 찾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40년 동안 웃음과 건강을 연구한 미국 스탠포드 의대의 ‘윌리엄 프라이’ 박사가 주장하는 웃음의 생리적 효과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웃음은 우선적으로 통증의 자연 진통효과가 있다고 한다. 사람이 웃을 때 뇌하수체에서는 엔돌핀과 같은 자연 진통제가, 부신에서는 염증을 낫게 하는 화학물질이 나와서 진통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또한 웃음은 동맥을 이완시켜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혈압을 낮춘다고 한다.
가정교육의 모범인 이스라엘 가정을 한번 살펴봅시다. “자녀 교육은 어머니의 무릎 아래서 시작한다.” 라는 유다인의 격언이 있습니다. 유다인 어머니들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물론 가르침의 골자는 유다인 삶의 중심인 율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다인의 율법은 전체가 613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248개의 “…하라”는 가르침과 365개의 “…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교육의 목적은 자녀가 성장하기 전에 어머니의 가르침이 자녀들의 몸에 배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에게 가정은 최초의 교육의 장이 되며, 부모는 최초의 교사가 됩니다. 이 최초의 교육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녀들이 가정 밖에서 받게 되는 그 어떤 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처럼 유다인들의 교육은 기본적으로 가정에서 부모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자녀들에게 부모만한 교육자는 없습니다. 대부분 유다인 가정의 어린이들은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기의 임무를 얼마만큼 잘 수행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그 집안이 잘 되느냐 안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아내가 자기에게 부
‘의료법과 위헌’이라는 칼럼을 쓴 지가 어언 10년이 넘었다.(치의신보, 1994. 10. 15일자 참조) 의료행위를 비 의료인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논지(論旨)였다. 무면허의료행위 금지규정에 대한 한 판사의 ‘위헌제청 결정’을 읽고 쓴 글이다. 보도를 보니 황종국판사가 아직도 그 일에 매달려 있다고 한다. “무면허 의료행위를 전면 금지하고 처벌하는 의료법이 환자의 치료수단 선택의 자유와 건강권 생명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 고 주장하며“이 나라의 법률과 판결은 뛰어난 민간의술을 감옥에 가두고, 하늘이 내려준 신의(神醫)라도 의사 자격증이 없으면 수갑을 채운다”며 비난한다.언론에 인용된 문장 몇 줄을 가지고 시비를 가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만, 황씨의 주장에 대한 문제점 몇 가지는 짚어봐야 하겠다. “나라나 공공기관에서 일정한 기술자격을 인정해주는 면허”는 왜 필요한가?첫째, 사이비(似而非) 기술자의 진입을 차단하여 국민을 보호한다. 둘째, 기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약자(弱者)니까, 면허자의 서비스거부나 폭리 또는 부정 서비스 등 부당행위가 없도록 감시 관리한다. 셋째 주기적인 보수교육 및 검증으로 기술의 품질유지는 물론, 향상을 도모한다.
사람은 누구나 생활을 위하여 알맞은 환경과 보금자리인 가정이며 집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사람은 자연적 가족이나 물질적 집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인격적 관계가 존재하는 보금자리를 원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가정은 어떠한가? 우선 가정에 관한 통계를 살펴보자. 그동안 우리나라의 부부 이혼율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 가지 예로 20년 이상 된 부부 이혼율이 10년새 9배로 늘어났다고 한다. “情 때문에 참으며 산다"는 말은 그야말로 옛말이 되어버렸다. 10년 이상 함께 살던 부부의 이혼도 증가하며 고른 연령층에서 현재의 결혼제도를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가정 폭력의 문제도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해치는 큰 요소로 등장한지 오래다. 대구지방경찰청에 따르면 가정폭력은 결혼한 지 10∼15년 사이에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리고 결혼 10∼15년차가 359명으로 전체의 32.8%를 차지했다. 또한 폭행 동기는 가정불화 39.8%, 성격차 23.1% 순이었으며 음주에 따른 폭행도 22.1%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 수치는 재작년말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올해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어떻게 대화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본 주제일 것이다. 예전에는 침묵은 금이라고 했다. 그런데 현대는 자기홍보시대이므로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혹자는 현대는 오히려 웅변이 침묵보다 낫다고 한다. 현대사회에서 대화와 인간관계는 성공에 절대적이다. 그러나 말을 잘한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떠드는 것은 오히려 역작용을 낳는다. 자기 말만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면 타인으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다. 정보가 빈약하니 당연히 성공할 수 없다. 반대로 남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사람은 많은 정보를 얻기 마련이다. 따라서 성공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혼자서 말을 독점하지 않는다.말을 잘하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제스처를 많이 쓰기도 하고 큰 목소리로 자신있게 말하는 이도 있다. 이처럼 개성이 살아있는 대화는 상대방에게 주목을 받는다. 따라서 누구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독특한 말하기 스타일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진실한 마음이 담긴 한마디가 남들을 감동 시킨다. 진짜 말을 잘하는 사람은 허세부리지 않고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는 방